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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8일 '바다제비(海燕)'라는 뜻의 수퍼 태풍 하이옌이 필리핀을 관통했다. 당시 미국 CNN은 이 태풍이 최대풍속 314Km/h, 순간최대풍속 379Km/h에 달하는, '지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태풍'이라 표현할 정도였다. 태풍이 상륙할 때 높이 14미터의 해일이 동반됐다. 이로 인해 필리핀에서는 7천여 명이 사망 또는 실종됐고, 120만 채의 가옥이 붕괴돼 4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현재 상태는 어떨까? 언론보도에 따르면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한 상태라 한다. 복구 작업은 지역별로 차이도 있다. 태풍이 처음 상륙했던 레이테주(州) 타클로반은 여러 지원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은 관심도가 덜해 그나마도 복구가 더욱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태풍 피해가 발생한지 1년 반이 넘었지만, 피해는 여전히 복구되지 않고 있다. 사진은 필리핀 일로일로주 콘셉시온시티 마카투나우 바랑가이의 모습이다.
▲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태풍 피해지역 태풍 피해가 발생한지 1년 반이 넘었지만, 피해는 여전히 복구되지 않고 있다. 사진은 필리핀 일로일로주 콘셉시온시티 마카투나우 바랑가이의 모습이다.
ⓒ 에코피스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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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물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 21일, 지난해부터 필리핀 현지에서 태풍 주민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는 에코피스아시아 이태일 사무처장을 만나 관련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에코피스아시아는 환경부와 환경산업기술원(KEITI)의 지원을 받아 '필리핀 태풍피해지역 마을단위 빗물이용 음용수공급 현지화 시범사업' 벌이고 있다.

오염으로 마실 물도 없어

이 사업에는 서울대 빗물연구센터, 에코네트워크 등 국내 연구기관과 아시안 브릿지 필리핀 등 현지 단체가 함께 했다. 이태일 처장은 "태풍이 왔을 때 일로일로 섬은 200여 개의 대피소가 운영될 만큼 피해가 컸지만,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아 지원이 부족한 상태"라고 말했다. 태풍에 의한 피해가 발생하면 당장 전기와 식수가 문제였다.

특히 식수가 심각했는데, 하이옌 태풍 피해 발생 열흘 후 UN OCHA(유엔인도주의조정국)가 식수 부족 문제를 지적할 정도였다. 에코피스아시아가 지난해 4월 현지에 갔을 때도 전력과 식수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섬이 많은 필리핀의 특성상 복구가 쉽지 않은 탓도 있다.

이들은 단체는 모두 3지역에서 빗물 활용 시설을 설치했다. 일로일로주 콘셉시온시티에서는 마카투나우 바랑가이 프로퍼와 바고다오 시티오 두 곳에 각각 43.8톤과 10.6톤 짜리 빗물 저장 시설을 설치했다. '바랑가이'는 우리로 치면 '읍·면'에 해당하고, '프로퍼'는 읍·면 소재지를, '시티오'는 '리'에 해당한다.

2013년 11월 필리핀을 강타한 슈퍼 태풍 '하이옌'으로인해 7천 여 명이 사망하고, 4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 슈퍼 태풍 하이옌 이동경로 2013년 11월 필리핀을 강타한 슈퍼 태풍 '하이옌'으로인해 7천 여 명이 사망하고, 4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 에코피스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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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 마닐라 케손시티에서는 바공실랑안 바칼 시티오에 6톤 규모의 시설을 설치했다. 이태일 처장은 해당 지역에 대해 "평소에도 마실 물 사정이 좋지 않았던 지역"이라 설명했다. 일로일로주 콘셉시온시에는 11개의 섬이 있는데, 광역상수도는 고작 12%만 보급됐고, 나머지는 각 섬 내의 간이상수도를 이용하고 있었다.

우물을 사용하고 싶어도 염분 높은 지하수 때문에 식수로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문제는 간이상수도로 사용되는 계곡물의 수질이 좋지 않아(현지 단체들에 따르면 COD 간이 측정 시 4등급 수질 상태로 나오는 등 식수로 적합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별도의 정수된 물을 사서 마시고 있었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돈 없는 서민들은 좋지 않은 간이상수도 물을 그냥 사용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태풍 하이옌이 들이닥쳐 그나마도 있는 물 공급시설이 망가져 버렸다. 큰 섬이라고 상황이 나은 건 아니었다. 메트로 마닐라 케손시티 바공실리안의 경우는 인근 지역에 광역쓰레기매립장이 있어 지하수가 오염됐다.

