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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애인 문학'이라는 것

장애인은, 특히 장애여성은 우리 사회의 타자다. 물론 장애인이 다른 장애인을, 그리고 장애여성이 다른 장애여성을 타자화할 수도 있고, 차별받는다고 느끼는 그들 집단 내에서도 권력과 가치의 위계가 존재한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존중되는 권리를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다는 시민적·정치적 선언과 그에 다른 보편적인 인식을 우리는 갖고 있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기 쉽지 않은 폭력적 구조 속에서 장애인들이 다양한 종류의 차별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다. 더구나 여권주의 학파와 그 이론 속에서 장애여성은 배제되고 있다는 점, 여권운동의 역사에서마저 장애인은 늘 객체로서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때, 장애여성은 이중·삼중의 차별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장애인 자신들의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자아 응시에 주목하고자 한다. '장애자들을 위해' 수용했던 장소에서 그들을 주체로서가 아니라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맥락을 우선 살핀다. 다음에는, 장애여성이 직접 창작한 소설 읽기를 통하여 그들이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는 이중·삼중의 억압에 어떤 대응을 보이고 있는지를 비교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푸코에 의하면 글쓰기는 존재의 길 찾기다. 글쓰기의 욕망은 따라서 지워졌던 존재를 소환하는 과정이다.

주체와 타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시선은 항상 비대칭적이고 불균등적일 수밖에 없다. 주체와 타자 사이에 권력 관계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작가나 연구자들에게도 여전히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이 지배적으로 작용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렇게 장애인을 차별과 편견과 억압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은 그들의 고통 받는 현실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주체적인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장애인은 소외당한 객체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처한 현실과 문제를 해결하려고 적극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을 지닌 주체라는 관점이 문제 해결의 매우 중요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목적은 장애인이 타자가 아닌 우리 사회의 진정한 주체의 일원으로 당당한 삶을 열어나가는 긍정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데 있다. 따라서 장애인 문학에서, 특히 여성장애인 자신이 어떻게 존재의 확인을 넘어 주체되기를 시도하는지를 비교·분석할 것이다.

2. 대상에서 주체로

1) 금지를 넘어선 주체로서의 성(性)

소설가 방귀희는 돌 때 발생한 소아마비로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가는 장애여성이다. 그런데 공부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여고 수석입학, 대학 불교철학과 수석 졸업,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에서 수학하는 한편(2009년 현재), 몇 군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 회장과 장애인문학 전문잡지인<솟대문학>발행인으로서의 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방송작가로 여러 방송사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한편 동화와 소설 등을 창작하는 전문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노력은, 장애인은 전반적으로 무능력하다는 잘못된 통념을 바꾸고 싶었던 의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샴사랑> 책표지
 <샴사랑> 책표지
ⓒ 연인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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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희 소설<샴사랑>은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휠체어를 사용하는 여성장애인 '박수아'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작가의 전기적 사실에 비추어볼 때, 이 소설<샴사랑>의 여성주인공 '박수아'는 작가 자신의 분신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따라서 자전적 소설의 요소가 더러 보이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장애여성의 몸에 대한, 더 정확하게는 장애여성의 몸에 대한 금기를 넘어서는 주체의 발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까닭에서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물질로서의 몸을 통해 현존한다. 그 몸은 또한 생물학적 성별로 구분된다. 몸은 주체 형성에 있어서 인식론적 기반과 젠더적 경험, 이 경험이 각인되는 육체, 그리고 사회 역사적 토대가 논리적 연관성을 찾아가는 데 구심점이면서 무대가 되는 것이다.

몸은 생리학적·심리학적 현상일 뿐만 아니라 사유·느낌·욕구의 역동적 복합체이다. 사유·느낌·욕구의 역동적 복합체는 우리 몸의 통일적 역동성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가 몸을 통해 살아나간다는 것은, 단지 먹고 자고 숨 쉬는 생명체로서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지를 설명해주는 텍스트인 것이다. 우리는 몸을 실마리로 하여 인간의 내적·외적 우주의 살아있는 통일된 구조 즉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밝힐 수 있다.

