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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백경>은 미국 문학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많은 이들이 "나는 이쉬마엘이다(Call me Ishmael)"로 시작되는 소설의 첫 장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다리 한 짝을 앗아간 흰 고래를 끈질기게 추적하는 복수심 가득한 에이헵 선장을 기억한다.

소설이 출간된 지 한 세기 하고도 절반이 넘게 흐른 오늘날, 에이헵이 쫓던 고래 모비딕(Mobi-Dick)과 커피를 좋아하던 일등항해사 스타벅(Starbuck)은 이 소설로 알려진 다른 무엇보다도 더욱 큰 명성을 얻었다.

허먼 멜빌은 신비로운 고래 모비딕과 그를 뒤쫓는 에이햅 선장의 이야기로부터 문명과 야만의 운명적 대립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설은 나아가 복수심에 사로잡힌 선장의 내면을 치열하게 탐구해 인간존재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혔다는 극찬까지 얻었다. 고전으로서 <백경>이 세월의 풍파를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포경선에서 선원으로 일한 경력이 있는 허먼 멜빌이 실화를 바탕으로 구상한 것으로 유명한데 19세기 최대의 해양참사로 알려진 에식스호의 비극이 바로 그 사건이다.

그는 포경선의 선원으로 일하던 시절 에식스호의 생존자이자 일등항해사였던 오언 체이스의 조난기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에게 이 조난기를 건네준 것이 역시 포경선의 선원으로 일하던 오언 체이스의 아들이었는데 실로 문학사에 길이 남을 운명적 만남이라 하겠다.

이와 관련해 허먼 멜빌은 '육지라고는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그 놀라운 이야기를, 그것도 에식스호의 조난지점과 같은 위도에서 읽는다는 것은 내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비록 지금은 거의 잊혔으나 포경선 에식스호가 분노에 찬 향유고래에 떠받혀 침몰한 사건은 19세기에 가장 널리 알려진 해양참사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의 거의 모든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이 사건에 관한 글을 읽었다. 그것은 또한 허먼 멜빌의 소설 <백경>의 클라이맥스 장면에 영감을 준 사건이기도 했다. - <프롤로그>중에서

이처럼 <백경>이 에식스호의 조난을 토대로 창조된 것은 사실이지만, 소설과 실제 사건 사이에는 적잖은 차이가 존재한다. 허먼 멜빌이 인간과 고래가 싸우는 웅장한 광경을 품격있는 문장으로 묘사해 세계문학의 손꼽히는 걸작을 낳은 건 분명하지만, 에식스호의 침몰과 이어진 고난은 소설이 그리는 어려움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것이었다.

<바다 한가운데서> 책 표지.
 <바다 한가운데서> 책 표지.
ⓒ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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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니얼 필브릭의 <바다 한가운데서>가 복원한 에식스호의 비극은 <백경>보다는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치하의 영국사회를 뒤흔든 '더들리, 스티븐스 사건'과 더욱 닮아있다. 조난당한 배의 생존자들이 먹을 것이 모두 떨어지자 그들 가운데 가장 어리고 약한 이를 죽여 식량으로 삼은 이 사건은 그 과정의 잔혹함과 생존자들의 뻔뻔함으로 거대한 공분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생존한 선장과 일등항해사, 즉 더들리와 스티븐스는 조난 상황에서의 신인행위가 뱃사람 사이에서 관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었으며 어차피 죽을 사람을 통해 다른 이들이 살 수 있었으니 용인될 수 있는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이 동료를 살해해 먹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가 하는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이후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러가지 형태로 변형되며 지식인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을 낳기도 했다.