지역의 필요를 파악해 지원

더욱이 이곳은 빈민밀집지역으로서, '필리핀 재난의 수도'로 불릴 만큼 태풍과 홍수 피해가 일상적으로 벌이지는 곳이었다. 이태일 처장은 "태풍 이후에 그 지역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면서 "안 그래도 가난한데, 물도 없으니까 아이들도 물을 못 먹고 있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스테인레스 재질의 빗물 음용수 시설은 평상시에 사용되면서, 태풍 등 재난시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 적정기술로 만들어진 빗물 음용수 시설 스테인레스 재질의 빗물 음용수 시설은 평상시에 사용되면서, 태풍 등 재난시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 애코피스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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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상수도도 미치지 않고, 지하수도 활용할 수 없는 지역에서 식수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빗물이었다. 빗물은 WHO(세계보건기구)와 UNICEF(유엔아동기금) 등에서는 빗물을 가장 안전한 식수원으로 인정하고 있다. 에코피스아시아 등은 이런 관점에서 빗물 활용시설을 설치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 지역 주민의 의견 반영 ▲ 재난대응 시설 ▲ 적정기술 등이다.

몇 년 전 한국의 한 단체가 아프리카 어느 마을에 우물을 파줬다. 물이 부족해 여성들이 거의 매일같이 수킬로에서 많게는 수십 킬로미터씩 떨어진 곳에서 물을 떠와야 하는 상황인지라 분명 지역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정작 지역 여성들은 탐탁지 않게 받아 들였다고 한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일부 아프리카 여성들은 물을 뜨러 가는 시간이 (가부장적)남편으로부터 해방되면서 여성들끼리 단합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우물 사업 때문에 이런 시간이 없어지게 되니 당연히 마뜩찮게 받아 들였던 것이다. 이는 지역의 '필요'에 대한 사전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래서 에코피스아시아는 빗물 이용 시설을 설치할 때 현지 조사와 지역 주민들에 대한 의견 수렴도 함께 진행했다. 특히 필리핀은 바랑가이의 수장(체어퍼슨)을 선거를 통해 3년 임기로 선출하는데, 지역에서 바랑가이 체어맨의 결정권한이 크기 때문에 이들과의 의견 수렴이 매우 중요했다.

또한 사업의 오차를 줄이기 위해 1톤짜리 빗물 시범시설을 설치하고, 이에 대한 주민 포커스 인터뷰 등 만족도 조사도 함께 실시했다. 이러한 지역의 협력적 구조로 실제 공사를 할 때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이태일 처장의 말이다. 지역의 수요를 조사하는 것은 사업의 성과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재난대응형의 적정기술 도입

빗물 이용 시설이 재난대응형인가도 중요하다. 저장된 빗물은 평상시에도 사용할 수 있지만, 필리핀이 태풍 피해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기에 재난 시에도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재난이 발생하면 긴급구호기간이 설정되고, 이후 재난복구기간으로 설정된다. 태풍은 보통 비와 바람이 동반되기에 안전한 빗물 시설은 구호기간과 복구기간에도 주요하게 사용될 수 있다.

지난 2월 메트로 마닐라 케손시티의 빈민밀집지역에서 적정기술 빗물 음용시설 준공식이 열렸다.
▲ 빗물 음용시설 준공식 지난 2월 메트로 마닐라 케손시티의 빈민밀집지역에서 적정기술 빗물 음용시설 준공식이 열렸다.
ⓒ 에코피스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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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마을에서 빗물을 받을 수 있는 적당한 면적의 옥상이 있는 건물의 존재여부, 건물의 안정성 등을 살피는 검토 과정을 거쳐야 했다. 해당 지역에서는 적당한 크기의 구조물이 없어, 모두 학교시설에 설치했는데, 학교시설은 고지대여서 재난 시 주민들의 피난시설로도 활용된다는 점에서 유리하다.

또한 건기와 우기를 모두 고려한 규모를 설계했다. 이태일 처장은 "건기 때 못 쓰면 사람들이 빗물 시설을 믿지 못한다"면서 "따라서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지역의 강우패턴을 분석했다. 지역별 강우량 차이등과 건기와 우기 등 상황을 종합해 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거쳤고, 그 결과 건기, 우기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최적의 규모를 산출했다.