그러나 또한 한 사회의 담론이 생산되고 선별되고 조직화되는 과정에서는 배제라는 특별한 힘이 작동한다. 배제는 금지, 분할과 배척, 그리고 진리에의 의지라는 하위 과정을 포함한다. 금지는 어떤 대상에 대한 금기 상황에서의 관례, 말하는 주체의 배타적 권리 등으로 구성된다. 예컨대 드러내놓고 성을 말하는 것에 대한 금지를 말한다. 특히 장애인의 몸, 더구나 여성장애인의 몸은 무성적인 존재로 여겨져 왔다. 방귀희 소설<샴사랑>은 그러한 사회 일반의 편견에 맞서 여성장애인의 몸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박수아(언니)와 상아(동생)는 샴쌍둥이이다. '수아'는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휠체어를 사용한다. '수아'는 대학에 갓 입학한 신문방송학과 새내기다. 상아는 미스코리아에 당선될 만큼 눈부신 미모를 갖고 있는 건강한 여성이다.

상아는 (미스코리아)진이 되지는 못했지만, 잘 나가는 탤런트가 되었다. 그 둘 사이에 서지민이라는 남성이 있다. '박수아'와 서지민은 중학교 때부터 펜팔을 통해 알게 된 사이다. 지민은 '수아'를 위해 우리나라 건축문화를 바꾸겠다고 건축공학을 선택했고, '수아'와 같은 장애인을 위한 무장애 공간에 매료되어 틈만 나면 '수아'가 살 집(그리고 자신이 건축할 무장애 공간-주택)을 종이 위에 그린다. 그런데 몸이 불편한 '수아'를 대신해서 상아가 지민을 만나는 경우가 많아지고 두 사람은 급속하게 가까워진다. 급기야 상아와 대통령의 난봉꾼 아들 사이에 염문설이 불거지고, 위기를 모면하려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육체적 관계를 맺고, 결국 지민은 그토록 좋아했던 '수아'가 아니라 상아와 결혼하게 된다.

여기까지 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통속적인 드라마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여성인물 중 하나인 상아가 유명한 탤런트가 되고(또 수아와 상아의 아버지가 전직 국회의원이다) 난봉꾼인 대통령 아들과 염문설에 휘말리는 일련의 이야기(또 상아와 지민의 결혼식 주례를 총리가 한다)는 여성장애인의 몸과 성 그리고 사랑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는 이 소설의 의미를 반감시키는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의 작가가 방송국에서 드라마를 집필하거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일을 해 온 사실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그러한 이야기 전개(설정)를 이해 못할 건 없다.

라캉의 해석에 따르자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주어진 언어에서 그 언어를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종류의 관계들이, 무의식적 요소들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경우 작가의 방송작가로서의 체험과 그 체험이 무의식의 형태로 이 소설의 서사 전개에 끼어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은 특수한 이야기를 통해 보편적 진리를 추구해야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에 비추어볼 때, 오늘날 한국의 장애여성 일반이 갖고 있는 성과 사랑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지나치게 현실과 멀리 있는 인물과 상황을 설정하고 있는 점은 이 소설의 약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여러 중요한 논점을 제기하고 있다.

여성장애인은 장애를 인지하기 시작한 그 시점부터 자신의 몸에 대한 정체성뿐만 아니라 성적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받는다. '수아' 엄마는 아주 옛날부터 '수아'의 여성을 부정했었다. '수아'가 박사학위를 받은 후 시민운동에 종사하고, '수아'를 돕는 김영건이 그녀를 좋아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상아가 엄마에게 "언니도 결혼해야 할 거 아냐?"고 말하자, 엄마는 "쓸데없는 소리, 수아 결혼 안 해"(p.91)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수아가 결혼생활을 어떻게 해."(p.92), "네 언닌 사랑 같은 거 몰라."(p.92)라고 확신한다. 이 소설에서 '수아'를 바라보는 그녀 엄마의 이와 같은 발화는, 그녀(수아)가 여성이라는 범주에서 제외된 존재로서의 여성장애인으로 규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여성장애인은 장애정도와 무관하게 신체적 장애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위협을 받고 있다. 손이나 팔, 다리 등의 외형에 손상을 지닌 여성은 '기능적인 제약을 지닌 여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범주에서 제외된 존재'이다. 그래서 여성장애인은 여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여성 인물 '수아'는 다른 여성들과 하등 다를 게 없이 자신의 몸을 느끼고 반응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존재다. 소설의 맨 처음 부분에 '수아'는 지민과의 첫 키스를 하면서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낀다. 마치 태양이 갑자기 빛을 잃어버린 듯 주위가 어둡게 느껴지다가 이내 태양빛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 새하얀 광채에 몸을 떤다. 즉, 그녀의 여성성이 지민의 남성성과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갖는다.

