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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珍島)는 말 그대로 보배 섬이다. 섬이지만 넓은 토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유형, 무형의 자산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독특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무형의 민속 자산들이 많아 남아 있어 소설가 김훈은 이런 진도를 '원형의 섬'으로 말하고 있다.

원형의 섬, 유배의 섬

섬이라는 고립적 공간이 이러한 독특한 문화환경을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도 삼별초가 새로운 고려의 '둥지'를 틀려고 할 만큼 지리적인 환경도 잘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먹고살 만한 땅이어서일까, 고려말 왜구들의 침입으로 한때 공도(空島)의 섬이 되기도 하였지만  진도에는 지금도 예술가 수준의 그림이나 글씨를 쓰는 사람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 또한 진도 아리랑 한 소절은 누구나 할 정도이다.

진도는 유배의 섬이다. 섬 중에서 가장 많은 유배인 들이 찾아온 곳이기도 하다. 사화가 일어나면 그 희생자 중 상당수가 진도로 유배되었다. 유배객들 중 무오사화 때 이주(李冑)와 홍언필(洪彦弼)이, 기묘사화 때에는 김정이 유배를 왔다. 또한 김안로(金安老)도 권력을 잃은 후 이곳에 유배되었으며, 기사환국 때는 김수항(金壽恒)이, 신축옥사 때는 조태채(趙泰采)가 진도에 유배 오기도 하였다.

을사사화의 희생자 노수신은 19년을 진도에서 지냈다. 노수신은 진도에 머무르는 동안 주민들의 교화에 힘쓰고 강학으로 제자들을 많이 길러내 그를 '진도개화지조(珍島開化之祖)'라 부르기도 한다.

유배인들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이들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영조 38년(1762년)에는 흉년이 들어 이들을 먹여 살리기가 힘들게 되자 본도감사(本道監司)가 조정에 장계를 올려 유배자를 그만 보내달라고 호소하기에 이른다.

섬으로 떠나온 유배자들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물살 센 울돌목 명량해협을 건너갈 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마음은 아니었을지. 예전에는 배를 타고 벽파진에 닿았을 것이지만 지금은 해남 우수영과 진도의 녹진을 연결하는 다리가 건설되어 차를 타고 쉽게 오갈 수 있다,

온산이 바위로 이루어진 기이한 형상의 산이다.
▲ 진도 금골산 온산이 바위로 이루어진 기이한 형상의 산이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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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대교를 지나 군내면 둔전리에 이르면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산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3m 정도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산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진 기이하고 독특한 산이어서 지나는 이의 관심을 끈다.

금골산은 산의 앞쪽이 절반쯤 싹둑 잘라진 것 같은 형상에 움푹 페어 동굴이 형성되거나 바위들이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금골산(金骨山)의 골이 뼈골자인 것처럼 마치 거대한 해골바가지를 연상시킨다.

이 금골산을 진도 사람들은 진도의 금강이라 부른다. 아마도 기이한 바위의 형상들 때문인 것 같다. 예전에는 '상골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산 아래로는 넓은 간척지로 이루어진 둔전평야가 펼쳐지고 명량해협이 내려다보인다.

명산에는 선인(仙人)들이 찾기 마련인 듯하다. 실제로 이곳에는 면벽수도를 하는 스님들이나 유배자들이 동굴을 거처삼아 지냈다는 기록들이 보인다. 기이한 이 바위산에서 신선이 된 듯한 기분으로 살았음 직 하다.

어느 산인이 이르기를 "산은 높고 커야 명산이 아니라 신선이 머무르면 명산이다."고 했다 한다. 수도를 하는 도인들이 머무르고 유배 온 자들이 찾아온 것을 보면 명산은 명산인 듯 하다.

