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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태국의 국경 풍경.
 캄보디아-태국의 국경 풍경.
ⓒ 구창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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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붉은색 흙먼지가 온종일 날리는 거리, 사람의 심장을 평소의 2배 속도로 뛰게 만드는 붉은색 일출과 일몰, 그 도시의 흙빛 혹은, 석양빛처럼 불그레한 사람들의 얼굴….

앙코르와트의 도시 캄보디아 시엠립을 추억할 때면 연이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수도 프놈펜에서 시엠립으로 향하는 낡은 버스를 타고 가던 중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태양이 민가 한 채 보이지 않는 막막한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걸 본 2011년 어느 날 이후, 내게 캄보디아 또는, 앙코르와트는 '붉은색'의 거대한 낙인으로 다가온다.

불과 40년이 안 된 기억의 저편. 이상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농촌공동체적 사회주의'를 지향한 순진하고 잔인한 크메르루주 청년들 탓에 국민의 20%가 허망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아야 했고, 당시 붕괴돼 아직도 온전히 재건되지 못한 생산기반 시설로 국민의 절대다수가 빈곤의 한가운데를 유영하고 있는 나라.

습하고 어두운 역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크메르루주 집권 당시 수없이 뿌려진 지뢰에 손발이 날아간 사람들의 안타까운 표정을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마주해야 하는 그곳. 낭만적이고 화사한 관광지라기보다는 상처 입은 어린 짐승의 공동체에 더 가까운 공간임에도 어째서 나는 2003년 이후 무려 4번이나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찾았던 것일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이 글은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지 않을까 싶다.

4번이나 찾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이유가 뭐나면...

캄보디아 포이펫에서 만난 아이. 지금 처해 있는 곤궁한 형편과는 무관하게 표정이 너무 밝아서 오히려 슬펐다.
 캄보디아 포이펫에서 만난 아이. 지금 처해 있는 곤궁한 형편과는 무관하게 표정이 너무 밝아서 오히려 슬펐다.
ⓒ 구창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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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 차원에서 보자면 '지구 위 가장 아름다운 석조건축물'이라 불러도 좋을 앙코르와트와 동양 최대의 담수호 톤레샵 호수를 만날 수 있는 캄보디아 시엠립으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정치적으로 안정화된 시기에 들어선 2000년대 이후 관광객이 대폭 늘어나면서 한국에서 시엠립으로 가는 직항 전세노선도 생긴 것으로 알고 있다.

대부분 3~4일의 휴가를 내 패키지여행 일정을 즐기는 사람들이 주로 이 전세기를 이용한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시간 낭비 없이 목적지로 직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많은 경우 시엠립 현지의 일정을 관리하는 가이드를 따라 상황버섯 등의 건강식품이나 라텍스로 만든 조잡한 침구를 판매하는 가게에 몇 차례나 들러 '울며 겨자 먹기식' 쇼핑을 해야 해 여행자의 기분을 망치기도 한다고 들었다.

인접국인 베트남이나 태국에서 시엠립 공항으로 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엔 거의 '독점노선'인 탓에 항공권 가격이 만만치가 않다. 그런 까닭에 주머니가 가볍고 비교적 장기간 여행계획을 세운 배낭족들은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에서 버스를 타고 시엠립으로 가는 방법을 택한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수입한 털털거리는 중고버스를 타고 이젠 보기 어려워진 우리네 1970년대 농촌 풍경 속을 달리는 색다른 맛이 있는 코스다.

다 나름의 장단점이 있는 방식이지만, 내가 추천하고 싶은 건 태국 방콕에서 아란야프라텟과 캄보디아 국경마을인 포이펫을 거쳐 시엠립으로 가는 방법이다. 아침 일찍 방콕을 출발하면 점심을 먹기 전 포이펫에 도착할 수 있다. 포이펫은 시엠립으로 가는 여행자들이 집결하는 도시.