방귀희 소설<샴사랑>이 의미 있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곧, 금지된 주제로서의 여성장애인의 성을 담론화 하고 있는 점이다. 소설에서 장애여성 '수아'의 엄마가 보이는 태도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여성장애인은 재생산을 할 수 없는 존재거나 성적 쾌락을 누릴 수 없는 존재이며 단지 보호를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라는 통념에 맞서 이 소설의 여성인물은 나름의 사투를 벌인다. 우선 그녀가 이겨내야 할 금지는 엄마를 비롯한 일반의 장애여성에 대한 그릇된 통념이다. 장애여성의 몸과 성에 대한 부정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러나 '수아'는 그녀가 좋아하는 남자, 지민의 친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당당해져야지 하면서도 막상 나가려고 하면 자신이 없어졌다."(p.33) 장애가 정상에서 이탈된 무엇인가 부족하거나 결함이 있는 손상된 상품이라는 인식을 정작 본인도 완전하게 넘어서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 빈틈을 그녀의 동생 상아가 비집고 들어온다. '수아'와 지민의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상아의 경우 그녀가 간암이 악화되어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왜 지민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다음처럼 밝히고 있다.

(병원에서) 지민 씨가 언니 앞에 나타나면서 부터야. 나한테는 그런 진정한 친구가 없었거든. 그때부터 언니가 커보였지. 언니한테서 지만 씨만 떼어놓으면 내가 언니보다 커 보일 줄 알았어. 그래서 지민 씨 내가 뺏은 거야. 내가 뺏었어. (p.239)

지민은 상아를 안으며 '수아'를 생각하고 '수아'를 보면 상아가 떠올라 온 몸이 결박된다. (p.160) 상아가 죽고 난 다음 두 사람은 지민이 설계하고 시공한 무장애 주택에서 평온한 삶을 살지만(물론 '수아'도 그녀의 부모가 돌아가신 후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지민이 장애여성인 '수아'를 그토록 헌신적으로 좋아하는 필연적인 까닭은 제시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성 관계는 외모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눈에 띄는 장애는 대인관계에서 더 큰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그런 까닭에 '수아'는 남자친구의 친구모임에 동생 상아를 대신 내보내는 것이다. "상아는 발이 유난히 예뻤다. 볼품없이 비틀어진 수아 발 때문인지 상아 발은 조각을 해 놓은 듯이 반듯했다."(p.159) 지민은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만날 수 있는 남성은 아니다. 이 소설의 인물 대부분이 그러하다. 리얼리티의 문제에서 취약한 부분이 많이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하지만, 이 소설의 여성인물-장애여성인 '수아'가 자신이 갖고 있는 사회적 억압 혹은 규정들-장애여성인 수아의 여성성을 부정하며 정상적인 여성과 구별되는 무성적(無性的)인 존재, 여성으로서 아무런 역할을 기대하지 않는 '역할 없는 존재'-을 뛰어넘고자 사투를 벌이는 주제적 인물로 형상화되고 있는 점이 이 소설을 빛나게 한다.

2) 거부당한 몸을 넘어서는 성(性)

소설가 김미선은 목발에 의지해 살아가는 장애여성이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문예지에 단편소설이 당선된 후 장애인권운동가로 활동 중인 작가다. 한국장애인연맹 부회장 등을 지냈고 현재(2013년)는 한국장애예술인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의 소설<버스 드라이버>는 장애여성인 소설 내 인물 '손봉애'가 자신의 몸과 여성성에 눈뜨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방귀희 소설<샴사랑>의 인물들과 그들의 상황이 다소 간에 드라마적인 것이라면, 이 소설<버스 드라이버>의 경우 평범한 여성인물의 일상이 제시되고 있어 보다 현실적인 면이 있다. 무엇보다 같은 장애남성과 결혼한 여성장애인이 다른 비장애남성과 "열정과 합해진 육체, 의식보다 무의식이 선행하여 끌어당기는 그 실체를 한 번은 경험해보고"(p.218) 싶은 성적 욕망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텍스트이다.

