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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추모 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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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13주기 추도식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 몇 가지 투쟁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청계 노동자들은 조직을 정비 강화하고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 위한 투쟁으로 근로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활동을 했다. 강제 해산 당한 노동조합을 재건하기 위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현재의 조건에서 노조 재건을 성공할 것인가? 논의의 초점은 노동조합을 이전의 노동조합이 아닌 완전히 새롭게 결성하느냐, 아니면 강제 해산된 노조를 재건하는 형태로 하는 것이냐였다. 또 노동조합을 어떤 형태로 조직할 것인가? 현행 노동조합법에 의한 합법적인 노조로 할 것인가, 아니면 현행 노동조합법을 무시하고 결성하느냐 하는 문제들이었다.

현행 노동조합법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업별 노조만 허용하는 것으로 개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청계천 같은 영세 의류 제조 업체가 밀집해 있는 곳에서도 각 사업장 하나 하나마다 노조를 결성할 수밖에 없도록 됐다.

즉, 한 공장에 노동자 숫자가 10~20명 사이의 작은 규모의 사업장에 일일이 노조를 만들어 운영한다면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을 뿐 아니라 여러 개의 노조를 연합하는 연합 단체도 불가능하게 돼 있다.

그럼에도 노동조합은 어디까지나 대중 조직이기에 가능하면 합법적인 조직이 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각 공장 단위로 노조를 결성해서 연합 단체를 만들자는 주장이 있었다. 이와 달리 독재 정권에 의해 강제로 해산 당한 노동조합을 원상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노조를 재건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노조를 재건할 경우 현행 노동조합법 상으로는 불법 노조가 된다. 그러면 정부 당국이나 사용주들이 불법이라는 명분으로 탄압을 가해올 수 있다. 그 때 탄압에 대응할 수 있는 논리와 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법외 노조', 명분을 찾다

당국에서 불법이라는 명분으로 탄압하면 우리 쪽에서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해 불법이 아니고 정당하다는 것을 복잡하고 길게 설득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매우 불리하다. 대중들한테 우리의 정당성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단순하고 명쾌해야 한다.

많은 논란 끝에 후자의 의견으로 모이기는 했어도, 그 대응책이 마련되지 않아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던 차에 당시 '한국사회선교협의회'에서 발행한 '법외 노조란 무엇인가?'라는 소책자를 보고 힌트를 얻게 됐다.

즉 이들이 조직할 수 있는 노동조합은 법외 노조(法外勞組)였다. 법외 노조는 현행 노동조합법으로 보호를 받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불법 노조는 아닌 것이다. 이 논리에 힘 입어 법외 노조를 만들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당시로써는 법외 노조라는 개념 자체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청계 노동자들이 처음 시도한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노동조합을 새로 결성하는 것으로 하느냐 아니면 과거의 청계 피복 노조의 연장선상에서 재건하는 것으로 하느냐다. 많은 논의 끝에 청계 노조를 재건하는 것으로 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그 이유는 당시 정세와 관련이 있었다. 광주 민중을 학살하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그동안 철권 통치를 해왔다. 그러나 이 무렵 민주화 세력에 대한 유화 제스처를 취했다. 이를테면 해직교수들에 대해서는 복직, 제적 학생들에 대해서는 복학,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복권 등의 조치들이 내려졌다.

이 많은 복자(復字) 돌림의 유화 조치가 있었음에도 노동자에 대한 복직, 복권, 블랙리스트 철폐 등의 유화 조치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한 반발로 노동자도 그 복자 돌림을 한번 써보자고 해서 청계피복노동조합을 '복구(復舊)' 하기로 한 것이다. 중요한 방향은 결정 되었다. 목표를 향해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1984년 3월 27일, 그동안 활동했던 청계 노동자들이 경기 성남시에 소재한 수녀원 '만남의 집'에 모였다. '청계피복노동조합복구준비위원회'를 결성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참석자들은 이 수녀원을 그동안 자체 교육이 있을 때 여러 차례 이용했다. 이들은 교육 때와는 달리 조금은 긴장되고 설레는 마음으로 참석했다.

넓은 강당에서 형식을 갖추어 회의를 시작했다. '준비위원회' 명단에 올리기로 한 72명 중 10여 명은 참석하지 못했지만, 참석자들은 진지하게 토론을 하며 마침내 '청계피복노동조합복구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복구 준비 위원회'는 위원장 민종덕, 부위원장 황만호, 박계현, 간사 김영대 등을 뽑았다.

다음 날부터 복구 위원회 간부들은 거의 매일같이 모여서 토론하고, 교육 받고, 실무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들은 바쁘고 고단한 가운데서도 항상 즐겁고 희망에 차 있었다.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포악한 독재 권력에 맞서 싸워 자신들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조직을 만들겠다는 굳은 의지와 진한 동지애로 똘똘 뭉쳐 하나가 되어 복구 준비를 했다.

이들은 복구한 노동 조합이 입주할 사무실을 얻기 위해 청계천 주변을 다 뒤지다시피 했다. 준비 위원들이 갹출해서 마련한 돈이라 넉넉하지 않았다. 부족한 돈으로 조합원들이 저녁 늦게라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무실을 얻기 위해 애썼다. 평화시장 근처 부동산 사무실을 돌아다니면서 노조 사무실을 구하는 것을 정보 기관에서 알게 되면 복구 대회를 방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은밀히 구해야 했다.

