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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모스크바의 상징이 된 붉은 광장의 성 바실 대성당. 오른 쪽에 크렘린 궁의 담장과 탑이 보인다.
 모스크바의 상징이 된 붉은 광장의 성 바실 대성당. 오른 쪽에 크렘린 궁의 담장과 탑이 보인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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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 '최고'나 '제일'이라는 단어를 쉽게 붙인다. 하지만 이 주관적 평가어는 대상의 실체를 보여주기보다, 말하는 이의 편견이나 취향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여기서 내 편견을 하나 드러내자면, 나는 모스크바를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는다. 동의하지 않을 분들이 많을지 모르나, 애인이나 배우자가 '가장 예쁘'거나 '가장 멋진' 사람이 되는 상황을 납득한다면, 큰 반발 없이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인구 수많큼 많을 수 있다면, '가장 아름다운 도시' 또한 도시 수만큼 많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도시는 아무리 예쁘다고 칭찬해도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내 '모스크바 콩깍지'를 합리화하기 위해 꽤 많은 이유를 댈 수 있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나는 이 글에서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전혀 아름답지 않은' 사건을 다루려 하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 끝에 위치한 볼쇼이 모스크보레츠키 다리.
 모스크바 붉은 광장 끝에 위치한 볼쇼이 모스크보레츠키 다리.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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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7일 자정 무렵, 모스크바 시내에서 남녀 한 쌍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저녁을 먹고, 붉은 광장을 지나 남자 집 방향으로 걷는 중이었다. 연인은 크렘린궁의 붉은 벽돌담을 지나, 모스크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로 접어들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이 산책하던 길은 그리 으슥한 장소가 아니었다. 환한 오렌지 빛 가로등이 다리 위를 비추고 있었고, 가로등 사이로 치렁치렁 드리운 (러시아를 상징하는) 흰색, 파란색, 빨간색 조명은 거의 축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11시 40분쯤, 정체 불명의 사내가 이들 뒤에 따라붙었다. 그러고는 총을 겨눴고, 일고여덟 번의 총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등과 머리에 네 발을 맞고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죽었다. 총알은 뇌, 심장, 간, 위를 관통했다. 범인은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를 타고 도망쳤다.

누가 넴초프를 쏘았나

보리스 넴초프가 살해된 다리 위의 모습. 오른 쪽에 크렘린 궁이 보이고, 다리 오른쪽 난간을 따라 조화가 늘어서 있다.
 보리스 넴초프가 살해된 다리 위의 모습. 오른 쪽에 크렘린 궁이 보이고, 다리 오른쪽 난간을 따라 조화가 늘어서 있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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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전 세계를 경악케 했다. 살해당한 남자는 보리스 넴초프로, 현 러시아 정부를 공공연히 비판해온 야권 지도자였다. 그런 탓에 배후에 푸틴 대통령이 있을 거라고 단언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러시아 상황에 익숙한 사람들이 보기에,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넴초프가 저격당한 곳은 말 그대로 '대로변'이었다. 이들이 걷던 인도 옆으로는 왕복 6차선 넓은 도로가 놓여 있어, 늦은 시간에도 꽤 많은 차가 다닌다. 범인은 목격되기 쉬운 곳을 범행장소로 택한 것이다. 더구나 다리 앞쪽에는 러시아의 상징인 붉은 광장과 바실 대성당이 자리 잡고 있어, 관광객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든다.

추모객들이 다리 위에 가져다 놓은 사진과 꽃.
 추모객들이 다리 위에 가져다 놓은 사진과 꽃.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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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사건현장은 크렘린 궁을 지척에서 마주보는 곳이다. 설사 정부가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 해도, 그런 장소를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통령궁 앞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눈이 어디로 쏠리겠는가? 게다가 국제적 관광지에서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은, 그 잔혹한 행위를 전 세계로 생중계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영국 보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이 사건을 '그림엽서 살인'이라고 조롱한 것을 보라.

현재 러시아의 대외관계는 냉전 이래 최악의 상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에 무력 개입한 후 유럽과 미국 모두 등을 돌렸고, 갖가지 경제제재로 러시아를 옥죄고 있다. 여기에 주요 수출품인 원유 가격이 폭락하면서, 러시아는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루블화 가치는 1년 전에 비해 반토막이 났고, 그로 인해 러시아 국민들은 치솟는 물가로 몸살을 앓고 있다.