이 소설의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아마비장애를 갖고 있는 '손봉애'는 장애를 갖고 있는 남자와 결혼해서 별 탈 없이 살고 있다. 그런데 몸 수련센터에 다니기 위해 쇼핑센터의 셔틀버스를 타고 다니다가 버스운전사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한다. 무관심하고 냉정해 보이는 버스운전사에게 '봉애'는 패배나 상처자국에서 느낄 수 있는 어두움과 고독을 느끼며 그에게 정서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이다. 특히 운동을 하면서 그녀는 "언제나 내버려 두었던 몸, 할 수만 있다면 존재자체를 깨끗이 지워내고 싶었던 몸"(p.49)을 느끼게 된다. 마침 버스 안에 두고 내린 손지갑을 버스운전사가 찾아주는 것으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다. 급기야 "언제나 혼자만으로 꼿꼿하게 움켜쥐고 있던 자아라는 것을 한번 놓아버리고 싶은"(p.93) 생각에 이른다. "이제 그 역시 남성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여자를 만나는 남성의 기쁨이 그 눈에 담겨있었다. 그런 남자의 기쁨을 확인하는 여자의 깊은 희열이 그녀의 온몸을 거듭거듭 적셔내는 것이다."(p.101) 봉애는 그를 단 한번이라도 가슴에 품고 그를 통과해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봉애'는 남편에게 "그러니 당신 부디 눈을 감아 주세요."라고 호소하기에 이른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장애인에 대한 배제와 차별은 육체의 기능적 손상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여성장애인의 육체가 정상적인 육체의 기준에 미달된,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기능적으로 부족하다는 통념을 근거로 여성장애인의 차별을 생물학적 조건에 의한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상에 관한 담론은 비정상을 주변화 시킨다. 비정상으로 정의되고 분류되고 치료되는 과정을 통해 일탈-비정상은 통제의 대상이 되고, 그러한 통제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규율은 내적 통제에 대한 통제로 내면화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스스로 순종적인 육체를 생산하게 된다.

그 결과 이 소설의 여성인물 '봉애'도 "바지만 입고 자랐다. 그 속에 늘 감추어져 있어야 했던 육체, 수치스럽게 흔들리던 다리."(p.9)라고 자신의 장애를 수치스러워 한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방귀희 소설<샴사랑>의 장애여성 '수아'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장애를 갖고 있는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그랬다. "미쳤구나. 네 한 몸도 꾸려나가기 어려운 판에 또 그런 사람을 만나 무슨 수로 살아가겠다는 거냐?" (p.36)

<버스 드라이버> 책표지.
 <버스 드라이버> 책표지.
ⓒ 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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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버스 드라이버>의 여성인물- '봉애' 역시 여성이라는 범주에서 제외된 존재, 무성적(無性的)인 존재로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에게는 전통적인 성역할이 요구되거나 아내 혹은 어머니가 되기를 기대하지 않으며, 오직 어린아이처럼 보호받아야할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장애여성은 장애가 자신을 정상인의 범주에서 제외시키는 요인이므로 장애를 자신의 떼어내 버리고 싶고 부정하고 싶으나, 실제로는 불가능한 현실에 직면한다. 그래서 무력감과 자기 비하의 늪에 빠지기 십상이다. '봉애'는 "세상은 결국 크나큰 비애의 덩어리로 뭉쳐져 있다는 것을, 그것의 가장 깊은 원인이 바로 자기 몸에 있다는 것을 그녀는 첫돌을 넘기자마자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혼자서 걷지 못하는 몸, 혼자서는 결코 바로 설 수 없는 몸"(pp.49-50)이라는 자기부정에 갇혀 있는 것이다. 다음의 인용 역시 세상의 누구에게서나 타자 일 수밖에 없었던 장애여성의 참혹한 자기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태까지 아무도 그녀의 존재를 기뻐해주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그녀는 납덩어리 같은 짐이었고 평생 업고 다닌 슬픔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만났던 몇 번의 남자. 그들은 그녀를 아끼고 존중하긴 했지만 그들 역시 연민과 곤혹스러움이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녀의 여성성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돌려버리는 것으로, 그것으로 서로의 평화로움을 유지해나가곤 했다.(p. 100)

