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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이웃인 릴리를 응원하기 위해 이들은 매주 일요일 마을회관에 모여 '본방사수'를 해 왔다.
▲ 마을 회관에 모인 주민들 마을 이웃인 릴리를 응원하기 위해 이들은 매주 일요일 마을회관에 모여 '본방사수'를 해 왔다.
ⓒ 스텔라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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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 있는 한인 동포들이 한국의 방송을 실시간으로 접하게 된 요즘, 한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깃거리도 더 풍성해졌다.

올해로 네 번째를 맞이한 SBS <일요일이 좋다> '서바이벌 오디션 K팝스타' 역시 이런저런 화제를 불러 일으키는 방송이다. 호주에서도 예선전을 치러 주목을 끌었던 이 방송은, 올해에는 유달리 그 파장이 더 크다. 바로 호주 출신의 릴리 모로우(Morrow)가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릴리 엄마와 지인인 한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릴리의 고향인 매리스빌(Marysville) 주민들이 매주 일요일에 함께 모여 K팝스타 '본방사수'를 하는데, 방송 내용을 좀 통역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6년 전, 매리스빌에서의 기억

멜번 시내에서 2시간 반 정도 달리면 도착하는 매리스빌. 지난 3월 29일, 세미 파이널 진출자를 가리는 Top4의 경연 생방송이 예정된 날, 좀 일찌감치 목적지로 향했다.

가을로 접어들기에 아쉬움이 남았는지 모처럼 높은 기온에 쾌청한 주말이었다. 가까운 친구와 주말 소풍을 떠나는 기분으로 주변 풍경을 즐기며 마룬다 하이웨이 (Maroondah Highway)를 달린 후, 숲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6년 전, 무거운 마음으로 고생스럽게 매리스빌을 찾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이 지름길은 경찰들에 의해 통제가 됐었다.

2009년 2월 7일 토요일에 발생한 엄청난 산불은 '검은 토요일(Black Saturday)'로 기록되며 재앙으로 남았다. 아름답던 마을 매리스빌과 킹스레이크(Kings Lake)를 비롯해 주변이 모두 타버렸으며 173명 사망, 414명 부상으로 호주 역사상 최대의 산불로 기록되었다.

피해자 중 한인 가족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빅토리아 주 강창훈 한인회장 및 임원진들과 함께 재해민 임시 숙소를 찾았다. 거기서 바람 소리만 들어도 놀라고 무서워한다는 아주 어린 첫째 딸과 아직 아기인 둘째 딸, 그리고 수심 가득한 남편과 함께 있는 박진희씨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인사 한마디 하고 누군가가 보내준 곰 인형을 끌어안고 조용히 있었던 소녀... 박진희씨의 첫째 딸 릴리였다. 세월은 흘렀고, 이제 릴리는 열네 살 나이답지 않은 침착함으로 무대를 완전히 즐기고 있다.

"너무 더운 데다 정전이 되기에, 더 어두워지기 전에 일찌감치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하다가 뭔가 타는 냄새가 나서 밖으로 나가보니 이미 뒤뜰에 불길에 휩싸이고 있었다. 무엇 하나 챙길 겨를 없이 아이들을 차에 던져 넣다시피 하고 빠져 나와 근처 초등학교로 피했다. 바로 뒤돌아서서 다시 집에 돌아갔던 남편은,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와 '이미 집이 흔적조차 없이 타버렸다'고 말했다."

이런 이야기를, 박진희씨는 오히려 담담하게 들려줬었다. 너무 황망하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듯한 상황이었다.

보름 후, 복구 상황 취재를 위해 매리스빌로 다시 향했을 때 지름길을 사용할 수 없어 네댓 시간을 돌아갔던 기억이 새로웠다. 아직도 나무에서 불씨들이 떨어지므로 매우 위험하다는 안내를 하는 경찰들은 정말 유별나게 친절했었다. 화재로 모두 마음이 다쳐 주민들이 특별 교육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전해 들었다.