러시아의 2월 물가상승률은 무려 17%에 달했다. 식료품 가격도 가파르게 올라, 양파와 당근 가격은 12월에 비해 30% 이상 올랐고, 양배추 가격은 거의 50% 가까이 폭등했다. 이런 살인적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면 국민들의 불만이 터져나올 것이고, 푸틴의 굳건한 지지율에도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할 것이다.

멈추지 않는 추모 행렬, 계속되는 푸틴의 인기

넴초프가 총격을 받고 쓰러진 자리에 사람들이 가져다 놓은 꽃이 무덤처럼 쌓여 있다.
 넴초프가 총격을 받고 쓰러진 자리에 사람들이 가져다 놓은 꽃이 무덤처럼 쌓여 있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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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부는 그동안 대외 관계 개선에 꽤 공을 들여왔다. 푸틴은 이미 작년 7월 미국 독립기념일에 오바마 대통령에게 축전을 보내, 관계 회복을 원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나라 지도자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는 정적을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하는 것은 자해행위에 가까울 것이다.

실제로 넴초프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무섭게 미국과 유럽 지도자들은 푸틴 정부를 직간접적으로 비난했다. 오바마는 2009년 모스크바 방문 당시 그를 만난 사실을 언급하며, "이 시점에서 사건의 정확한 실체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러시아 내에서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정보 교환의 자유 등 국민이 누려야 할 기본권과 자유가 과거보다 훨씬 악화되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넴초프 암살 이후 많은 러시아 국민들이 슬퍼하고 분노하고 있다. 그가 살해된 자리에는 꽃 무덤이 솟아올랐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한 송이 두 송이 가져다 놓은 꽃이 어른 키만큼 쌓인 것이다. 그가 쓰러진 곳만이 아니다. 다리 전체에 긴 '꽃길'이 생겨났고, 그를 기리는 촛불도 다리 난간을 따라 끝없이 늘어섰다.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추도의 행렬은 끊이지 않고 있다.  

넴초프가 사망한지 한 달이 넘었지만, 애도는 계속되고 있다. 비 오는 날에 추도객이 꽃을 가져다 놓고 있다.
 넴초프가 사망한지 한 달이 넘었지만, 애도는 계속되고 있다. 비 오는 날에 추도객이 꽃을 가져다 놓고 있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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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놀랍게도, 이 사건으로 인해 정부를 비난하거나 푸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사람들은 극소수다. 영미언론들은 사건 이후 추모 인파와 시위, 비판의 목소리에 초점을 맞췄지만, 이는 러시아의 지배적 정서와 거리가 멀다. 사건 직후 현장에 가본 사람들은 적막에 가까울 정도로 평온한 모스크바 모습에 놀랐을 것이다.

모스크바의 '평화로움'은 푸틴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반영한다. 3월 말 현재, 푸틴의 지지율은 80%를 넘어선다. '콘크리트 지지율'을 가졌다는 박근혜 대통령이 같은 시기에 '회복'했다는 지지율이 40%임을 생각하면, 러시아에서 푸틴이 누리는 엄청난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도 박 대통령처럼 '중동 효과' 같은 호재에 힘입은 것도 아니고, 깊어지는 경제난과 넴초프 사건과 같은 대형 악재가 터지는 가운데 얻어낸 지지도다.

이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난 2월, 넴초프 사태 이전의 지지율은 더 높은 86%였다. 그의 인기는 놀랍다 못해 경이로울 정도다. 박근혜 대통령이 재임 기간 60%를 넘긴 것은 단 한 번(2014년 4월 첫 주)뿐이었다. 반면에 푸틴은 2008년부터 지금까지 수상으로서든, 대통령으로서든 지지율이 단 한 번도 60% 중반 밑으로 떨어져본 적이 없다.

