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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을에 쌀 서 말 먹고 시집간 처녀가 없다' 했다. 고단하고 넉넉지 않은 섬 생활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추도 첫인상은 강렬했다. 모진 바람 보기 싫어 처마까지 쌓아올린 목숨 같은 돌담, 미끈거리는 강보리밥 같은 강담이 온 마을을 휘감았다.

추도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강보리밥 같은 강담이 추도를 휘감았다.
▲ 강밥 같은 추도마을 강담 추도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강보리밥 같은 강담이 추도를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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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 감각'이나 '향토적 서정'을 들먹이는 것은 섬사람들을 욕보이는 것처럼 들린다. 돌담은 싹쓸바람에 맞서는 섬사람의 몸부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강밥 같은 강담, 이게 추섬의 첫인상이다.

미꾸라지 섬, 추도(鰍島)

추도는 사도에 딸린 조그만 섬. 팔뚝만한 바다생선만 먹던 섬사람들에게 미꾸라지는 하찮은 존재다. 그래서 '쪼깐한' 추도를 미꾸라지 섬, 추도라 하였다. 취나물이 많아 '취도'라 불리다 추도가 됐다는 말도 있으나 왠지 미꾸라지 섬, 추도에 더 마음이 간다.

올망졸망 일곱 개 섬이 잇닿은 사도, 유독 추섬만 길이 없다. 그만큼 가기가 어렵다. 여객선으로 사도까지 간 뒤, 마을 배를 빌려 타고 가야 한다. 일 년에 몇 번 바닷길이 열리긴 하는데 영등달(음력2월)에 제일 넓게 열린다. 해마다 바람 신, 영등할매가 2월 초하룻날 바람을 일으키며 내려와 바닷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사도와 추도는 가깝고도 멀다. 일 년에 몇 번 바닷길이 열리는 것 말고는 닫혀있기 때문이다. 영들달 초하루가 되면 까무잡잡하게 보이는 바다가 길이 된다.
▲ 사도에서 본 추도마을 사도와 추도는 가깝고도 멀다. 일 년에 몇 번 바닷길이 열리는 것 말고는 닫혀있기 때문이다. 영들달 초하루가 되면 까무잡잡하게 보이는 바다가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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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200여 년 전이라 전해질뿐, 기록은 없다. 한때 12가구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할머니 한 분만 살고 있다. 할머니는 수줍음을 많이 탄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개 세 마리를 앞세우고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수줍음은 핑계고, 이것저것 묻는 사람들이 많아 '외로움'을 택했는지 모른다.

추도마을에 닿으면 개가 제일 먼저 반긴다. 수줍음 많은 할머니는 개를 앞세운 것이다.
▲ 추도마을 돌담과 개 추도마을에 닿으면 개가 제일 먼저 반긴다. 수줍음 많은 할머니는 개를 앞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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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섬은 공룡의 피난처요, 몸 비비며 살갑게 보낸 낙원이었다. 7000만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운명 같은 죽음, 죽는지도 모르고 발자국만 남기고 사라졌다. 사도와 추도, 낭도, 묵도에서 발견된 3800개 공룡발자국 화석 가운데 추도에만 1700여개가 있다.

미꾸라지 섬이 예전에는 공룡 섬이었던 셈이다. 하기야 일본이 대륙에 붙어있었던 아주 먼 얘기로 이 지역은 모두 호숫가 늪지대였으니 공룡 섬이란 말이 틀리긴 하지만 공룡이 살던 곳이 미꾸라지 섬이 되었으니 재미난 얘기 아닌가.

추도 세 갈래 길, 과거·현재·미래의 길

쪼끄마해도 추도는 셋으로 쪼개져 보인다. 차별침식 때문이다. 마음대로 이름을 붙여보았다. 왼쪽은 미래의 길, 용궁 가는 길이요, 가운데는 현재의 길로 마을길, 오른쪽은 과거의 길로 공룡이 걷던 공룡길이다. 