이러한 시설은 적정기술로 실시되어야 한다. 이태일 처장은 적정기술에 대해 누구나 상황에 따라 쉽게 만들어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필요한 자재를 현지에서 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라 설명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쉽게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돈을 많이 들지 않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이 적정기술이라는 것이다.

빗물 음용시설에서 한 아이가 페트병에 물을 담고 있다.
▲ 물 마시는 아이 빗물 음용시설에서 한 아이가 페트병에 물을 담고 있다.
ⓒ 에코피스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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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주민 의견 수렴과 재난대응형 모두가 적정기술 적용의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일로일로주는 주변에 공장 등 대기오염시설이 없기 때문에 별도의 정수시설 없이 스텐인레스 재질의 빗물 저장 시설을 설치했지만, 매트로 마닐라 캐손시티의 경우는 대기오염 때문에 태양광을 활용한 흡착식 활성탄 정화시설을 설치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스텐인레스 빗물 저장시설, 태양광 발전시설 및 활성탄 정화시설 모두 국내 기술로 개발된 적정기술이다. 유지관리와 평상시 빗물 활용을 위해 마을별로 '빗물관리위원회'를 구성됐다. 위원회는 주 단위와 월단위로 빗물받이 통 및 옥상 등을 청소하면서 유지 관리를 책임진다. 또한 3개월에 한 번씩 빗물통 전체를 비워서 청소를 실시한다.

빗물에 대한 인식 바꿔놔

빗물 시설 유지관리를 통해 공동체의 연대를 강화하는 또 다른 계기로도 활용될 수 있다. 마을의 빗물관리위원회는 빗물 사용의 우선권도 구분했다. 마카투나우 바랑가이에 설치된 빗물 시설은 939명의 마을 주민 모두가 사용할 수 있게 43.8톤 규모로 설치됐다. 하지만, 바코다오 시티오에는 마을주민 400여 명 중 250여 명이 쓸 수 있는 10.6톤이 설치됐다.

필리핀 빗물 음용시설 시범화사업을 총괄한 이태일 처장은 "적정기술을 통해 환경과 경제가 조화롭게 될 수 있다"며 적정기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 에코피스아시아 이태일 처장 필리핀 빗물 음용시설 시범화사업을 총괄한 이태일 처장은 "적정기술을 통해 환경과 경제가 조화롭게 될 수 있다"며 적정기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 이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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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큰 빗물 저장통을 설치할 정도로 크고 튼튼한 건물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이 지역 빗물관리위원회는 가난한 사람, 노약자 등에게 빗물을 우선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역이지만, 그 중에서도 사회적 약자를 먼저 배려하는 제도를 실시하는 것이다.

3곳의 빗물 음용수 시범 사업에 1억 6천만 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됐다. 공사는 지난해 5월부터 실시됐다. 섬 지역의 특성상 해상 운반이 많아 기상조건 등으로 여러 제약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시범 사업인 만큼 자제 구입에 상당한 어려움이 많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3곳의 시범 시설은 지난해 11월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후 2달 정도의 시범운영 기간을 거쳐 지난달에 준공했다. 그 기간 중 지역주민들에 대한 만족도 조사가 함께 진행됐다. 설문에 참여한 로이드 페르난데즈(28)씨는 "우리 아들하고 임신한 아내도 마시고 있다. 모두들 미네랄 워터 같다고 한다"고 평가했다. 또한 애드가 라플(42)씨는 "빗물을 마시면서 아직 위통이나 설사 같은 경험이 없다"면서 "맛이 달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빗물 음용수 시범 사업을 총괄한 이태일 처장은 "빗물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다"고 평가했다. 과거 일부 사업 지역에서는 빗물을 활용하려고 했지만, 유지관리가 안 돼 복통 등을 일으킨 사례 때문에 '빗물은 허드렛물'이란 인식이 있었다고 한다. 적정기술을 도입한 이번 사업을 통해 이러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또한 이 처장은 "적정기술은 환경과 경제를 만나게 하는 것"이라면서 "적정기술이 곧 환경운동"이라 강조했다. 개도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적정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곳이 많다는 것도 지적했다. 이 처장은 마지막으로 "적정기술을 통해 환경과 경제를 살릴 수 있는 그런 모델을 개발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blog.naver.com/ecocinema)에도 올립니다.



태그:#적정기술, #빗물, #필리핀, #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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