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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면 상번천리 가마터 전시장
 중부면 상번천리 가마터 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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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와 하남을 답사한 사연

해마다 3월이면 전통문화회 답사가 시작된다. 1월과 2월에는 날씨가 추워 답사 대신 실내 행사와 정기 강좌가 진행된다. 이번 3월의 답사지는 경기도 광주와 하남이다. '서울 아래 첫 고을'이라는 주제로 경기도 광주와 하남의 문화 유산을 답사하려고 한다. 광주와 하남에는 문화 유산이 많다. 광주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인 남한산성이다. 그리고 조선 백자요지도 아주 의미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남한산성은 여러 번 답사를 했기 때문에 이번 답사에서는 제외했다. 그 대신 조선 백자 요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조선 백자 요지는 퇴촌면, 초월읍, 곤지암읍, 도척면, 남종면, 광주읍, 중부면 등에 주로 분포돼 있다. 총 220여 개의 요지가 확인됐으며, 퇴촌면, 초월읍, 곤지암읍에 각각 50개 전후의 요지가 있다. 이 중 우리는 남종면 분원리 백자 자료관, 중부면 상번천리 가마터 전시장을 살펴볼 예정이다.

하남시 교산동 마애불
 하남시 교산동 마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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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조선 시대 유명한 인물의 무덤을 찾아보려고 한다. 한 사람은 장군이고, 또 한 사람은 여류 시인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갈 신립 장군은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용장이다. 그의 무덤은 곤지암읍 곤지암리에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찾아갈 허난설헌은 남자 중심의 조선 시대에 한 많은 삶을 살다간 시인이다. 그의 묘는 시댁인 안동 김씨 문중 묘지인 초월읍 지월리에 있다.

하남의 문화 유산은 교산동과 춘궁동에 많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이 옛날 광주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이곳에 옛 관아터, 향교, 절 등이 있었다. 그 중 우리는 교산동 마애불과 향교를 찾아가려고 한다. 마애불은 약사여래좌상으로 고려 초에 만들어졌다. 교산동에 있는 향교 역시 하남 향교가 아닌 광주향교다. 그것은 하남이라는 행정 구역 명칭은 1989년 처음 생겼기 때문이다. 춘궁동에는 옛날 동사(桐寺)라는 절이 있었다. 이 절에는 현재 5층 석탑과 3층 석탑이 남아 있다

신립 장군이 묻힌 곳을 찾아서

신립장군묘
 신립장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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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장군묘를 가려면 중부고속도로 곤지암 나들목에서 나와 3번 국도를 따라 곤지암읍 소재지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이 길은 경충대로라 하는데, 그것은 서울과 충주를 잇는 큰 길이기 때문이다. 이 길을 1.5km쯤 가면 왼쪽으로 곤지암2교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넌 다음 곤지암 천로를 따라 800m쯤 가면 신립장군묘라는 표지판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 차를 멈춘 다음 왼쪽으로 난 길을 걸어 300m쯤 가면 평산 신씨 충장공 재실이 나온다. 여기서 계단을 따라 다시 200m쯤 올라가면 신립장군 종중묘를 만날 수 있다. 이들 묘 중 가장 아래 있는 것이 신방(1686-1736)의 묘다. 신방은 신립의 6대손이다. 그는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고, 문집으로 <둔암집(屯菴集)>이 있다. 문인석, 동자석, 망주석이 좌우로 한 쌍이 있고, 묘비는 없다. 봉분의 잔디가 좀 부족한 편이다.

그 위에는 신방의 아버지인 신성하(1725-1796)의 묘가 있다. 이곳에는 문인석, 동자석, 망주석이 좌우로 한 쌍씩 있을 뿐 아니라, 멋진 묘갈(墓碣)이 하나 서 있다. 묘갈에는 증이조참판 행돈녕부도정(贈吏曹參判行敦寧府都正)이라는 전액이 보인다. 뒤쪽으로 평운군 신공묘갈명(平雲君申公墓碣銘)이 이어진다. 이 전액은 지중추부사 이민보(李敏輔)가 썼다. 그리고 묘갈을 찬한 사람은 의정부 우찬성인 박필주(朴弼周)고, 글씨를 쓴 사람은 우의정인 윤시동이다.

신립장군 종중묘역: 맨 앞에 신방의 묘가 보인다.
 신립장군 종중묘역: 맨 앞에 신방의 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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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하묘 묘갈 이수의 두 마리 용
 신성하묘 묘갈 이수의 두 마리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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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액 아래로 빽빽하게 묘갈명이 적혀 있는데, 대리석이 검게 변해 내용을 하나 하나 살펴보기가 너무 힘들다. 나중에 그의 문집에 나오는 묘갈명을 확인해 보니, 신성하는 호가 화암(和菴)이고 평운군(平雲君)에 봉해졌으며, 72세에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조부 신경진-증조부 신준-조부 신여정(실제 조부는 신여식)-부 신완으로 이어지는 가계가 자세히 설명돼 있다. 이 묘갈은 1796년에 세워졌다.

신성하는 벼슬이 연안 부사를 거쳐 돈녕부도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들 신방 덕에 이조참판을 증직 받았다. 화암 신성하는 문장이 뛰어나 아들 신경이 유고를 모아 <화암집>을 편찬했다. 이 비석은 글의 내용보다 두 마리 용이 새겨진 이수가 인상적이다. 이들 용은 위에서 아래로 나란히 머리를 내밀고 있다. 마치 부부 용처럼 느껴진다.

신립 장군 묘역 이야기

탄금대에 세워진 팔천고혼위령탑
 탄금대에 세워진 팔천고혼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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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하묘 위에 우리가 찾는 신립장군묘가 있다. 신립(1546-1592)은 생원 신화국(申華國)과 파평윤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22살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했으며, 함경도 은성부사, 함경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 도순변사로 임명돼 충주로 파견됐다. 그러나 신립은 조령방어선을 포기하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맞서 패하고 말았다.

