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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는 흔히 '외교관의 꽃'이라 불린다. 대사를 임명할 때는 고유한 임무뿐 아니라 상대국에 대한 예우도 함축하고 있다.

주일 미국대사 자리는 영국, 프랑스와 더불어 선망의 대상으로 꼽힌다. 1906년부터 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사람은 29명(현 캐롤라인 케네디 대사 포함)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슈퍼 스타'급 인사로 채워지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16년 동안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마이크 맨스필드를 비롯해 월터먼 데일 부통령, 톰 폴리 하원의장, 하워드 베이커 공화당 상원 원내총무 등 기라성 같은 거물 정치인들이 주일 미국대사 자리를 거쳤다.

반면, 주한 미국대사 자리에는 주로 국무부 과장급 정도의 무명인사가 임명된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주한 미국대사에 23명이 이름을 올렸지만, 일본과는 달리 스타급 명사를 찾기 힘들다. 미국이 평상시 세계 최고의 동맹국이라고 치켜세우는 한국에, 이제 겨우 국민소득 1000달러를 넘어선 캄보디아 수준의 경량급 인사를 대사로 보내는 건 몹시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이제 한국도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의 위상에 걸맞게 중량감 있는 인물을 대사로 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크 리퍼트 대사가 피습을 당하고 나서야 그가 주한 미국대사임을 알게된 사람이 비단 필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부채춤, 석고대죄 단식, 성조기... 국제적 웃음거리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대한고엽제전우회 주최로 열린 김기종씨의 리퍼트 미국대사 피습 규탄 집회 '한미동맹 강화로 종북세력 척결대회'에서 바람에 날리는 태극기 사이로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의 그림이 보이고 있다.
▲ '태극기 속 리퍼트를 찾아라!'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대한고엽제전우회 주최로 열린 김기종씨의 리퍼트 미국대사 피습 규탄 집회 '한미동맹 강화로 종북세력 척결대회'에서 바람에 날리는 태극기 사이로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의 그림이 보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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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처신을 가볍게 하면 상대방으로부터 내심 업신여김을 당하기 마련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같은 맥락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중동 순방을 마치고 한국에 닿자마자 곧바로 리퍼트 대사의 병실을 찾은 것은, 아무리 한미동맹이 중요하다고 해도 시기와 형식 면에서 매우 부적절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박 대통령이 중동 순방 중, 이미 리퍼트 대사에게 전화로 위안과 유감의 뜻을 표했고 이완구 총리 등이 정부를 대표해 문병을 다녀온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퇴원을 앞둔 리퍼트 대사의 병실까지 직접 찾아간 것은 주권국가의 원수로서 스스로 국격을 훼손한, 사려 깊지 못한 행위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대통령의 수준이 곧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이 발생한 직후 대사의 쾌유를 기원한다며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큰절을 하고, 부채춤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한국민이 보인 볼썽사나운 비이성적 행태를 보고 있자면 창피하기까지 해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심지어 박 대통령의 제부인 신동욱 공화당 총재는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라면서 '석고대죄 단식'을 벌이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로 304명에 이르는 자국민이 목숨을 잃었을 때에는 진정성 담긴 애도는커녕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농성 중인 유족들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 부상 정도로 끝난 미국대사의 안전을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성조기를 들어 올리다니... 이 얼마나 해괴한 짓인가. 국제적 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다. 신동욱씨가 정녕 곡기를 끊고 석고대죄해야 할 곳은 리퍼트 대사가 입원 중이었던 병원이 아니었다. 세월호 사고 희생자들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어야 했다.

'영원히 같이 갑시다'가 중요한 게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9일 오전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병실을 방문해 위로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9일 오전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병실을 방문해 위로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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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습 이후 리퍼트 대사는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집니다, 같이 갑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이에 '영원히 같이 가자'고 화답했다. 박 대통령이 각별한 친근감의 표시로 대사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오직 자국의 국익만의 있을 뿐 영원한 동맹이란 없다.

국익을 위해 미국과 '같이' 가되 반드시 주권국가로서의 체통을 지키면서 '당당히' 가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영원히 가자'는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무엇보다 군사주권인 전시작전권을 조속히 환수하고 SOFA(주한미군지위협정) 같은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 게 먼저다. 아니면 존 위컴 전 주한미군사령관의 비아냥처럼 '들쥐'(lemmings)로 사는 방법밖에 없지 않을까.

존 위컴의 들쥐 발언은 무엇?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을 당시 존 위컴 주한미사령관은 미국 기자들과의 인터뷰 당시 "전두환이 곧 한국의 대통령이 될지 모른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마치 들쥐 떼처럼 그의 뒤에 줄을 서고 그를 추종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1970년 도미했으며 '김중산'이라는 필명으로 재미동포 주간지 <코리안 스트릿 저널>에 다 년간 <김중산칼럼>을 썼고, 지금은 <미주한국일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태그:#리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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