여기서 3~4명 정도가 사설택시를 대절해 3시간 남짓 달리면 시엠립 시내에 도착할 수 있다. 비용은 대략 30달러 내외(2013년 기준). 이 코스가 매력적인 이유는 포이펫 시내를 벗어나 곧 만나게 되는 평원 때문이다. 정말이지 야자수와 잡초, 그 사이를 무시로 넘나드는 바람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막막한 풍경.

네온사인 가득한 도시에서 쫓기는 직장인의 삶을 살면서는 결코 만날 수 없었던 원시(原始)가 눈앞 가득 펼쳐진다. 그런 평원 속으로 수십 km를 달리다가 예상치 않은 스콜이라도 만나게 되면, 시원스레 쏟아지는 빗속에서 여행자의 낭만은 배가 된다. 일상에선 결코 볼 수 없는 풍경을 만난다는 건 여행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 아닐까.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나는 '포이펫-시엠립' 코스를 택해 여행을 했을 때마다 그 평원 한가운데서 잠시 택시를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도로를 지나는 차와 행인은 물론, 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적요한 풍경 속에서 마시는 '앙코르맥주' 한 모금의 맛이 얼마나 근사한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다.

뜨고 지는 해가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구나

시엠립의 사원들.
 시엠립의 사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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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엠립의 사원. 천 년의 세월을 넘어 여전히 선명한 부조가 놀랍다.
 시엠립의 사원. 천 년의 세월을 넘어 여전히 선명한 부조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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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숨긴 듯한 부조 속 여신.
 몸을 숨긴 듯한 부조 속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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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엠립에 도착해서는 각자의 형평과 취향에 맞춰 숙소를 선택하면 된다. 공항에서 시내로 나오는 대로에는 번듯한 대형호텔이 늘어서 있고, 시엠립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스타마트'와 '나이트마켓' 사이에는 10달러 내외의 저렴한 숙소가 지천이다. 싸다고 해도 에어컨과 개인 욕실을 갖춘 방이니 크게 불편한 점은 없다.

좀 더 가까이에서 캄보디아와 시엠립의 속살을 보고 싶다면 후자를 택하는 게 좋을 듯하다. 2003년 1월 처음 시엠립을 찾았을 때는 구걸하는 아이들 탓에 거리를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은 갈 때마다 줄어들었고, 이제는 관광 포인트가 아닌 곳에서는 싸구려 기념품을 팔거나 구걸하는 아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한때 '크메르'라는 이름으로 인도차이나 반도를 호령했으나, 지금은 아시아의 빈국 중 하나로 간난신고의 삶을 이어가는 캄보디아 사람들. 그래서일까. 가벼운 복장에 슬리퍼를 끌고 어슬렁거리는 시엠립 시내는 전성기를 한참 지난 프로권투 선수를 보는 것처럼 측은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가난이 사람의 모든 것을 파괴하지는 못하는 법. 시엠립 아니, 캄보디아 사람들은 그 가난과는 상관없이 낙천적으로 보이고 잘 웃는다. 아마 그 '웃음의 힘'으로 아직도 생생한 집단학살의 기억을 애써 잊으려 하는지도. 역사와 인간이란 무거운 주제를 떠올리며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는 방법은 단순해지는 것이다.

눈을 부비며 새벽에 일어나 간단히 얼굴만 씻고 거리에 즐비한 오토바이 택시 중 하나를 골라 타고 시엠립 시내 북쪽에 위치한 앙코르와트를 향한다. 말이나 글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빛깔의 돌 수십 수백만 개가 빚어내는 장엄한 과거의 흔적. 비단 앙코르와트가 아니라도 좋다. 바로 인근 앙코르톰이나 바이욘사원에서 사람들 틈에 끼어 세상사 고민을 잠시나마 잊고 아무 생각 없이 일출을 기다리는 건 가슴 설레는 경험이다.