에식스호의 조난자들은 더들리, 스티븐스보다 60년 정도 앞서 비슷한 어려움에 봉착했다. 거대한 악의를 품은 고래에 의해 마침내 침몰 당하고마는 <백경>의 결말은 <바다 한가운데서>가 그려내는 에식스호의 어려움에 있어 그저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놈의 모습과 태도는 처음에 우리에게 아무런 경계심을 갖게 하지 않았다."하고 그는 회상했다. 그런데 갑자기 고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비가 20피트나 됨직한 꼬리가 펌프질하듯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처음엔 약간 좌우로 흔들리며 천천히 움직이던 꼬리의 펌프질이 점점 빨라지면서 거대한 술통처럼 뭉툭한 대가리 주변에 자욱한 물보라가 피어올랐다. 놈은 에식스호의 좌현을 겨냥하고 돌진해오고 있었다. - <5장 격분한 고래의 공격> 중에서

진정한 비극은 침몰 이후에 시작되었다

스틸컷
▲ 인 더 하트 오브 씨 스틸컷
ⓒ 인 더 하트 오브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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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년 여름, 21명의 선원을 태우고 낸터킷에서 출항한 238톤의 포경선 에식스호는 출발한지 15개월 만에 남태평양 한 가운데서 성난 고래에 들이 받혀 침몰하기에 이른다. 망망대해에서 모선을 잃은 선원들은 세 척의 고래잡이 보트에 나눠타고 4800km나 떨어진 남아메리카를 향해 나아가기로 결정한다. 3개월 뒤 단 8명 만이 살아남게 되는 죽음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너새니얼 필브릭은 에식스호의 일등항해사로 8명의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인 오언 체이스의 조난기와 당시 그의 보트에 함께 탔던 소년 급사 니커슨의 회고록을 토대로 그들이 겪은 처절한 수난기를 생생하게 복원했다.

앞에도 언급했듯 이들이 겪은 고난은 <백경>의 이쉬마엘이 경험한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책은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조난당한 선원들이 느낀 공포와 무력감, 그 속에서 힘을 끌어내는 인물들의 리더십, 생존에 대한 열망 등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더불어 지도자의 잘못된 선택과 문화적 오만이 어떤 비극을 빚어낼 수 있는지, 인종이나 출신에 대한 차별이 어떻게 부조리함을 자아내는지, 극단적인 굶주림과 식인행위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마치 눈 앞에서 보듯 현실감있게 그려낸다.

첫 항해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조난을 당한 스물 여덟의 선장 폴라드와 그의 선원들의 이야기는 모항 낸터킷으로부터 시작된다. 지금은 미국의 작은 도시이지만 당대에는 포경산업의 중심지로 풍요를 누렸던 낸터킷을 너새니얼 필브릭은 숙력된 다큐멘터리 작가처럼 생생하게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고래잡이 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당시의 분위기와 그 중심지 낸터킷의 사회상을 설득력있게 묘사함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에식스호의 상황은 물론 배에 오른 스무 명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끄는데 성공한 것이다.

너새니얼 필브릭의 충실하고 섬세한 묘사는 첫 항해를 하는 선장이 가장 늦게 선원을 지명하는 전통에 따라 에식스호가 숙련된 선원을 구하기 어려웠던 점,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선주들의 농간으로 충분한 양의 식량을 싣지 못한 점, 낸터킷 출신과 외지에서 온 선원의 구별이 흑백의 구분 만큼이나 컸던 사정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부분부분에 미치고 있다. 이와 같은 철저한 분석과 체계적인 묘사야말로 독자들이 에식스호 조난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결정적인 장점이 아닐까 한다.

저자는 신실한 퀘이커 교도로서 온순하고 평화적인 삶을 지향하는 낸터킷 사람들이 포경선에 올라 거리낌없이 잔학한 학살자로 돌변하는 모습부터 그들이 전인미답의 망망대해로 나가 거대한 수컷 향유고래에 들이받혀 배를 잃는 믿기 어려운 순간까지를 단정하고 깔끔한 문장으로 묘사한다. 바로 이 지점, 고래잡이 배의 선원들이 그들이 사냥하던 고래에 의해 죽음에 직면한 아이러니한 순간으로부터 책은 진면목을 드러낸다.

