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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20구 파리망티역 부근에 선 아침 재래시장 풍경
 파리20구 파리망티역 부근에 선 아침 재래시장 풍경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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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이 공포를, 무지가 꺼림칙함을 만든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생마르탕 운하와 페르 라세즈 묘지 중간쯤에 위치한 파르망티(Parmentier)역 앞에 펼쳐진 재래시장. 20구 동네 여정으로 걸어 올라가는 길목에서 처음 들른 곳.

여기 주민들의 아침 일상이 담긴 풍경을 바라보며, 저기 저만치 가판대에 보이는 오래 발효한 짙고 깊은 치즈만큼이나 그윽한 삶의 향기를 들이마시며……. 사실 나도 여기 같은 서울의 변두리에서 커오지 않았나, 지금도 그런 곳에서 살고 있지 않던가.

여기도 파리다. 가판에 한가득 깔린 과일과 채소를 골라 담으며 아침 장을 보고 있는, 너무도 당연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을 찬찬히 바라보며, 혼잣말이 문득 머리를 스쳐갔다. 그러고는 꽉 부여잡은 가방 끈을, 피부색이 짙은 사람이 다가오면 조건반사적으로 경계태세에 들어가는 긴장의 끈을 조금씩 풀어놓았다.

미디어와 여행자 사이에서의 소문은, 이제 곧 다다르게 될 파리 19구, 20구를 피부색 짙은 사람들이 밀집한 '우범 지역'과 '음침한' 곳으로 규정했다. 파리 속에 있는 지저분하고 위험한 외딴섬처럼 비치고 있었다. 아주 틀린 사실은 아니겠지만, 섣부른 규정이 불러오는 편견과 고정관념 또한 무의식적인 거대한 폭력을 낳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파리20구 파르망티역 부근에 선 아침 재래시장 풍경
 파리20구 파르망티역 부근에 선 아침 재래시장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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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파리가 더 좋았다

생각보다 파리 곳곳에는 대형 마트가 많았다. 마트에서 산 가벼운 바게트를 들고 가는 파리지앵의 모습이 이 시대 파리의 묵직한 풍경 중 하나로 보였다. 또한 파리에는 여전히 이곳과 같은 노점 시장들도 많았다. 크고 작은 광장이 많았고, 그 터에는 여기처럼 오전에 섰다가 오후에 철수하는 시장 풍경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이 파리가 더 좋았다.

흐릿한 겨울 아침 속에 들어선 시장을 찬찬히 거닐다가, 배가 고팠을까, 견과류와 말린 과일을 파는 가판에 멈춰 섰다. 이탈리아에서 들른 과일 가게에서 '새해 선물'이라며 건네주던 건조 무화과도, 파리에 오기 전 들렀던 생폴드방스의 수녀원에서 디저트로 먹어본 대추야자도 있었다. 그 중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보지 못한 커다란 땅콩 비슷하게 생긴 녀석, 아작아작 씹히는 식감이 매혹적일 것 같은 느낌에 시선이 확 꽂혔다. 한입 베어 먹어보고 싶었다.

파리20구 파르망티역 부근에 선 아침 재래시장에서, 이 브라질넛을 한줌 사먹었다
 파리20구 파르망티역 부근에 선 아침 재래시장에서, 이 브라질넛을 한줌 사먹었다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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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청년 상인에게 딱 한 줌만 달라고 부탁하니, 씩 웃으면서 봉지에 넣어서 건네줬다. 마카다미아나 캐슈넛, 그보다 더 큰 견과류 정도로 생각했는데 웬걸, 맛이 야릇하고 역했다. 실패다. 나중에 민박집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생으로 먹는 게 아니라 구워먹는 거라고. 맥주 안주로 딱이라고. 게다가 영양가 만점의 건강식이라고 했다. 구워달라고 부탁한 뒤 먹어보니, 정말 먹을 만했다(뭔고 하니 '브라질넛'이었다).

나는 왜 여기에 온 것일까. 호기심? 안 가본 곳? 남들이 잘 안 가는 곳? 가지 말라는 곳은 더 가보고 싶은 청개구리 심보?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백화점보다는 재래시장통이, 세련된 청담동 거리보다 성곽 아래 달동네 북정마을에 더 끌리는, 그런 곳에서 더 정감과 안락함을 느끼는 내 삶의 경향이 내 발걸음을 여기로 이끈 것이 아닐까.

순간, 작년 일본 오사카에 갔을 때의 풍경도 스쳤다. 높다란 빌딩 숲을 지나 서민 동네라고 하는 텐노지에 도착했을 때, 그 시장통. 그 허름함과 누추함과 해어져버린, 그러나 발바닥 아래로부터 꿈틀대고 있는 질긴 생의 감각을 느꼈을 때. 나는 왠지 모르게 안락함을 느꼈다. 게다가 세 번째 파리행이다 보니 낯선 두려움이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다. '소매치기? 조심하면 되지 뭐, 당하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인 것이고' 일말의 대담함도 생겼다.