먼저 과거의 길, 공룡 길이다. 7000만 년 전에 만들어진 퇴적 층리와 수많은 공룡발자국, 물결자국(연흔)이 남아있다. 손으로 떼어내도 한 장 한 장 떼어질 듯 겹겹이 쌓인 퇴적층은 시간이 낳은 위대한 예술품.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우리는 억겁 안에 갇힌 찰나 같은 존재다. 퇴적층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깨닫는다. 

희거나 검거나 잿빛이거나 누른 바위가 시루떡처럼 번갈아가며 층을 이루었다. 움푹 파인 물웅덩이는 공룡발자국화석이다.
▲ 공룡발자국과 퇴적층 희거나 검거나 잿빛이거나 누른 바위가 시루떡처럼 번갈아가며 층을 이루었다. 움푹 파인 물웅덩이는 공룡발자국화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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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용궁으로 가는 미래의 길이다. 신이 도끼로 내리쳐 둘로 쪼개놓은 듯 두 개의 낭떠러지 사이로 길이 나있다. 마을 사람들이 그냥 '용궁으로 가는 길'로 부르고 있다. 추섬이 '용궁섬'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을사람들은 이 길 앞에서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빌고 삶이 고단하고 앞날이 보이지 않을 때 용신에게 답을 구하였을 그런 길이다. 과거의 길에서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이 길 앞에서 앞날에 대한 확신과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그래서 미래의 길이다.

낭떠러지 새로 용궁 가는 길이 나있다. 마을사람들이 그냥 이렇게 불렀다.
▲ 용궁 가는 길 낭떠러지 새로 용궁 가는 길이 나있다. 마을사람들이 그냥 이렇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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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 가는 길을 넘으면 용궁의 내궁, 전설을 품고 있는 적두암과 시루떡 같고 무지개떡 같은 퇴적층이 내궁의 기둥처럼 서있다.
▲ 용궁의 내궁 용궁 가는 길을 넘으면 용궁의 내궁, 전설을 품고 있는 적두암과 시루떡 같고 무지개떡 같은 퇴적층이 내궁의 기둥처럼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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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기 빛이 내리 쬐는 저 편 건너는 용신(龍神)이 산다는 용궁의 내궁(內宮)이다. 내궁 양쪽 시루떡 같은 퇴적층과 무지개떡 같은 돌무더기는 내궁의 기둥처럼 서있다. 용머리로 알려져 있는 붉은 적두암, 용궁으로 돌아오던 용이 천지개벽하여 미처 돌아오지 못하고 바위로 굳어버렸다는 믿거나 말거나한 얘기가 전한다. 신비감보다 경외감이 앞선다. 한 치의 죄라도 저질렀다면 납작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될 것 같은 그런 존재로 보인다.

한가운데 길은 사람의 길, 마을길이다. 마을길은 돌담사이로 난 외길, 가르맛길이다. 용신이 두려운 건가, 바람이 무서운 걸까, 마을길은 온통 돌담천지다. 처마까지 쌓아올린 돌담, 신한테 한수 배웠나. 판판한 구들장 돌에 두툼한 둥근 돌을 간간이 섞어 쌓았는데 그 모양새가 신이 빚은 퇴적층 못지않다.

신에게서 한수 배웠나 보다. 구들장 돌을 한 켜 한 켜 잘도 쌓았다
▲ 추도마을 돌담 신에게서 한수 배웠나 보다. 구들장 돌을 한 켜 한 켜 잘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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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담은 돌로만 쌓은 강담이다. 100년이 넘었다 들었다. 밑반찬 없이 그럭저럭 끼니를 때우던 강밥 같은 강담은 섬마을사람들 삶을 닮았다. 꽃다운 나이에 이웃 섬에서 시집와 한 번도 육지에 살아본 적 없는 추섬 할머니의 세월이 차곡차곡 쌓였다.

