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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모두 달에 있다>  표지
 <그리운 것은 모두 달에 있다> 표지
ⓒ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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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보름'이다. 언니 이름은 '아름'. 우리 아빠의 작품이다. 아름드리 나무처럼 큰 사람이 되어라, 저 하늘 위 달처럼 푸근한 사람이 되어라, 뭐 이런 소망을 담고 아빠는 우리 이름을 이렇게 지어주신 것 같다.

요즘에야 한글 이름이라고 해서 이슈도 되지 않는 시대이지만, 예전에는 자식 이름을 아름, 보름이라고 지었다고 하면 조금은 해괴망측하게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내 언니 이름을 들은 외할머니는 순해서 마음에 들어 하던 사위의 독특한 면을 처음 발견하셨고, 내 이름을 들은 후에는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뭐 하는 지…ㅅ' 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고도 한다.

언니 같은 경우는 아빠의 소망대로 큰 사람이 되었다. 내 언니는 아름드리 나무처럼 큰 마음으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여기에 더해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림 없이 굳건히 지금 서 있는 곳에 그대로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작은 기쁨, 작은 만족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사람인 언니는 내게 그 어떤 사람보다 큰 사람으로 보인다. 

나의 경우는 아빠에게는 죄송하지만 결코 푸근한 사람은 되지 못했다. 사람들의 허물을 따뜻하게 감싸주기보다는, 그 사람의 허물에 대해, 또 나의 허물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위로와 위안보다는, 성장이나 발전을 더 좋은 가치로 여긴 것이다. 타인의 따뜻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성장, 발전도 없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튀는 이름 때문에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아주 간혹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 테면 놀림을 당했다던가, 선생님에게 자주 이름이 불렸다던가, 별명이 수도 없이 많았다던가 하는 뭐 그런 불편을 말하는 것 같다. 누군가가 날 놀리면 머리끄덩이를 잡았던 것도 같고, 선생님에게 불리는 것은 그닥 두렵지 않았던 것 같고, 별명도 딱히 없었다. 보름달이라고 부른 친구가 있었던가. 아마 있었을 것이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신 좋았던 기억은 몇 개 있다. 내 이름엔 한자가 하나만 들어간다는 것, 그래서 한문 시간에 아주 유리했다는 것, 누구든지 나를 한 번 보면 잘 잊지 않는다는 것, 이름과 얼굴이 아주 잘 매치가 돼서 그렇다는 것, 모든 것이 평범한 내게 딱 하나 특별한 것이 있어서 그냥 마냥 좋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친구들이 내게 소원을 비는 것이 좋았다.

정월대보름, 내게 소원을 빌던 친구들

정월대보름이 되면 친구들은 내게 우선 축하의 말을 건넸다. '너의 날이다.' 그러면서 농담처럼 내게 소원을 빌었다. '내 소원 좀 들어주라.' 그러면 나는 내가 마치 진짜 달님이라도 된 듯 신이 나서 맞장구쳤다. '너의 소원을 접수했다. 들어주도록 하지.'

보름달이 안 뜨면 너는 거울을 보면 되겠다며 킥킥거리던 친구들, 소원이 성취되지 않으면 날 원망하겠다는 협박들, 그렇게 소원, 소망, 기대, 희망, 바람 등을 이야기하던 그때의 친구들과 나. 이제 친구들은 정월대보름이 되어도 더는 내게 소원을 빌지 않는다. 나 역시 소원을 빌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정월대보름 날 마지막으로 소원을 빌어본 적이 언제던가. 형식상으로나마 고개를 쭉 빼 들고 둥그런 달을 쳐다보기는 한다. 소원 없이, 그저 잠깐. 달에게 소원을 빈다는 것 자체가 이제는 더는 농담으로라도 피부로, 현실적으로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빌어도, 들어주지도 않을 텐데, 뭣하러, 비나.

시인 권대웅은 다른 생각인가 보다. 그는 달의 힘을 믿는 사람이었다. 달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이다. 산문집 <그리운 것은 모두 달에 있다>에서 그는 당연하단 듯이 이렇게 대답한다.