릴리 응원 위해 한국 다녀온 주민들 "정말 멋진 시간이었죠"

SBS 'K팝스타 시즌4'에 출연하고 있는 릴리
 SBS 'K팝스타 시즌4'에 출연하고 있는 릴리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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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6년이 지나, 정말 즐겁고 좋은 일로 다시 찾아가는 매리스빌. 어느새 나무들이 다시 다 자라나 열어놓은 창문으로 수목의 향을 품은 바람이 기분 좋게 들어오고 있다.
나무들 사이를 거니는 산책로가 잘 되어있고, 겨울에는 바로 옆 레이크 마운틴 (Lake Mountain)에 눈썰매장이 생기는 작은 마을 매리스빌. 언제 봐도 자연이 그대로 숨쉬는 평온한 곳이다.

나무 그늘 아래 자연스러운 나무 탁자들이 놓인 카페에서 일단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약속 시간까지 한 시간이 남아 있다. 카페 지붕 위로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테이블 근처에는 떨어진 도토리가 가득... '한국인 아줌마'답게 함께 간 친구와 도토리를 봉투 하나 가득 주워 담았다. 생가죽으로 튼튼하게 만든 가방과 양모 스카프 등을 파는 동네 자그마한 가게에도 들어가봤다.

"혹시 릴리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냐?"고 물어보는 주인 아저씨가 자기도 곧 가게 문을 닫고 매리스빌 관광안내소로 홀로 갈 것이라고 반가워한다.

매리스빌 주민들이 방송이 시작되기 전 서로 함께 나눌 바비큐를 준비하고 있다.
▲ 방송 시청에 앞서 바비큐를 준비하는 주민들 매리스빌 주민들이 방송이 시작되기 전 서로 함께 나눌 바비큐를 준비하고 있다.
ⓒ 스텔라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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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시, 약속 시간에 맞춰 매리스빌 관광안내소로 가니 이미 주민 대여섯 명이 모여 텔레비전에 위성 방송 기기를 설치하고 있다. 마을회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자그마한 홀에 의자들을 놓고, 문밖에 있는 피크닉 장소에서는 간단한 바비큐 준비도 한창이다.

오후 5시 반, 설치가 끝나자 이들은 먼저 지난주 방송분을 다시 시청하기 시작했다. 벽에 걸린 스크린에서는 한국 광고들을 시작으로 지난 방송이 시작됐다. '저 부분이 궁금했다', '나는 저 심사위원이 뭐라고 했는지 정말 알고 싶었다'...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한 주민들은 이것저것 질문을 시작했다. 그렇게 20여 명이 모였다.

내가 통역을 해주니, 어느 부분은 자신들이 짐작한 것과 똑같다며 활짝 웃고, 또 어느 것은 생각과 전혀 달랐구나, 라며 놀라기도 한다. 자신들의 제스처와 다른 부분이 많아 전혀 다른 해석을 하기도 했다면서, 얼굴이 심각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무척 신기해 한다. 누구는 샌드위치를 가득 만들어 왔고, 어떤 사람은 집에서 키운 사과를 작은 자루에 싸왔다. 바깥에서 구워진 닭날개 바비큐를 어린 소년이 들고 들어와 나눠준다.

이들 중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사람, 함께 이웃해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조차 새삼 인사를 받고 있는 사람은 로드 릿치(Rod Ritchie)씨와 그의 딸 레이첼(Rachel)이었다.

아버지 로드와 큰 딸 레이첼(왼쪽)은 릴리 응원 차 한국을 방문, 보다 가깝게 한국을 느끼고 왔다. TV 방송에도 출연해 큰 추억을 남겼다.
▲ 로드 리치 가족 아버지 로드와 큰 딸 레이첼(왼쪽)은 릴리 응원 차 한국을 방문, 보다 가깝게 한국을 느끼고 왔다. TV 방송에도 출연해 큰 추억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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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지난 3주간 한국에 머물며 릴리의 이웃으로 방송에 출연하는 등 정말 '흥분된' 시간을 보내고 방송 바로 전날인 토요일에 돌아왔다.

"3주간이 정말 꿈처럼 지났어요. 인사동 구경도 하고 휴전선에도 가봤지요. 인사동 길거리 음식이 너무 맛있었어요. 벌써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어서 깜짝 놀랐답니다."

로드씨는 시종 싱글벙글하며 '정말 멋진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레이첼 역시 '볼 것도 많고 흥미진진해서 3주가 너무 짧았다'고 말한다.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아서 못 갔다"고 입을 쭉 내밀며 화난 표정을 짓는 레이첼의 여동생 매들린(Madeleine)은 "반드시 한국 여행을 가고야 말겠다"며 "더 길게 더 많이 즐길 것"이라고 해 이웃들이 함께 웃었다.