용케 살아남은 느릅나무가 홀로 남은 할머니 댁을 가리켰다. 성처럼 높게 쌓은 돌담집이다. 온갖 것을 싹 쓸어버린다는 싹쓸바람에 한번 크게 당하고 이제 바람이 지긋지긋한 게다. 재작년에 아랫집 단짝 할머니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홀로 이 미꾸라지 섬을 지키고 있다.

싹쓸바람이 지긋지긋한 게다. 바람이 더 이상 보기 싫어 처마까지 돌담을 올렸다
▲ 홀로 남은 할머니 댁 돌담집 싹쓸바람이 지긋지긋한 게다. 바람이 더 이상 보기 싫어 처마까지 돌담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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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겉으로 '그리 외롭지 안허요'라 하지만 왜 외롭지 않겠나. 자식 곁에 가지 않으려 강한 척하고 자식이 걱정할까봐 그러는 게다. 세상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 자식 놔두고 홀로 섬 지키면 세상이 자식욕 할까봐 그러는 거겠지. 이게 할머니를 버티게 하는 힘인지도 모른다. 살아계실 때, 내 어머니도 늘 '난 괜찮혀'라 말하곤 했다. 나는 이제야 그 속뜻을 알아차렸다. 자식만 괜찮으면 괜찮다는 의미라는 것을.

어쨌거나 개 세 마리가 할머니의 벗이 되고 있다. 개한테는 바람보다 무서운 게 도시 때 묻은 낯선 사람인 지, 졸졸 따라다니며 내내 짖어대었다. 개를 피할 겸 올라선 곳이 지붕과 닿은 손바닥만 한 밭. 파와 시금치, 마늘은 봄바람 타고 살랑거렸다. 보나마나 홀로 된 할머니의 밭인데 혼자 먹고도 남을 양이다. 나머지는 여수에 사는 아들 몫인 게지.

추도에는 할머니 한 분만 살고 있으니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니는 개도 할머니 개요, 밭도 할머니 밭이다. 노는 땅 많아도 농사지을 힘도 마음도 없다
▲ 추도마을 손바닥 밭 추도에는 할머니 한 분만 살고 있으니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니는 개도 할머니 개요, 밭도 할머니 밭이다. 노는 땅 많아도 농사지을 힘도 마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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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타고 조금 더 오르면 추도분교 터. 스러진 건물과 사람 키보다 큰 잡초들, 교문기둥이 아니었으면 학교인지 폐가인지 통 알 수 없었을 것이다. 1967년 개교하여 1984년 폐교할 때 까지 20년 채 못 버티고 말았다. 지금은 여수사람 소유로 되었다.

반쯤 스러져가는 학교 시멘트건물 벽에는 '김일성을 처형하자', '나라○○ 국어○○' 문구가 쓰여 있다. 희미하게 보였다. 학교가 지어질 때 쓴 글씨 같은데 이 시기에 육지마을 집집마다 달고 있던 붉은 글씨, '반공방첩'은 이 문구에 비하면 양반이다.

20년도 채 못 버티고 문을 닫았다. 교문기둥은 폐사지 유물처럼 옛 추도를 추억하게 한다
▲ 추도분교 교문 20년도 채 못 버티고 문을 닫았다. 교문기둥은 폐사지 유물처럼 옛 추도를 추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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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들어가는 말은 '사랑' 같긴 한데 읽을 수가 없다. '나라○○ 국어○○'는 그렇다 치더라도 코흘리개한테 이런 문구가 어울리기나 한건 지. 구호를 지울 생각도, 지울 사람도 없다. 세월이 조금씩 지워가고 있다.

몇 시간 만에 그래도 정이 들었는지 이제 개도 짖지 않는다. 할머니 댁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멀뚱거리며 쳐다보고 있는데 이제 헤어질 때가 된 것을 아는 모양이다. 정말 떠날 때가 되었다. 멀리 통통거리며 나를 데리러 배가 오고 있었다. 


태그:#여수추도, #추도마을돌담, #용궁섬, #추도분교, #여수사도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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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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