"달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니?"
누군가 나에게 물었을 때 나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 <그리운 것은 모두 달에 있다> 중에서

공황장애를 심하게 앓고 있을 때, 권대웅 시인은 지하철, 버스도 타기 어려울 만큼이었다고 한다. 지하철 한 정거장을 참아 내기에도 버거운 그런 상황. 공황 장애를 이겨내기 위해선 술에 취해 지하철을 타야 할 정도였다. 그는 폐인이 될 것 같았고, 그 좋아하는 여행도 못할 것 같았고, 죽을 것만 같아 두렵고 두려웠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그는 공황장애를 한 번 이겨내 보기로 한다. 달리기를 했다. '나아질 거야! 나을 거야! 좋아질 거야!'를 마음 속으로 외치며. 달리기를 하는 그의 머리 위에는 언제나 달이 떠 있었다. 그는 뛰면서 달에는 참 좋은 기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달의 기운이 그에게 전해진 것일까. 3년 만에 그의 공황장애는 완치되었다. 그리고 시인은 달을 그리기 시작했다. 달에 대한 시도, 글도 썼다. 그렇게 이 책은 탄생했다.

샛노란 달, 오색찬란한 달, 꽃송이를 듬뿍 안은 달, 밥을 한 가득 품은 달, 항아리가 된 달, 나무 뒤에 뜬 달, 목련 나뭇가지에서 태어난 달, 달팽이 등 위의 달, 물 속에 비친 달, 프라하의 달, 베니스의 달, 스페인 말라가의 달, 피카소의 달, 카프카의 달, 고흐의 달.

수많은 달들이 시인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나 내 가슴에 따뜻한 달 그림자를 드리워주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수많은 달을 만나니 마치 잊고 있던 수많은 내 얼굴 표정을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들었던 걸까. 내겐 수많은 표정의 가능성이 있는데, 통속적인 몇 개의 표정만을 지으며 살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뭔가, 경직되게, 현실적으로, 일반적으로, 예상 가능한 것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의 얼굴이 되어 있는 것이다.

달에게 빌면 정말 소원이 이루어질까

시인은 이런 말을 한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너무나 순진해서 너무나 폭력적이라는 이 말. 안 될 것을 뻔히 아는데도 간절히 소망하라는 것보다 더 잔인한 것은 없다는 요즘 시대의 말 앞에서 순진한 시인의 이 말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오래된 경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 여겨진다.

그래서 시인은 달을 보라고 한 것이 아닐까. 고개를 들고 달을 봐보라고. 달이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라도 달을 띄워 보라고. 그리고 나서 달을 보며 '간절히' 소원을 빌어보라고. 그의 말처럼 눈에, 마음에, 달을 띄운 이는 무슨 소원을 빌게 될까. 현실적이고, 일반적이고, 예상 가능한 소원을 빌게 될까. 그러니까 안 될 것이 뻔한 폭력적인 소원을 빌게 될까. 아니면 정말 간절하고도 간절한, 온 몸을 전율하게 할 그런 나만의 소원을 빌게 될까.

달에 소원을 빌어도 소용이 없을 거라고 단념했던 나는 무슨 소원을 빌고 싶었던 걸까. 더 날씬해지기를, 더 똑똑해지기를, 더 많이 갖기를, 더 성공하기를, 마지막까지 성공한 사람으로 남기를, 죽어서도 성공했던 사람이라 기억되기를 바랬던 걸까. 달은 왠지 이런 소원은 들어주지 않을 거란 걸 나는 예상했던 것 같다.

아니 달에겐 이런 소원은 빌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이런 소원들은 소원이 아니니까. 소원이 이런 것일 수는 없으니까. 소원은 조금 더 내밀하고, 개인적이고, 잊을 수 없는 그래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어떤 것이어야 할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달에게 소원을 빌지 않은 이유는, 내겐 이런 소원 자체가 없어서였던 건지도 모른다.

시인은 말한다.

지금 당신, 아프니? 외롭니? 숨이 턱에 닿게 달려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도, 밥솥째 끌어안고 밥을 퍼먹어도, 펑펑 울어도, 슬프니? 밤이 길고 무섭니? 너무 힘들어서 죽을 것만 같니? 근육조차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지는 않니? 일어나! 그래도 살아!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잖아! -<그리운 것은 모두 달에 있다> 중에서

시인의 달 그림과, 달 시와, 달 글에 힘을 입은 나는 달에게 오랫만에 말을 걸어본다. '무엇을 간절히 원해야 할지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그것을 찾을 때까진, 제 이름처럼 살아보도록 할게요. 아빠의 소망을 담아, 푸근하게. 그래요. 아주 쬐금이라도 푸근한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그렇게 어려운 부탁은 아니지… 않나요?'

덧붙이는 글 | <그리운 것은 모두 달에 있다>(권대웅/예담/2015년 02월 27일/1만3천8백원)



그리운 것은 모두 달에 있다 - 권대웅 시인의 달 여행

권대웅 지음, 예담(2015)


태그:#권대웅,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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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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