딱 한 문장을 따라 온 여정, 나머지는 발길따라

여행 책을 참고하진 않았지만, '이끔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책에서 본 딱 한 문장을 따라 이곳에 왔다.

"벨빌 지하철역까지 걸어 내려가면서 살펴본 사람들의 얼굴색, 분위기, 몸동작, 옷차림, 상점이나 시장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냄새, 카페 분위기가 모두 낯설고 생소했다. 21세기에서 19세기로 돌아간 느낌이었고 파리가 아니라 제3세계의 어느 낯선 도시의 낯선 시간 속으로 흘러 들어온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알았던 파리와는 완전히 다른 파리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정수복, '파리를 생각한다' 중)

다른 파리란 무엇일까. 무엇이 파리일까. 파리의 더 깊숙한 얼굴을, 치장 없는 민낯을 들여다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리하여 파르망티역을 출발해 쿠로네(Couronnes)역 부근을 거쳐, 몽마르트르 언덕만큼이나 파리 시내를 잘 내려다볼 수 있다는 벨빌 언덕만을 목적지로 삼았다. 나머지는 그저 발길따라 상황에 이끔에 따라 거닐기로 오늘의 일정을 잡았다.

파리20구 오베르캄프 거리의 아침 풍경
 파리20구 오베르캄프 거리의 아침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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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시장을 나와 다시 걷는다. 굳게 닫힌 상점 셔터들 틈바구니에서, 하나씩 드르륵 셔터 문이 열리고 있는 아침이다. 오늘도 하늘은 온통 뿌연 구름이 두드러졌고 아침 햇살은 희미하다. 약간 쌀쌀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덜덜거리게 춥진 않다.

낯선 주거지의 일상으로 걸어들어가는 나의 반대편으로는 출근길을 재촉하는 파리지앵들이 스쳐지나간다. 겨울 유럽 휴가시즌은 어제로 끝났다. 관광객이 빠진 파리는 이제 완연한 일상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고, 나는 전혀 관광지도, 명소도, 아니, 구태여 찾지도 않는 밋밋하고 남루한 일상의 공간을 별다른 목적 없이 배회하고 있다.

파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카페는 테이블에 올려놓은 의자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저만치 앞에 보이는 카페 테이블에는 이미 사람이 앉아 있다. 자세히 보니 따박(Tabac, 담배 등을 팔며 카페를 겸해서 장사하는 곳, 구멍가게와 카페를 합쳐놓은 느낌?)이다.

나는 왜 이런 곳에 멈춰 있을까 

파리20구를 거닐다 마주한 따박(Tabac)을 엿보다
 파리20구를 거닐다 마주한 따박(Tabac)을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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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깃 안을 엿본다. 허름하면서도 꾸밈없는 서민적인 정서가 느껴지는 곳이다. 바에 구부정하게 서서 맥주를 마시는 어르신이 눈에 들어온다. 옆자리 중년 남성은 조간신문을 펴들고 화이트 와인을 마시고 있다. 자릿값을 아끼려고(앉을 경우 별도의 추가 요금을 낸다), 혹은 잠시 한 잔 하고 가려고 서 있는 사람들이다. 추가로 삯을 지불했을 테이블에 앉아 있는 젊은 여성은 에스프레소 잔을 옆에 두고 넉넉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다.

뒤편에는 아침부터 핑퐁 게임을 즐기는 사람도 보인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그들의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 서서 먹고 먹이는 문화, 앉으면 돈을 더 내야하는 우리에게는 없는 그 모습이 야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카페지기와 손님들은 바로 얼굴을 맞대고 친밀하게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홀로 테이블에 앉은 여성은 담배 연기만을 뿜으며, 파리의 겨울 하늘처럼 흐릿한 고독과 놀고 있는 듯하다. 아침부터 맥주와 와인을 마시는 모습은 아무래도 생소하다. 여기는 종이 신문을 보는 사람이 아직도 있긴 하구나...

나는 왜 이런 곳에 멈춰 있을까. 단언컨대, 별 볼일 없는 이런 순간만큼 여행의 감성에 짙게 물드는 때도 없다. 나는 일상 속에서 일상을 엿보고 있다. 휴가철 파리의 떠들썩함도, 유명한 명소가 주는 장엄함도 전혀 없는 이 낯선 일상 속에 완전히 홀로 놓여 있다. 예상과 계획은 없으며, 그저 맞닥뜨린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움직이고 있는 손짓 몸짓 하나하나를 찬찬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저 사람들에게는 그저 반복적이고 지리한 일상일 장면들, 그러나 그렇기에, 그윽한 삶의 리얼리티가 주는, 나와는 동떨어져 있으면서도 나또한 지금은 속해있는 이 민낯의 현장에서, 그 자체로 뿜어져 나오는 생의 공기와 체취에 온통 둘러싸인 채로.

(* 다음 편에 계속)


태그:#유럽 여행, #파리, #파리20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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