신에게 이르는 길은 이토록 까마득한 것인가? 앙코르와트에서.
 신에게 이르는 길은 이토록 까마득한 것인가? 앙코르와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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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과 나무가 서로를 경계하는 아니, 끌어안은 기이한 형상. 이 사원은 할리우드 영화에도 등장한다.
 돌과 나무가 서로를 경계하는 아니, 끌어안은 기이한 형상. 이 사원은 할리우드 영화에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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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동쪽에서 시작된 태양의 꿈틀거림이 사원의 성벽을 붉게 물들일 때면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앙코르 유적은 천 년 전 크메르인들이 자신들의 도시를 찾을 미래의 불특정 다수를 위해 축조한 거대한 선물이라는 사실을. 일몰 또한 일출의 감동과 판박이다.

더운 날씨에 셔츠가 젖도록 땀을 흘리며 곳곳에 산적한 크메르 사원을 돌아본 사람들. 그들 대부분은 옅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앙코르 유적지의 벽에 기대 해가 서쪽으로 온전히 돌아가기를 기다린다.

세상의 존재하는 붉은색 모두를 모아 흩뿌려놓은 듯한 진홍(眞紅)의 일몰. 시엠립 시내와 사원 나무 그늘에서 만난 스웨덴과 독일, 프랑스의 청년들은 바로 이 일출과 일몰 무렵의 앙코르와트를 만나기 위해 10시간이 넘게 비행기를 타고 캄보디아에 오지 않았을까.

오렌지빛 승복 앞에 엎드린다는 건

풍광이 주는 감동만큼이나 울림이 큰 게 사람이 주는 감동이다. 미려하게 깎아 올린 돌 틈마다에 살아온 날들의 비밀을 고백하게 싶게 만드는 시엠립의 유적지 이상으로 나를 설레게 한 것이 캄보디아 사람들이다. 앙코르 유적은 사방 수십 km에 이름 없이 허물어져가는 작은 사원과 성곽 또한 흩뿌려놓고 있는 곳.

1달러를 주고 빌린 자전거를 타고 그곳들을 찾아다니다 만난 동승(童僧)들. 대다수의 국민이 소승불교 신자인 캄보디아에선 시주를 받으러 다니는 어린 승려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제 갓 열두어 살이나 됐을까.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오렌지빛 승복을 입고 햇살에 달아오른 시멘트 길을 맨발로 걷는 그 아이들의 눈빛에서 나이와는 상관없는 외경을 읽어냈다.

조그만 생수 한 병 혹은, 바나나 한두 개를 동승의 가방에 넣어주며 그 앞에 엎드리면 그들은 사람들의 귓가에 한참 동안 축원의 말을 조용히 읊조려준다. 그 모습은 신을 믿지 않는 내게도 신성해 보였다. 해탈이나 종교적 깨달음의 공간은 번듯한 법당이나 성당이 아닌 '길 위'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한낮의 더위가 잠시 수그러들고 해가 저물면 시엠립 여행자의 대부분은 '나이트 마켓'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줄지어 늘어선 노천카페 중 한 곳을 골라 의자에 편하게 등을 기댄다. 싱싱한 민트가 듬뿍 들어간 칵테일 '모히토'를 마시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지루한 일상을 떠나 새로운 공간에 와 있다는 즐거움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프놈펜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스무 살 유쾌한 청년은 잠시 잠깐의 서툰 내 강의(?)만으로도 한글 자음과 모음의 운용 방식을 알아낸다. 놀랍도록 영민한 청년이다. 더불어 "당신은 왜 내가 가르쳐주는데도 크메르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 하는가"라는 웃음 섞인 질책까지. 기분이 나빴냐고?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런 청년들이 이끌어갈 캄보디아의 미래가 어두울 턱이 없다는 생각에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숙소 근처 허름한 식당에서 만난 10대 후반 소녀의 미소도 잊을 수가 없다. 다음 달이면 한국 경기도 한 도시의 공장으로 일을 하러 가게 된다며 좋아하던 모습. 월급 액수와 체류 기간 등이 적힌 근로계약서까지 보여주며 잇몸을 드러내고 웃던 그 소녀가 한국에서도 티끌 한 점 묻지 않은 웃음을 잃지 않고 건강하게 일하며 앞날을 꿈꿀 수 있었으면.