책은 조난자들이 어떻게 잘못된 결정을 하고 고난을 겪으며 극한의 위기와 마주해 살아남고 또 죽어가는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무려 94일 동안 7200km를 표류하며 마침내는 서로의 고기를 먹게 되는 참담한 과정이 더없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짝을 찾기 어려운 해양논픽션으로서의 가치를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체이스의 보트가 사라진 지 8일째인 1821년 1월 20일, 폴라드와 헨드릭스 보트의 사람들에게도 식량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날 헨드릭스 보트에 타고 있는 흑인 가운데 한 사람인 로슨 토머스가 죽었다. 열 사람이 나눠 먹어야 할 식량이 겨우 450그램밖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헨드릭스와 그의 부하 선원들은 모두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문제를 내놓고 말하기 시작했다. 즉, 토머스의 시체를 수장하는 대신에 먹어야 하느냐, 그래서는 안 되느냐 하는 문제였다. - <11장 운명의 제비뽑기> 중에서

풍부한 조사를 바탕으로 탄생한 빼어난 해양 논픽션

예고 포스터
▲ 인 더 하트 오브 씨 예고 포스터
ⓒ 인 더 하트 오브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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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집필에 앞서 19세기 포경산업 전반을 폭넓게 조사했을 뿐 아니라 태평양 섬들의 식인풍습과 굶주림의 생리학과 심리학, 항해술, 해양학, 향유고래의 생태학 등 이야기를 재구성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해 책의 완성도를 높였다.

그는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 바운티호의 선상반란, 섀클턴 경이 조난상황에서 보인 리더십, 영화 <얼라이브>로 잘 알려진 안데스 산맥 조난자들의 사례, 수컷 향유고래의 행동양식 등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며 에식스호 조난자들이 처한 상황을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을 위해 들인 너새니얼 필브릭의 노력은 <백경>을 쓰기 위해 허먼 멜빌이 들인 노력과 비교해도 크게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에식스호의 비극으로부터 독자들은 재난기로부터 얻을 수 있는 여러가지 교훈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 책에는 리더십과 용기, 인내와 신뢰가 어떻게 인간성을 지키고 위기에 맞설 힘을 불러일으키는지가 잘 나타나 있으며 동시에 각종 역경이 어떻게 인간을 무너뜨려가는지도 설득력 있게 묘사되어 있다.

독자들은 책을 읽는 내내 스스로가 마치 에식스호의 조난당한 선원이 된 듯 절실한 생존본능에 휩싸이기도, 무력감과 절망감에 젖어들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어리석음과 오만, 아집이 어떻게 잘못된 선택을 이끌어내는지를 깨닫고 이를 경계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서스펜스로 가득한 논픽션 도서 <바다 한가운데서>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이다.

생명을 건 모험에서 생환함으로써 에드워드 시대 사나이들의 우정과 영웅적 행동의 화신으로 살았던 어니스트 섀클턴 경과 그의 대원들과는 달리, 폴라드 선장과 그의 선원들은 단순히 생계를 꾸려가려고 애쓰다가 85피트 길이의 고래의 도전이라는 대재앙을 만났다. 그들은 조난을 당한 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 와중에 어쩔 수 없이 실책도 저질렀다. 폴라드 선장의 본능적 판단은 옳았다. 그러나 그는 두 젊은 항해사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결단력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안전하게 타히티 섬으로 항해하는 대신에, 거의 불가능한 멀고도 험난한 항해에 나서 많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 태평양이란 황량한 파도의 사막을 배회했다. - <에필로그>중에서

책은 또 다른 유명 논픽션 도서 <퍼펙트 스톰>이 그러했던 것처럼 할리우드 재난영화로도 제작되고 있다. <분노의 역류>, <파 앤드 어웨이>, <아폴로 13>, <뷰티풀 마인드>로 유명한 론 하워드가 연출을 맡았고 크리스 헴스워스, 킬리언 머피, 벤 위쇼 등이 출연한다. 올 12월 개봉 예정인 영화를 감상하기에 앞서 원작을 읽어두는 건 발빠른 독자라면 놓칠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바다 한가운데서>(너새니얼 필브릭 지음 / 한영탁 옮김 / 다른 펴냄 / 2015.03. / 1만 3500원)



바다 한가운데서 - 포경선 에식스호의 비극

너새니얼 필브릭 지음, 한영탁 옮김, 다른(2015)


태그:#바다 한가운데서, #너새니얼 필브릭, #다른, #한영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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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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