글골산 아래 초등학교에 있는 5층석탑은 고려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있다.
▲ 금골산 5층석탑 글골산 아래 초등학교에 있는 5층석탑은 고려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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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골산 해언사와 5층 석탑

금골산은 옛 기록과 금성초등학교에 있는 5층 석탑(보물 529호)을 통해 그 역사와 자취를 가늠해 볼 수 있다. 5층 석탑은 고려후기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해월사(海月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온전하게 잘 남아 있는 이 석탑은 기단부가 조금 불안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호리호리하게 생긴 것이 잘 빠진 여인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높이 4.5m인 이탑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을 모방한 백제탑의 양식으로 최남단 섬인 진도에 이러한 탑의 양식이 나타나고 있다는 면에서 주목 받고 있다. 고려시대의 융성한 불교는 섬지역인 이곳 진도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5층석탑과 함께 있었던 옛 해월사의 복원으로 만들어진 사찰이다.
▲ 금골산 해언사 5층석탑과 함께 있었던 옛 해월사의 복원으로 만들어진 사찰이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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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5층 석탑 위쪽 산 중턱에 해언사(海堰寺)라는 절이 복원되어 있다. 본래 해월사 터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고 하는데 해월사의 정통성을 잇고자 한 것이 아닌가 보인다.

그런데 해언사의 언(堰)자는 보(둑)를 막는다는 의미의 언으로 해월사라 하지 않고 해언사라 한 것이 흥미롭다. 이곳 금골산 앞은 간척을 하여 만들어진 넓은 들판이다. 이처럼 간척을 하여 강산이 변한 이곳을 나타내기 위해 바꾼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금골산 정상은 해언사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 가면된다. 산길은 상당히 가파른 길이어서 중간에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바위산답게 경사진 등산로를 20여 분간 올라야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 정상에 오르면 멀리 고려 때 조성된 용장산성을 비롯하여 명량해협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 서면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둔전마을과 들판이 내려다 보인다.
▲ 금골산 정상 산아래 정상에 서면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둔전마을과 들판이 내려다 보인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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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골산은 산 정상에 이르면 앞 쪽이 천길 낭떨어지 절벽을 이루고 있어 마치 비행기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짜릿한 고도감을 느낄 수 있다. 정상인도 다리가 찌릿찌릿할 정도여서 고소공포증인 사람은 오르기가 어렵다.

이주가 기록한 <금골산록>

이곳 금골산에 대해서는 이주(李冑)의 <금골산록>에 아주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1498년(연산군 4) 정언(正言) 벼슬을 지내던 이주는 세조를 공격하고 풍자적인 조의제문을 만들어 이조사화의 원인이 되었는데,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진도에 유배되어 금골산에 머무르면서 금골산록(金骨山錄)을 썼다.

이주는 <금골산록>에서 금골산에 대해 자세히 쓰고 있는데 이 기록이 서거정이 지은 동문선(東文選)에 나온다.

이주는 진도의 유배객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들어온 사람으로 진도에서 6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세상과 인연을 끊고 금골산에 만 들어가 살았다. 그는 금골산에서 수도승처럼 지냈다고 한다. 금골산에는 3개의 굴이 있었는데 굴 중에서도 가장 위에 있는 상굴에 살았다.

그는 세상을 멀리하고 이곳에 거처하면서 아침과 저녁은 차 한사발로, 낮에는 밥 한 그릇으로 때우며  마치 신선같이 살았던 것 같다.

이주가 금골산에서 쓴 것으로 보이는 시 한 편이 <밤에 앉아서(夜坐)>(망헌집)이라는 시이다. 유배지에서의 가슴 시린 쓸쓸함이 절절히 느껴지는 시이다.

음산한 바람 불고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바다 기운이 산속의 깊은 석굴까지 이르네
이 밤, 덧없는 인생은 흰머리만 남아
등불 켜고 때때로 초년의 마음을 돌아본다.

이주는 상굴에 살면서 오게(五偈)를 지어 승려 지순(智純)에게 주었다고 한다. 오게는 푸른솔(靑松), 지는 잎(落葉), 조수(潮), 흰구름(白雲), 대나무(竹)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고산 윤선도가 금쇄동에서 지은 '오우가'를 연상케 한다.

