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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와 세찬 바람이 지나가니, 묵향이 있는 뜨락으로 가는 골목길 안에 개나리가 줄줄이 피어 반긴다. 이웃집 담 너머엔 산수유가 배시시 웃는다. 그리고 모란꽃 봉오리도 기대하라는 듯이 하루가 다르게 소담스럽게 통통해져 가고 있다.

단재 신채호를 추모하는 전국서예대전에 가로 70센티에서 세로 140센티의 큰 종이에 민체, 판본체, 궁체, 협서가 있는 용비어천가체 등 크고 작은 다양한 한글의 글씨체로 고시조, 김영랑시, 부부의 기도, 이해인님 시 등 다양한 내용을 작품으로 하여 오늘 마감을 하였다. 작게는 2년 많게는 15년을 내게 묵향을 나눔 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묵향의 꽃자리' 동아리 회원들이 마감을 하였다.

꽃자리라는 말은 구상시인의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평소에는 높은 품격을 가진 정신수양의 취미이지만, 작품을 하면서 본인의 몸뚱이보다 두 배 이상 큰 종이에 엎드려서 한 자 한 자 쓰는 것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서 때로는 고행이기도 하다.

하지만 맛본 사람은 안다. 그 엎드려서 하는 고행의 시간이 지나면 머리에 감도는 청량한 기운과 가슴 저 멀리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보람과 성취의 뿌듯함을... 알게 모르게 조금씩 마음의 뿌리가 깊어져서 세찬 바람도 오히려 끌어안게 되는 여유로운 기운을.

올해는 6번째의 개인전을 '묵향의 꽃자리' 동아리 회원분들과 함께 '동행'이라는 테마로 함께 개최할 예정이다.

주말에 딸아이와 공기가 좋은 산에 트레킹을 하고 나면 이틀은 잠잠하다가 다시 목이 간질간질하면서 마른 기침이 곧잘 나온다. 나을 만하면 다시 반복되는 기침 속에 직장 생활과 작가 생활을 병행하는 나를 안타까워 하며 도라지와 대추, 꿀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푹 고아 1.5리터의 병에 두 개 담아 오신 76세의 할머니가 있다.

'아니 연로하신 나이에 최근 백내장 수술도 받으셨는데 작품 준비를 하면서 언제 이것을 달여 오셨단 말인가?' 나는 너무 놀랐고 은근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내 안녕을 기원하는 그 마음에 감읍하며 쾌차하려고 소중히 먹기로 했다.

오늘 마감한 작품 중에 그 분의 작품도 있다. 언제나 자상하게 웃으며 마음 넉넉하게 웃으시며 주변을 챙겨가며 딸뻘인 내게도 깍듯이 하면서 겸손하게 공부하는 분. 그 분이 언제부터 혼자 사시는지를, 오늘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조심히 물어보았다. 어림짐작으로 환갑 때쯤이시겠지, 하고 혼자 생각하면서.

"가만있자... 그러니 언제부터인가 하면 35세 때 남편이 갑자기 병이 들어 그때부터 혼자 되었지요. 아이들 데리고 살아나가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아이들 모두 시집 장가 보내고 이제 좀 숨돌릴 만하고 붓을 잡는데, 백내장도 오고... 나으면 또 다른 데가 아프고 그러네요."

또 다른 80세의 어머니는 머리, 얼굴, 손의 피부를 비롯해 온 몸의 피부가 벗겨지고 아프시다. 추위가 물러간 요즈음에도 장갑을 끼고 다니신다. 그리고 가끔은 동아리가 모이는 날을 착각해서 못 오신다. 아파서 꼼짝도 하기 싫어 아침도 거르고 누워계신 그런 날은 40대, 50대의 동아리 회원들이 전화해보고 카풀해서 모셔오기도 한다.

장년층의 동아리 회원 분들의 작품 마감은 거듭 부탁을 해와도 웃으면서, 그러나 단호하게 나는 말한다. "이것도 학습이니 잘 되든 못 되든 직접하세요!" 그러나 80전후 이 두 분의 작품 마무리는 때는 조금이라도 옛스러운 멋이 나게끔 줄도 치고 낙관인도 쳐주었다.

내게 배운 문하생에게 해준 것이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수고를 많이 하신 어머니들에 대한 예의와 사랑의  마음으로... 이 마음은 특별한 것이 아닌 노인이 허리를 구부려 지팡이 없이 길을 걸어가면 마땅히 손을 잡아 천천히 걸어가는 당연한 마음이다.

피부가 벗겨진 그 손으로, 한 자 한 자 내가 지도하는 화선지의 선을 따라, 엎드려서 마치 김매는 할머니처럼 그렇게 글씨를 쓰셨다. 세월을 잊고 가슴의 응어리진 앙금도 붓 끝에 풀어 안개처럼 사라지게 하면서... 그리고 보람은 구름처럼 모여들게 하면서 글씨를 쓰셨을 것이다.

꽃자리라는 말을 동아리나 장소의 명칭으로 사용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꽃자리는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낸 어머니의 꽃자리인 것 같다.

세상에는 돌아보면 가장 가까운 곳에 그런 향기로운 꽃자리가 생각보다 많다. 그 두 분보다 멋진 작품을 장년층의 동아리 회원분들이 냈다. 하지만 나는 인고의 혹독한 세월을 묵묵히 외롭지만 향기롭게 살아낸 이 두 분 작품에 영광의 빛이 비추기를 소망한다.

묵향의 꽃자리 동아리 간판글씨
▲ 묵향의 꽃자리 묵향의 꽃자리 동아리 간판글씨
ⓒ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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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묵향의 꽃자리, #서예가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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