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1은 입식격투의 최고봉이었던 단체답게 수많은 전설을 남겼다. '미스터 퍼펙트' 어네스트 후스트(50·네덜란드)는 이른바 한방 필살기는 없었지만 다양한 기술을 평균 이상으로 구사했고 무엇보다 상대의 타이밍을 뺏는 능력과 노련미로 K-1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불렸다. 특히 체력분배와 경기운영에 능해 토너먼트에서 유달리 강한 모습을 보였다.

'벌목꾼(Lumberjack)' 피터 아츠(45·네덜란드)는 젊은 시절 일격필살의 하이킥과 '죽창(竹槍)펀치'를 앞세워 '폭군'으로 군림했으며 이후 방황의 시절을 겪고 돌아와서는 노련미를 통해 '제2의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호감형 외모와 정의로운 이미지로 인해 별다른 호불호없이 폭넓은 인기를 누린 스타 파이터이기도 하다.

세미 슐트(42·네덜란드)는 말 그대로 '격투머신'이었다. 그는 212cm의 엄청난 거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부터 가라데 등을 읽히며 탄탄한 기본기를 닦은 덕에 거인 파이터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약점이 없었다. 외려 자신의 큰 체격을 활용한 특유의 패턴으로 인해 상대선수들에게 재앙같은 존재로 군림했다.

'플라잉 젠틀맨' 레미 본야스키(39·네덜란드)는 입식격투가 보여줄 수 있는 또 다른 개성 세계를 보여줬다. 호리호리한 체형에도 불구하고 철벽가드를 통해 거구들의 강한 타격을 막아내고 상대가 공세에 빈틈을 보이게 되면 거침없이 몰아치는 시간차 공격을 통해 한 시대를 풍미했다. 아츠와 달리 호불호는 많이 갈렸지만 누구도 따라할 수 없었던 자신만의 파이팅스타일을 구사했다는 점에서 자주 회자되고 있다.

'철완(鐵腕)' 마이크 베르나르도(46·남아프리카공화국), '하이퍼 배틀 사이보그' 제롬 르 밴너(43·프랑스), '남해의 흑표범' 레이 세포(44·뉴질랜드), '사모아괴인´ 마크 헌트'(41·뉴질랜드) 등은 강펀치를 휘두르며 하드펀치의 진수를 보여주었으며 프란시스코 필리오(44·브라질), 글라우베 페이토자(42·브라질), 알렉산더 피츠크노프(36·러시아), 에베우톤 테세이라(33·브라질)로 이어지던 극진계보도 많은 팬들의 집중관심을 받은바 있다. 그 외에도 K-1에는 쉴새없이 무수한 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뛰어난 파이터들이 오고갔음에도 K-1의 정신을 논할 때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가 있다. 딱 한번 우승했을 뿐이고 K-1에서 활약한 시기도 적지만 아직까지도 팬들은 그를 잊지 않고 회상한다. K-1에 영혼을 남기고 떠났다는 평가를 받고있는 고(故) 앤디 훅(스위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앤디 훅은 높은 인기와 명성을 뒤로 한 채 2000년 8월 백혈병으로 사망했지만 팬들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남아 지금까지도 K-1의 정신으로 회자되고 있다.

앤디 훅은 높은 인기와 명성을 뒤로 한 채 2000년 8월 백혈병으로 사망했지만 팬들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남아 지금까지도 K-1의 정신으로 회자되고 있다. ⓒ K-1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 자신을 극복한 사나이

앤디훅은 피터아츠, 어네스트 후스트, 마이크 베르나르도 등과 함께 이른바 4대천왕을 이루며 K-1 초창기 흥행을 이끌었다. 당시 4대천왕을 비롯한 기타 주요 파이터들은 기량적인 부분 외에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했던지라 팬들은 당시를 가리켜 '낭만의 시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앤디훅은 세상을 떠난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지금까지도 팬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흔치않은 파이터다. 비단 고인이어서가 아닌 선수 시절 이른바 '감동'이라는 단어에 잘 어울리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으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노력하며 가라데가 보여줄 수 있는 '파괴력'과 '정신'을 실천하고자 부단히 정진했다.

그 결과 K-1 본국인 일본에서는 '푸른 눈의 사무라이'라는 일본인 입장에서 불러줄 수 있는 최고의 호칭을 붙여주었고 앤디 훅 역시 거기에 부응하듯 멋진 모습으로 항상 자신을 어필했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익힌 극진가라데를 바탕으로 링에 입장할 때도 항상 도복을 걸쳐 입었고 승리 후 펼쳐 보인 자연스러운 가라데식 세레모니는 그가 서양인이라는 게 더 어색할 정도였다. K-1이 '무도인들의 정신이 살아있는 단체'라는 이미지를 만드는데 크게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도복과 가라데식 세레모니의 앤디 훅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그 말고도 K-1에는 많은 수의 공수가들이 존재했다. 프란시스코 필리오, 글라우베 페이토자, 니콜라스 페터스, 알렉산더 피츠크노프, 에베우톤 테세이라, 세미 슐트 등 극진회관·정도회관 출신 상당수 선수들은 자신들이 쓰는 무술에 많은 자부심을 가지고 입장시 도복 착용과 가라데식 세레머니를 즐겨 썼다. 가라데 대회가 아닌 타종목이 섞인 격투대회에서 K-1만큼 가라데 냄새가 많이 나는 단체도 없었다.