이처럼 장애와 여성의 이중적인 억압구조에서 성적으로 배제된 장애여성은 성적 무관심을 강요당하고 있다. 나아가 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내면화한 장애여성은 자유로운 성적 표현의 기회를 박탈당함으로써 자신의 성적욕구를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장애여성 '봉애'는 운동-요가를 하면서 자신의 몸에 눈 뜨기 시작한다. 그녀는, "언제나 슬픔만을 가져다주던 몸,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이  슬픔이었다."(p.49)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스스로 자신의 내부에 잠재되어있던 고유의 몸-여성성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인해 희열을 느끼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더 이상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에 대한 갈증으로 그녀의 몸은 아우성치고 몸부림쳤다. 나를 안아다오, 나를 안아서 그 길을 건너다오. 이제 그녀는 그의 앞에서 애원한다."(p119) 급기야 다른 남자와 성적 교합을 꿈꾸는 것을 알아챈 남편에게 "그러면 왜 안 돼?"(p.155)냐고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그 말들은 결국 어딘가에 저장되었고 수년 동안 잠복해 있다가 나타나서 마침내 의미를 띄게 되었다. 그래 그러면 왜 안 되는가? 프로이트에 따르면, '봉애'의 이 부정(Vemeinung)은 억압된 것을 인식하는 나름의 방식이다. 실로 그것은 이미 억압을 푼 것(Aufhebung)이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있다. 부계혈통을 중심으로 하는 부계씨족집단의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유교적 혈연주의, 부계혈통주의, 장자우선주의, 그리고 철저한 남아선호사상 등이 뿌리내리게 된 저간의 사정은 여기에서 재론할 것 없겠다. 물론 시대의 변화와 세계 체제 속에 편입된 한국사회가 서구적 가부장제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은 주체요, 여성은 타자라는 남성중심사회의 구조와 인식은 여전하다. 거기에 여성은 순결과 정조를 지켜야한다는 이데올로기가 덧칠된다. 그런 구조 속에서 성 담론은 남성들만의 것이 된다. 따라서 성 정체성의 형성에 사회의 지배담론이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이는 비단 우리 사회에서뿐 아니라 서구의 경우에도 남성 중심의 성 담론은 그 뿌리가 깊다. 요컨대 문화의 중심으로서 남성 주체는 자신의 열등한, 다시 말하면 사회문화적으로 금기시한 속성들을 육체적인 다른 이로서 여성에게 투사하여 타성을 본질론적으로 '다른 이'로 규정함으로써 '중심=정상'과 '동일한 이'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지배자적 위치를 굳혀왔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남성 중심적 문화의 주변인 역할이 주어진 여성은, 항상 구심점이요, 정상으로서의 남성과는 다를 뿐 아니라 비정상적 내지 열등한 존재라는 신화를 만들어내고 유지해 온 것이 서구에서의 성 담론의 역사라 할 수 있다.

하물며 정상과 비정상, 무엇인가 손상된 몸으로 여겨지는 장애인의 성, 더구나 여성장애인의 성은 발설해서는 안 되는 금지어가 된다. 그런 탓에 소설에서 '봉애'의 어머니는 "아직 세상을 모를 때, 여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욕망과 본능이 얼마나 끈질긴 고통인지를 아직 모를 때에, 그녀의 어머니는 차라리 딸을 세상 너머로 보내고 싶어 했다.(p.9)

수전 웬덜(2013,91)에 의하면, 장애의 경험을 현실성 있게 그리는 문화적 재현물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은 장애인의 '타자(the Other)화'에 이바지한다. 문학을 포함한 문화는 장애를 만들어 내는 중요한 요소이다. 여기에는 사회적 삶을 문화적으로 재현할 때 장애 경험을 배제하는 것뿐 아니라 장애인에 대한 문화적 고정관념, 신체 및 정신의 한계나 다른 차이들에 가하는 선택적 낙인, 다양한 종류의 장애와 질병에 따라붙는 수많은 문화적 의미, 장애인이 실행할 수 없거나 실행하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는 활동들이 갖는 문화적 의미에서 장애인을 배제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이 소설<버스 드라이버>의 여성인물- '봉애'가 문제적인 것은 그러한 배제와 금지를 이중으로 넘어서는 데에 있다.

