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의 일부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하고 마침내 극장에 나왔을 때, 당장 핸드폰을 켜 'Whiplash'나 'CARAVAN'을 들어보자. 문외한이 들어도 그 선율은 어느 재즈곡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을 적시는 유쾌한 곡으로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재즈곡에 대한 최초의 각인은 약 15년 전, 케이블 채널 <투니버스>에서 방영했던 '카우보이 비밥'이었다. 요즘엔 주말 예능에서 흔히 들을 수 있게 된 메인 OST <Tank!>라는 곡은 당시 10대 소년에게 로망이 되지 못한 허세로 새겨질 만큼 강한 첫인상을 남겼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영화 <위플래쉬>는 여타 음악 영화를 음악 영화라고 칭하기 무색할 정도로 속성이 다르다. 앞서 <카우보이 비밥>을 꺼냈듯 재즈가 영상과 만났을 때 그 포지션은 권태와 싸우는 로망이었고, 연인들의 분위기를 살려주는 촛불과 같았다. <위플래쉬>는 어쩌면 재즈의 대표성을, 나아가 '음악 영화'의 권태를 때려 부수기 위해 태어난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한 드러머 지망생의 성장 드라마'다. 그런데 부족하다. 부족이란 단어조차 부족할 만큼 결여됐다. 뭔가 빠져도 단단히 빠졌는데 오히려 영화는 오히려 '성장 드라마'가 가지고 있어야 할 요소들을 버린 작품이다.

<8마일>, <스텝업>, <비긴 어게인>등처럼 '음악 영화'라 함은 실력의 한계에 부닥쳤을 때 때마침 드라마 역시 갈등의 절정을 맞이하는 사차선 사고의 현장이어야 한다. 그런데 <위플래쉬>는 니콜(멜리사 베노이스트)이나 아버지가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스승과 제자의 각을 세우는 대립 속에 반복된 우연만이 앤드류(마일즈 텔러)에게 시련이 되고, 피나는 연습만이 그 해결책이 된다.

앞선 정의에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너드(nerd)와 사이코가 만났을 때 피를 부르는 케미스트리'를 넣고 싶다. 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는 서사가 아니라 피로 물든 재즈의 아름다움에 있다. 이 역설은 플랫처(J.K 시몬스)의 존재 자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한 씬에서 카메라가 멀리서 플렛처를 포착한다.

이 거리는 앤드류의 시선인데 이때 플렛처는 지인의 어린 딸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컷, 학생들에게 다가와 그는 글로 표현하기 힘든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이때 카메라는 그를 바스트 컷으로 가깝게 잡는다. 많은 글이 '션 케이시' 사건으로 드러나는 그의 위선을 통해 이 영화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카메라가 말하고자 하는 문장은 지금까지 들러리로서 서 있던 재즈를 전면에 내세운 도전장처럼 들린다.

'인생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재즈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에게 재즈를 얼마나 가까이 보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되묻기로 한다. 실베스타 스텔론을 닮은 청년의 인내하는 표정부터 짓무른 손, 선혈이 튄 심벌즈 그리고 결이 머금고 있는 수분, 쉬지 못하고 찢기는 드럼까지, 카메라는 이것들을 익스트림 클로즈업로 담아내고 그것도 모자라 주변부를 전부 아웃 포커싱을 준다.

그리하여 재즈와 피부를 맞닿은 관객이 마침내 마지막 10분, 'CARAVAN'에 도달했을 때 관객은 앤드류와 플렛처 그 사이에 서 있게 된다. 혹은 두 사람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그 곳은 영화를 보는 관객도, 영화 속 청중도, 니콜도, 앤드류의 아버지도 들어올 수 없다. 무아(無我)라는 말에 방점을 찍고 싶을 만큼 내가 없는 세상에 도달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은 결코 선과 도덕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벌렁거리는 심장 때문에 이후 엔딩을 새롭게 다시 그리게 되는데, 감독은 니콜의 참석 여부나 청중의 반응을 지워버렸고 문 틈사이로 드러난 아버지의 표정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앤드류의 웃음은 있었지만 플렛처의 입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의 팔자 주름으로만 추측할 뿐이다. '앤드류가 플랫처를 받아들이기로 했는가' 혹은 '플렛처가 자신의 방법이 옳았다고 확신의 미소로 답했는가'는 그저 자의적 해석로만 부유할 뿐 영화는 그저 파괴의 지점에서 멈췄다. 분명 이 영화는 더 나가기엔 무리가 있다. 이후 이야기는 알 수 없으며 준비된 것 같지도 않다. 그저 아름다운 선율에 숨겨진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파괴의 현장에서 멈춘 영화다. 그렇지만 충분히 그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영화가 아닌가.

위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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