앤디 훅은 쇼맨십에도 능했다. 다른 공수가들처럼 무도인의 냄새가 물씬 풍기면서도 자신만의 스토리가 확실했고 거기에 팬들과 공감대를 함께 가져가며 같이 호흡할 수 있는 캐릭터였던지라 누구보다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모 밑에서 성장하는 등 불운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는 자칫 방황의 길로 빠질 수도 있었지만 10대 초반에 극진 가라데를 접한 후 본격적인 무도인으로서의 수련을 시작하게 된다. 약관의 나이에 이미 자국내 최고의 극진파이터로 거듭나는 등 자질도 뛰어났다. 이후 세계최고의 공수가라는 명성에 도전했지만 제일교포 2세인 문장규(마쓰이 쇼케이)와 프란시스코 필리오 등의 벽에 가로막혀 아쉽게 고배를 마시고 만다.

특히 우승후보를 다투던 필리오와의 승부는 앤디 훅 입장에서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경기에서 앤디 훅은 시합종료 선언과 동시에 필리오의 정타를 맞고 패배를 하게 된다. 앤디 훅의 세컨에서는 강렬하게 항의했지만 당시 경기를 지켜보던 극진회관 최영의 총재는 "시합도 실전의 일부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방심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대로 경기를 끝내고 만다. 최총재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지만 앤디 훅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앤디 훅은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게 되고 정도회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K-1에 진출하게 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가라데 선수로서의 생활을 접고 본격적으로 K-1 도전에 나섰던 그이지만 주변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다. 인기나 캐릭터 등 상품성적인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았으나 기본적으로 타고난 신체조건(180㎝·98Kg)이 헤비급에서 활약하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 우려를 증명하듯 초창기 앤디 훅은 덩치 큰 선수들과의 대결에서 힘겨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거기에 가라데에 익숙한 선수답게 안면 쪽 방어와 공격에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이 같은 우려를 반영하듯 초반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지만 이후 복싱테크닉 등을 장착해나가며 자신만의 전설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극진회관 시절부터 연습벌레로 소문났던 그는 96년 우승 이후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약점 보안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특히 시간이 지날수록 '수 읽기' 등에도 능한 모습을 보여 그가 만약 사망하지 않았다면 어네스트 후스트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앤디 훅은 파이팅 스타일도 화려했다. 발뒤꿈치로 내리찍는 명품 '엑스 킥(Axekick)'을 비롯 돌려차기, 앞차기, 훅 토네이도 등 누구보다도 다양한 발차기 기술을 실전에서 선보였다. 특히 1996년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자신을 연패를 몰았던 마이크 베르나르도를 맞아 전매특허인 훅 토네이도로 쓰러뜨리고 팬들과 함께 카운터를 세는 장면은 K-1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고 있다. 그가 우승을 차지하자 현지 관중들은 마치 자국 선수가 우승한 것인양 엄청난 환호를 보내고 함께 기뻐해줬다.

앤디훅은 헤비급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체격에 복싱 기술에서 많은 취약점을 노출했다. 내구력이 썩 좋은 편도 아니었다. 때문에 종종 정상급 강자들에게 패배도 기록했는데 거기에 굴하지않고 리벤지를 성공시키며 이른바 '시련의 극복'이라는 가라데의 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해주었다. 또한 상대가 신체 중 일부를 다치면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대부분 파이터와 달리 외려 심판에게 상태를 알려주며 회복 및 치료할 시간을 주는 등 남다른 무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체격적 열세와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실력만큼이나 마음도 거대했던 이 사나이에게 팬들은 온통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푸른 눈의 사무라이'라는 외국인에게 붙여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붙었다. 그는 높은 인기와 명성을 뒤로 한 채 아쉽게도 21세기가 막 시작되려던 2000년 8월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팬들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남아 지금까지도 K-1의 정신으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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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1 백혈병 푸른눈의 사무라이 가라데 극복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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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디지털김제시대 취재기자 / 전) 데일리안 객원기자 / 전) 홀로스 객원기자 / 전) 올레 객원기자 / 전) 이코노비 객원기자 / 농구카툰 크블매니아, 야구카툰 야매카툰 스토리 / 점프볼 '김종수의 농구人터뷰' 연재중 / 점프볼 객원기자 / 시사저널 스포츠칼럼니스트 / 직업: 인쇄디자인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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