앙코르와트의 도시 시엠립은 신을 믿지 않는 내가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기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줬다.

톤레샵 호수 그리고, 남은 이야기

이끼로 뒤덮인 앙코르사원. 흐르는 시간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끼로 뒤덮인 앙코르사원. 흐르는 시간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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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엠립의 사원들은 인간 존재의 유한함과 역사의 무한함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시엠립의 사원들은 인간 존재의 유한함과 역사의 무한함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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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유적에 새겨진 압사라 여신의 유혹하는 춤사위, 천 년 세월을 견뎌온 석조건물 사이에 낀 푸릇한 이끼, 맹렬한 아름다움으로 뜨고 지는 일출과 일몰, 흙먼지 날리는 동네 골목길에서 앙코르와트 닮은 성을 만드는 크메르 아이들의 천진한 몸짓에 취하게 되는 시엠립.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다보면 일상에서의 감각과 시간을 잠시 잊게 된다. 나 역시 2011년엔 캄보디아의 풍경과 사람에 취해 열흘 이상을 거기서 머물렀다. 하지만, 여행은 떠날 때부터 돌아옴을 전제로 하는 것. 아쉬움은 추억의 힘으로 견딜 수밖에 도리가 없다.

시엠립에서의 마지막 날. 오토바이를 개조한 택시 '툭툭'을 타고 톤레샵엘 갔다. 제주도보다 훨씬 큰 면적의 바다 같은 호수. 포이펫에서 국경을 넘을 때 본 지평선 이상으로 아름다운 수평선이 쓸쓸함과 충만을 동시에 선사하며 여행자를 매료시켰다.

앙코르와트의 아이들. 이들의 미래가 지금보다 빛나고 환하기를 기대한다.
 앙코르와트의 아이들. 이들의 미래가 지금보다 빛나고 환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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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종의 민물고기를 제 안에 기르며 호수에 삶을 기댄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톤레샵. 그곳에서 만난 석양 역시 숨 막히게 붉었고 또한, 아름다웠다. 어둠을 배경으로 숙소로 돌아오는 길. 툭툭 기사의 권유로 시엠립 외곽에 위치한 그의 삼촌 집에 들렀다.

거기서 나는 보았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마을.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 같은 집의 희미한 남폿불 아래 태어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툭툭 기사의 조카가 누워 있었다. 방글거리며 나를 올려다보는 그 아이의 얼굴과 궁핍에도 주눅 들지 않은 아기 엄마의 미소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인간의 삶이란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지는 것이구나. 천 년 세월 저편 번성했던 크메르왕국 왕자의 탄생만이 축복받을 일은 아니구나. 비록 희미한 빛 아래 누웠지만 누가 감히 이 아기의 내일이 마냥 어둡고 습할 것이라 단정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엔 번듯함보다는 폐허, 미래보다는 과거, 빛보다는 그림자에 집착하는 인간들이 있다. 나 역시 그런 사람. 다소 퇴행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나와 그들의 천성이 못나거나 구차해서가 아니다. 취향과 지향의 문제다.

현재와는 동떨어진 과거의 흔적 시엠립 앙코르 유적의 그늘진 폐허에서 낙관의 근거를 찾아내려는 나의 취향. 그 취향을 앞으로도 버릴 생각이 없다. 앙코르와트는 내게 과거인 동시에 진행형의 현재이며 예측할 수 없기에 설레는 미래다.

덧붙이는 글 | 계간 <아시아>의 실린 원고를 수정-보완한 글입니다.



태그:#캄보디아, #앙코르와트, #크메르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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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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