장애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었다는 담론을 문학으로 형상화한 의미 있는 텍스트-재현물은 그리 많지 않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장애인 문학 전문잡지인 <솟대문학>에 발표되는 작품들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문학공모전 등에서 수상한 작품들이 있지만 아직은 체험수기의 틀을 크게는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장애인들이 본격적인 문학창작 수업을 받기 어려운 사정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들의 여러 환경이 전문적인 문학창작의 여건을 갖추지 못한 것, 장애인 문학의 역사가 일천한 것 등이 그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장애인의 성, 여성장애인의 성을 본격적으로 담론화한 문학 텍스트는 이글에서 살피고 있는 두 작품이 거의 유일하다. 특히<버스 드라이버>의 장애여성 '봉애'가 배제와 금지를 이중으로 넘어서고 있다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우선, 장애여성의 몸을 발견하고 몸을 통해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그러한 몸의 발견은 그녀의 어머니가 바라보는 성에 대한 인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다음의 발화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버지는 깊은 밤에 몰래 어머니한테 들어오곤 했다. 도둑처럼, 강간범처럼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곧장 위로 올라간다. 어머니는 언제나 매몰차게 아버지를 밀어냈다. 그러나 아버지의 건강한 육체는 사정없이 어머니의 몸속을 밀고 들어간다. 어머니는 낮은 소리로,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미쳤어, 미쳤어, 아이들도 있는데. 아이들이 깨면 어떡할라고. 아이들이 있는데 미쳐도 정말 많이도 미쳤어. 그러나 그 소리는 아버지의 두툼한 손바닥 아래로 스미고 만다.(p.159)

그래서 '봉애'는 "전생에 내가 무슨 죄업이 이다지도 많아서……."라고 자책하는 어머니를 향해, "그러나 전생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을 멸시한 죄, 어둠에 몸을 숨기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미쳤군, 미쳤어를 연발하지 않고서는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한 철저한 소외, 그리고 사랑에 대한 완벽한 경멸. 그것이야말로 어머니의 가장 큰 죄업이었다."(p.165)고 단정하기에 이른다.

다른 하나는 이 점이 보다 중요한데,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순결(정절)이데올로기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데 있다. 흔히 말하는 불륜(물론 이 소설은 불륜에까지 나가지는 못(혹은 안)한다.)에 대하여 "그러면 왜 안 돼?"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지배적 관념-남성중심의 성 담론에 대한 탈피-저항의 몸짓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성차별적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한편 여성장애인에 대한 기존의 관습적 틀을 넘어서는 자주적 정체성을 스스로 설계 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으로 평가 가능하다.

3. 차이로서의 장애

이 글에서는 타자(the Other)로서의 장애인 문학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나를 중심에 둔 경험 체계를 넘어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는 것은 없다. 현실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 담론화된 현실이고, 따라서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서(물론 어떻게 말하느냐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다르게 서술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소설적 재현을 통해 장애인들의 삶과 운명의 한 양상을 그리고 있는 이청준과 공지영의 소설이 어쨌거나 장애인들을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그러한 점에서 연유한다. 따라서 장애를 가진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믿음이 은연 중에 유포되고 장애인 자신 역시 그러한 사회적 믿음에 감염되기 십상인 게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한 전염의 시발은 장애여성의 가장 가까운 보호자인 어머니로부터 비롯한다. 부모적 타자로부터 되반사된 자신의 이미지에서 유래하는 여타의 이미지들(착한 딸이나 나쁜 딸이나 모범적인 아들 등)이 그러하듯 유사한 방식으로 아이들에 의해 동화된다고 라캉은 말한다.

방귀희 소설<샴사랑>과 김미선 소설<버스 드라이버>의 장애여성인물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자기규정 역시 그러함을 앞에서도 살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를 갖고 있는 여성 작가들의 소설인<샴사랑>과<버스 드라이버>의 경우 장애, 특히 여성장애인들에게 가해졌던 이중의 금지를 스스로 넘어서려는 주체적 발화가 눈에 띈다.