신립 장군은 전투에서 패한 다음 남한강 지류인 달천(達川)강물에 투신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신립 장군의 묘는 과천현 동작동에 마련되었다. 그의 묘가 이곳 광주 곤지암으로 옮겨진 것은 신립의 현손인 신완에 의해서다. 신완의 아버지 신여식이 광주 부윤으로 있을 때 이곳에 땅을 마련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신립 장군 묘역에는 문인석, 동자석, 망주석이 좌우에 한 쌍 있다. 그리고 묘의 오른쪽에 1703년에 세운 묘갈이 있다. 전면에 증영의정 평양부원군 행한성부판윤 겸 팔도도순변사 신공립지묘(贈領議政平陽府院君行漢城府判尹兼八道都巡邊使申公砬之墓)와 정경부인 전주최씨 부좌(祔左)라는 글씨가 보인다. 그리고 옆면과 뒷면에는 의정부 좌의정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찬하고, 홍문관 부제학 성재(醒齋) 신익상(申翼相)이 글씨를 쓴 묘갈명이 있다. 그러나 이 묘갈 역시 자료를 보아야 정확히 읽을 수 있다.

묘갈명에 따르면 신립 장군은 죽기 직전 종사관인 김여물(金汝岉)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남아로 죽을 것이니, 구차하게 살아남지 않고 의롭게 죽을 것이다" 묘갈의 마지막 문장도 아주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우암 역시 "설사 공에게 달천의 패배가 없었더라도 끝내 이순신과 김덕령의 화를 면할 수 있었을까?" 라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신립 장군의 마지막 전투는 어땠을까?  

신립 장군이 죽은 탄금대전투 이야기

신완과 신준의 묘
 신완과 신준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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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장군이 투신한 탄금대 옆 달천
 신립장군이 투신한 탄금대 옆 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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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에 의하면 신립 장군은
1592년 4월 17일 삼도 순변사에 임명된다. 그러나 신립 장군은 군사를 모아야 했기 때문에 며칠 동안 한양을 떠나지 못했던 것 같다. 기록을 종합하면 신립은 류성룡 휘하의 비장 80여 명과 함께 한양을 떠났고, 충주에 도착한 것은 24~26일쯤으로 추측된다. 충주에 도착했을 때 병력은 군관민 합쳐 8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때 상황은 <선조수정실록>에 다음과 기록되어 있다.

"신립이 충주(忠州)에 이르렀을 때 제장(諸將)들은 모두 새재(鳥嶺)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적의 진격을 막자고 하였으나, 립은 따르지 않고 들판에서 싸우려고 하였다. 27일 단월역(丹月驛) 앞에 진을 쳤는데 군졸 가운데 '적이 벌써 충주로 들어왔다'고 하는 자가 있자, 신립은 군사들이 놀랄까 염려하여 즉시 그 군졸을 목 베어서 엄한 군령을 보였다.

적이 복병(伏兵)을 설치하여 아군의 후방을 포위하였으므로 아군이 드디어 대패하였다. 립은 포위를 뚫고 달천(㺚川) 월탄(月灘)가에 이르러 부하를 불러서는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다'고 하고 빠져 죽었다."

신립장군 묘갈
 신립장군 묘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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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은 어땠을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4월 25일 상주에서 이일의 군사를 격파하고 26일 문경에 도착한다. 문경에서 충주까지는 하루면 갈 수 있다. 그러나 문경새재의 복병 가능성 때문에 선봉을 보내 정탐하고, 27일에야 충주를 향해 진군한다. 왜군은 안부역에 도착해 충주의 상황을 파악한 다음, 28일 아침 일찍 단월역을 향해 출발한다. 그리고 탄금대 전투는 이날 정오 이후 벌어진다.

이때 왜군의 병력은 2만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은 고니시가 맡고, 좌익은 마츠우라 시즈노부(松浦鎭信)가, 우익은 소 요시토모(宗義智)가 맡았다. 이때 탄금대는 섬처럼 해자로 둘러싸여 있어 요새이긴 했으나, 앞 들이 논이기 때문에 기병이 싸우기에는 적절치 못했다. 또 진영이 정비된 왜군과 달리, 조선군은 위계와 전략이 부재했다. 탄금대 전투는 전략과 전투에서 실패한 조선군이 지고 말았다. 

신립장군묘 위로 현손과 손자의 묘가 있다. 신립장군묘 위에는 현손인 신완(1646-1707)의 묘가 있다. 신완은 1762년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장(文莊)이고, 문집으로<경암집(絅菴集)>이 있다. 둘레석이 있는 묘의 오른쪽에는 묘표가 세워져 있다. 전면의 절반에는 평천군(平川君) 신완과 그의 부인 임천조씨가 왼쪽에 묻혀있다고 쓰고, 그 다음부터 측면과 후면에 걸쳐 음기(陰記)가 새겨져 있다.

신완의 묘 위에는 신완의 할아버지이자 신립의 손자인 신준(1572-1638)의 묘가 있다. 신준은 음사로 관직에 나가 찰방과 현감을 지냈으나,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고 평흥군(平興君)에 봉해졌다. 이후 강화 유수를 거쳐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묘의 오른쪽에는 묘갈이 세워져 있는데, 이를 통해 부인 안동김씨와 합장묘임을 알 수 있다. 다른 묘와 달리 신준의 묘 앞에 장명등이 있다. 이로써 우리 일행은 신립장군 묘역 답사를 마쳤다.


태그:#신립장군묘, #광주시 곤지암읍, #탄금대전투, #신성하, #신완과 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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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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