불가사의한 푸틴의 지지율

2014년 11월 오스트리아에서 만난 '브릭스(BRICS)' 5개국 정상. 푸틴은 대외적으로 여러 비판을 받고 있지만, 러시아 국민들에게는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2014년 11월 오스트리아에서 만난 '브릭스(BRICS)' 5개국 정상. 푸틴은 대외적으로 여러 비판을 받고 있지만, 러시아 국민들에게는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 Roberto Stuckert Fil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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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공할 지지율은 넴초프 암살의 '푸틴 배후설'을 반박하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한마디로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넴초프가 멀쩡히 살아 정부를 비판해도, 푸틴에 대한 국민의 성원이 하늘을 찌르는데, 무엇 때문에 위험하고 골치 아픈 일을 벌이겠냐는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 정부를 의심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오자, 대통령 공보비서인 드미트리 페스코프는 성명을 발표했다. "넴초프는 결코 푸틴 정부를 위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런 말까지 덧붙였다.

"푸틴 대통령의 인기에 비하면, 보리스 넴초프의 영향력은 보통 시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국 <가디언>지의 숀 워커 모스크바 특파원은 이를 언급하며, "정부 관계자가 (망자에 대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놀랍기는 하지만, 적어도 틀린 말은 아니다"라고 썼다. 넴초프가 푸틴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해온 것은 사실이나, 그의 영향권은 소수 진보진영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워커는 비판자를 공공연히 살해하는 것이 "푸틴 정부가 정적을 다뤄온 방식이 아니"라고 말했다. 오히려 고소·고발 남발, 가택연금, 구금 등으로 괴롭히고 귀찮게 해 힘을 빼는 것이 훨씬 러시아 정부답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정부가 해온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비판세력을 억눌러온 것이다.

러시아 전문가로, 미 정부 정책자문 역을 지낸 폴 스트론스키 역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기고문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다. 협박하거나, 가두거나, 완력으로 괴롭히거나, '간첩' 딱지를 붙여 나라를 떠나게 만드는 게 인사를 다루는 일반적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넴초프는 누가, 왜 죽인 것일까?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다

넴초프 기념물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사람. 사건 후 시간이 지나면서 넴초프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공공연히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넴초프 기념물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사람. 사건 후 시간이 지나면서 넴초프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공공연히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 Gosha Tarasev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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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서는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명백히 밝혀지리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권력의 실세가 개입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나, 범인의 정체나 살해 동기가 드러나는 것 자체가 정부에 악재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유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지난주 초, 넴초프 추모 기념물이 심하게 훼손되었다. 추모객이 설치한 '넴초프 다리' 표지판을 누군가 떼내어 검은 스프레이를 뿌렸다. 그것만으로 부족했는지, 표지판을 쪼개 꽃 위에 던지고, 영정 사진 위에는 '러시아의 이익을 좀먹는 반역자'라고 써놓았다.

놀라운 일은, 이런 일을 몰래 하기는커녕,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려놓기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넴초프 다리' 안내판은 얼마 뒤 제자리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화가 봉변을 당했다. 쓰레기 봉투를 든 사람이 몰려들어 꽃과 사진을 치우기 시작한 것이다.

망가진 '넴초프 다리' 표지판. 기념물을 훼손한 사람들이 사진 위에 "러시아의 이익을 해치는 역적"이라고 쓴 종이를 붙여놓았다. 이들은 추모물을 망가뜨리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자랑스레 인터넷에 올려놓았다.
 망가진 '넴초프 다리' 표지판. 기념물을 훼손한 사람들이 사진 위에 "러시아의 이익을 해치는 역적"이라고 쓴 종이를 붙여놓았다. 이들은 추모물을 망가뜨리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자랑스레 인터넷에 올려놓았다.
ⓒ Gosha Tarasev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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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지 않은가? 세월호 유족 모욕, 추모 리본과 현수막 훼손, 신은미 시민기자에 대한 폭탄 테러, 주한 미대사 피격으로 드러난 폭력적 민족주의, 경제난 속에서도 여전히 견고한 대통령의 지지율. 러시아와 한국을 면밀히 관찰하면, 다른 역사, 문화, 경제적 배경을 지닌 두 나라 사이에 놀랄 만한 공통점이 드러난다.

러시아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어떤 시사점을 줄까? 다음 글에서 자세히 살펴보자.


태그:#넴초프, #푸틴, #러시아, #세월호,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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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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