릴리와 같은 학교에 다니며 4년여 친한 친구로 지내온 릴레이 토마스(Riley Thomas)는, 친구가 정말 자랑스럽다면서 이제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될 건데, 마치 자기가 그렇게 되는 것처럼 기쁘다고 말한다.

릴레이는 친구 릴리 M이 정말 자랑스럽다.
▲ 릴리의 친구 릴레이 토마스양 릴레이는 친구 릴리 M이 정말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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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를 사랑하는 것만큼 똑같이 한국을 사랑합니다"

이 모임을 매주 주관하는 리사 놀테(Lisa Nolte)씨는 이 방송에 대해 얼마나 많이 공부를 했는지, 자신은 두 번째 시즌 우승자인 악동뮤지션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른 이웃들에게 심사위원인 JYP 박진영, YG 양현석 그리고 안테나 뮤직의 유희열의 특징에 대해서도 한국인인 우리보다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설명을 해준다.

릴리의 집에서 두 집 건너 살고 있다는 글레니스 로스(Glenys Ross)씨는 "릴리가 아직 너무 어린 아이인데, 이건 정말 벅차고 힘든 큰 무대라서 걱정도 된다"면서 "하지만 그 걱정을 잠재워주듯 정말 잘 하고 있는 재능에 언제나 박수를 보낸다"라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릴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봐왔다는 제인 프라가(JaneFraga)씨는 아주 유쾌한 아줌마다. 제인은 "릴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 내가 이렇게 흥분하는 건 당연하죠"라면서 "진희(릴리의 어머니)를 통해 한국이 어떤 나라일 것이다, 라는 짐작은 했었다. 이웃에 대한 배려가 대단하고, 언제나 긍정적인 사람이니 한국도 참 좋게 생각을 해왔다"면서 "특히 요즘 매주 이렇게 방송을 보면서 한국 자체를 훨씬 가깝게 느낀다"고 말한다.

"거기... 우체국 옆에." "은행 옆집 있잖아..." 그렇게 말을 해도 서로 알아듣는 이 작은 마을이 한국 열풍에 휩싸였다. 이날 릴리는 안타깝게 세미 파이널 라운드 진출에 실패했다. 릴리의 탈락이 발표될 때,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눈물을 닦으며 이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쳤다. 본 방송이 시작되기 전, 주민들은 방송에서 계속 "파이팅"이라는 말이 나온다며, 무슨 뜻이냐고 내게 물었다. 영어에는 없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싸우는 걸 좋아하는 건 절대 아니고 'Go, Lily' 그런 응원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설명해줬더니 한국식 영어를 그대로 따라하며 큰 박수를 친다.

"릴리... 파이팅!"

게다가 "더보이 (The boy : 정승환을 지칭함)는 특히 오늘 정말 잘했네"라며 또한 박수를 보내는 참 소박한 호주 시골 사람들. 남은 사과를 가득 싸주며 이건 정말 무공해 사과라고 설명하는 그 눈빛에서 따뜻한 환대를 다시 확인한다.

"우리는 이제, 릴리를 사랑하는 것만큼 똑같이 한국을 사랑합니다. 한국이 잘 되어가는 걸 지켜볼 거예요."

"꼭 또 놀러 올 거지?", "두 시간이나 운전을 해야하는 밤길인데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되나요?" 이런 저런 이야기 속에 공연히 어깨 으쓱해지며 따뜻한 작별 인사를 나눴다. K-POP이 호주, 그 중에서도 이 작은 마을까지 흘러 들며 'Korea'라는 이름에 대해 관심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 시간은 행복했다. 상향등을 켰다 껐다 하며 운전을 해야하는 그 산길이 전혀 피곤하지 않을 만큼.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4월 3일 호주 빅토리아 주에서 발행되는 <멜번저널>에 중복 게재 됩니다.



태그:#K POP STAR 시즌4, #릴리 M, #호주 매리스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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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이민 45 년차. 세상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고 그런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기사를 찾아 쓰고 싶은 사람. 2021 세계 한인의 날 대통령 표창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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