발품을 많이 들인 결과 신당동 한양공고 맞은편에 위치한 5평짜리 사무실을 구입했다. 그야말로 손바닥 만한 사무실을 계약해놓고 준비 위원들은 마치 천하를 다 얻은 것처럼 행복해했다.

복구 대회 날짜를 4월 8일로 정하고 복구 대회를 열 장소를 물색했다. 복구 대회 장소는 청계 노동자들이 참석하기 쉽도록 청계천 상가와 거리가 가깝고, 대회 중에 경찰이 함부로 들이닥치지 못하는 장소여야 한다. 이러한 장소를 찼다가 결국 명동성당 사도 회관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서 그곳으로 결정하고 장소 사용 계약을 마쳤다. 이런 만반의 준비를 마친 복구 위원들은 이소선을 찾아갔다.

"어머니, 드디어 청계 피복 노조를 복구하게 되었습니다. 4월 8일 오후 3시 명동성당 안에 있는 사도회관에서 합니다."
"아이고, 다들 수고했다!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했는데 너그들이 노력해서 노동조합이 다시 살아난다니 참말로 고맙고 대견하다."
"다 전태일 동지의 뜻과 어머니의 살아오신 역정에 감동받고 또 격려에 힘 입어서 가능한 일이지요."

이소선은 청계 노조가 복구된다는 소식을 듣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청계 노조가 군홧발에 짓밟혀 강제 해산 당하자 자식 같은 노동조합이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하고 낙심했던 적도 있었는데, 죽은 것으로만 알았던 그 노동조합이 다시 살아온다니 꿈만 같았다. 없어진 노조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기적을 낳아 반갑고 기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을 것인가 하는 염려도 있었다.  

드디어 청계 노조 복구

드디어 1984년 4월 8일 오후 3시, 역사적인 청계피복노조복구대회가 열리는 시간이 다가왔다. 약 300여 명 가량의 조합원이 참석해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내빈도 문익환 목사를 비롯 재야 인사와 1970년대 민주 노조 출신 등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이소선은 전날 밤에 기도하다 꿈꾸기를 번갈아 가면서 하는 통에 잠을 자지 못해 약간 늦은 시간에 대회 장소에 도착했는데 예상보다 참석 인원이 많아 놀라고 흐뭇했다. 그런데 복구 대회 장소인 사도 회관은 대회 시작 이전에 문이 열렸다. 참석자들이 오는 대로 자리에 앉아야 하는데 3시가 다 되어도 문이 열리지 않아 문밖에서 조합원들이 문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 위원들은 당황했다. 어떻게 된 것인가를 성당 측에 알아봐도 책임 있는 성당 관계자는 보이지 않고 관리하는 사람만 문을 열어 줄 수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다. 분명히 장소 사용 계약을 했는데 이제 와서 문을 열어 줄 수 없다고 하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흥분한 조합원들은 "장소 사용 계약을 이행하라"고 구호를 외쳤다. 

이 모습을 보면서 이소선은 '그러면 그렇지 어디 쉬운 일이 있을 것이며 쉽게 얻어질 수가 없겠지, 앞으로 더 많은 어려움도 있겠지 그러나 포기해서는 안 되지...' 하면서 화장실을 찾았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을 기다리고 외쳐도 책임 있는 성당 관계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소란한 속에서 누군가 외쳤다.

"이제 도리가 없습니다. 문을 부수고라도 들어가서 대회를 치러야지 이대로 미룬다면 돌이킬 수 없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옳소! 문을 열어라."

환호와 박수 소리가 터졌다. 그러자 열혈 청년 조합원들이 문을 밀었다. 다행히 문은 견고하지 않아서 크게 부수지 않고도 열렸다. 문이 열리자 환호성이 울렸다. 이윽고 청계피복노동조합 복구대회가 시작됐다.

회순에 맞춰 내빈을 대표해서 문익환 목사의 격려사가 있었다. 이어 경과 보고, 임원 선출, 복구 선언문 낭독, 결의문 채택을 했다. 대회는 미리 준비한 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 이소선은 청계피복노조 고문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위원장 민종덕, 부위원장 황만호, 김영선, 사무장 김영대 등이 선출되었다.

이날 복구 선언문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그 무엇보다 꺾어도 꺾일 수 없고, 물러서려야 물러설 수 없으며, 자신의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 참여할 수밖에 없음을 각성한 평화시장 일대 우리 2만여 노동자의 무한한 저력이 우리의 투쟁을 끝없이 이어갈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기고 우리는 모든 것을 이룰 것이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전태일 선생 만세! 평화 시장 청계피복 노동조합 만세! 민주 민권의 승리·민주 노동 운동 만세!"

복구 대회 행사 자체는 간단했지만, 이 날을 위해 그 동안 3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온갖 탄압을 무릅쓰고 투쟁해온 것에 준비 위원들은 스스로 감격스러워 서로 얼싸 안고 울었다. 이소선 역시 함께 울며 이들을 한 사람씩 안아주며 격려했다. 이날 명동 성당 언덕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들은 눈부신 햇살에 저마다의 색깔을 더욱 진하게 내뿜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청계피복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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