금골산록은 고산이 금쇄동기를 쓰면서 산의 형세를 아주 세세하게 묘사한 것처럼 금골산의 형세를 아주 세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를 보면 옛 사람들의 묘사력과 자연에 대한 감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골산은 진도읍에서 서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는데 중봉이 가장 높고 사면이 모두 돌로 되어 바라보면 옥부용과 같다. 서북은 바다에 닿고 지맥이 물구거리며 남으로 달려 2마장쯤 가서 간검이 되고 또 동으로 2마장쯤 가서 용장산이 벽파도에 이르러 그쳤다.

산의 주위는 모두 30여리인데 아래는 큰 절터가 있어 이름은 해원사(海院寺)다. 9층의 석탑이 있고 탑의 서쪽에 황폐한 우물이 있으며 그 위에 삼굴(三窟)이 있는데 그 맨 밑에 있는 것은 서굴이다.(…)

그 맨 위의 것이 상굴인데 굴이 중봉 절정의 동쪽에 있어 기울어진 비탈과 동떨어진 벼랑이 몇 천길인지 알 수 없으니 원숭이 같이 빠른 동물도 오히려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다. 동쪽에서는 무엇을 더 쉬잡아 발붙일 땅이 없고 서굴을 경유하여 동으로 올라가자면 길이 극히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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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지른 절벽에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어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
▲ 금골산 정상 돌계단 깎아지른 절벽에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어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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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다 보면 금골산록의 기록이 마치 얼마 전에 쓴 것처럼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상굴의 마애여래좌상

이주가 머물렀다는 상굴은 마애여래좌상이 동굴 벽에 조성되어 있다. 이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동굴은 밧줄을 타고 내려가야 할 만큼 까까 지른 절벽의 경사진 곳이다. 바위에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어 천천히 내려가야 하지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정도이다.

금골산의 상굴에 조성되어 있다.
▲ 금골산 마애여래좌상 금골산의 상굴에 조성되어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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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아래쪽으로 약 50여 미터를 내려가면 동굴처럼 안쪽으로 넓게 패인 바위가 나타나고 그 바위면의 가운데에 마애여래 좌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앞쪽에는 신기하게도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훵한 앞을 가려주기 때문에 아찔한 공포감도 느껴지지 않고 아늑하기까지 하다. 도인의 거처지로는 최고의 은신처 같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 금골산 마애여래좌상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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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은 면벽의 수도승이 수년에 걸쳐 불사의 심정으로 조성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마애불은 대체적으로 고려시대 때에 주로 조성된 것으로 볼 때 이주가 이곳에 오기 전 이미 스님들이 수도처로 사용되고 있었던 셈이다.

금골산 융기현상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마애석굴 바위 표면은 마치 벌집구멍처럼 되어 있다. 지질학에서는 이를 '타포니 현상'이라고 한다. 지구 대변동으로 자갈, 모래, 흙 등이 호수를 메우고 있다가 내부 표면에 진행된 풍화작용의 융기현상으로 암벽을 이룬 퇴적암이다.

주로 수성암에서 나타나며 이는 중생대 후기(약 7천만 년 전)에 나타나 금골산이 융기된 산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금골산의 이런 지질을 통해 육지가 융기한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금골산이 오래전 융기했음을 말해주는 지질학의 타포니 현상이 마애불이 있는 상굴에 나타나있다.
▲ 금골산 타포니 현상 금골산이 오래전 융기했음을 말해주는 지질학의 타포니 현상이 마애불이 있는 상굴에 나타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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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골산은 나무 한그루 제대로 자라기 힘든 석산이지만 유배자와 수도승들이 기거하기 위해 들어온 것을 보면 신선이 머무는 명산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태그:#금골산, #진도, #마애여래좌상, #이주, #금골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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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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