<샴사랑>에서 '수아'와 <버스 드라이버>의 '봉애'는 공통적으로 그녀들의 엄마로부터 그녀들이 여성이라는 범주에서 제외된 존재로 규정되고 있음을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장애라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장애는 비정상이라는 사회적 낙인에서 기인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장애가 없고, 젊은 성인이고, 문화적 이상에 따른 외양을 갖춘 남성일 것이라고 암묵적으로 가정한 상태에서 물리적으로 만들어지고 공적으로 조직된 사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에 온전히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완전히 무시함으로써 장애를 폭넓게 만들어낸다. 이렇게 장애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인식의 변화가 없을 때, 장애는 극복해야 하는 커다란 개인적 책무로 남게 된다.

성 담론은 여성에게 특히 여성장애인에게는 발설해서는 안 되는 금지로 작용한다. 남성 중심적 문화의 주변인 역할이 주어진 여성은, 항상 구심점이요 정상으로서의 남성과는 다를 뿐 아니라 비정상적 내지 열등한 존재라는 신화를 만들어내고 유지해 온 것이 서구를 비롯한 우리 사회에서의 성 담론의 역사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경우도 남녀공통의 '남성적'성욕 및 특성을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특성이란 오로지 남성만이 변함없이 지녀야 하는 것이며, 여성은 이러한 특성을 완전히 억제해야만 '진정한' 여성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렇게 하여 결국 여성이란 남성과는 달리 끊임없는 자기억제와 이에 대한 반항과 좌절, 또 그로 인한 평생 동안의 심리적 상처로 얼룩진 결함투성이의 존재로 만들어진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하물며 정상과 비정상, 무엇인가 손상된 몸으로 여겨지는 장애인의 성, 더구나 여성장애인의 성은 발설해서는 안 되는 금지어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샴사랑>에서 '수아'와 <버스 드라이버>의 '봉애'는 그러한 남성, 그리고 비장애인 중심의 성 담론을 해체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몸짓을 통해 당당한 주체로서의 자신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 소설 내 장애여성들은 사회·문화적로 만들어진 성 차별 이데올로기에 의해 굴절되지 않는 자주적 정체성을 여성 스스로 설계하려는 노력을 성적 욕구의 스스럼없는 발현으로 전개해 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두 소설의 장애여성들은 사랑했던 이와의 결혼에서 실패하거나('수아'의 경우), 관계 맺기를 간절하게 원했던 남성으로부터의 거절('봉애'의 경우)로 인해 여전히 미완의 주체로만 남겨진다. 그것은, 이 글에서 다루지는 못했으나 비장애여성 작가가 쓴 소설들에서 보이는 여성인물의 과감한 성애 묘사와 비교할 때 장애여성작가의 자기 검열이 작동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장애를 차이로 바라보는 광범위한 인식의 전환과 함께 장애인 그리고 장애여성 자신의 주체되기의 각오가 좀 더 요구된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장애인은 주체적 인격체로서의 자기규정을 전개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문학작품에 재현된 장애인의 삶의 양상을 다루었다. 장애와 관련한 사회 일반의 의식이 장애인을 보호해야할 대상으로서만 여기는 데서 멈춘다면 우리사회의 건강은 담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남성과 여성을, 그리고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구분 짓는 틀을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남성과 여성이 그리고 비장애인과장애인이 다만 '차이'로서 존재할 뿐이라는, 그래서 함께 사는 동반자라는 의식이 확산되지 않는 한 우리 사회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순진한 바람대로 진보하는 것은 아니다. "왜 안 돼?"냐고 부정하는 주체는, 라캉에 따르면 결코 견고한 실체가 아니라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짐의 불빛 속에서 언뜻언뜻 자신을 실현하는 '실체 없는 실체'이다. 그럼에도 아주 다행스럽게 그러한 중심과 주변의 이데올로기를 장애인 스스로 해체하려는 문학적 시도를 만난 것은 반가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라캉의 말마따나 그것은 흔적이며 흔적 만들기이다.

덧붙이는 글 | 계간 <솟대문학> 2015년 봄호(통권 97호)에 게재된 글을 일부 수정, 요약했습니다.



태그:#장애인문학, #타자로서의 장애인문학, #여성성, #샴사랑, #버스 트라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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