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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를 써야겠어요.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

사표를 쓰고 싶다고 했었지. 같이 일하는 상사도 마음에 안 들고, 아이는 아직 어린데 일은 너무 늦게 끝난다고. 게다가 아이를 봐주는 친정엄마마저 아프셔서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다고. 신랑에게 물었더니 시원찮은 표정으로 그만두라고 했다며.

그것마저 서운하고 왜 모든 고민을 혼자 떠안아야 하냐고. 그냥 확 사표를 내버리고 싶다고 했었어. 다른 사람들도 신랑 잘 벌고, 대출없는 집도 있으니 그냥 사표를 내라고 했다고 했지.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나에게 물어왔어. 사표를 써도 되겠냐고. 3개월 전에 말이야.

"못 버티겠다" 사표 쓰고 싶다는 후배에게

이런 사표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런 사표도 있을 수 있겠지만...
ⓒ 라온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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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때 너의 말을 듣고 뭐라고 충고를 해야할지 사실 몰랐어. 사람의 사정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라서 남들에게는 멋져 보이는 직장과 돈 잘 버는 남편이 있어도 당장 코앞의 내 문제가 가장 크고 불행하게 보이는 법이니까. 누구에게나 삶의 무게는 다 무겁기 마련이거든.

나는 그때 너에게 당장 사표를 쓰지 말라고 했지. 딱 100일만 더 버텨보라고. 100일 후에도 네 맘이 변함없이 사표에 머물러 있다면 가차없이 사표를 쓰라고 말이야. 내가 그런 말을 했더니 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충고를 하냐며 볼멘소리를 했어. 100일을 어떻게 버티냐고. 지금 너무 힘들다고.

사표를 쓰라고 말하는 이도, 사표를 쓰지 말라고 말하는 이도 네 인생에서는 어떻게 보면 한 발짝 물러서 있는 타인일 뿐이야. 네 선택의 결정과 권한은 오로지 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 네 상황을 아무리 남에게 세세하게 이야기 한들, 그것은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어. 너라는 필터링을 거쳐서 나온 사실들은 이미 팩트가 아니기 때문이지. 결론은 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생각했지.

우리는 한 엄마이기 이전에 직업을 가진 한 사람의 직장인이이야. 직업이라는 것, 그리고 10년 동안 한 분야에 몸 담았다는 것은 이제야 전문성을 인정받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야하는 때라는 이야기기도 해. 하지만 현실은 그다지 녹록지 않아. 일 자체만 놓고 보면 싫지 않은데, 주변 여건이 나를 힘들게 할 때가 더 많지.

상사도 힘들게 하고, 부하는 글자 하나만 바꿔서 말 그대로 '부아'를 치밀게 하고, 고객도 힘들게 하고. <미생>에서 한석률이 말하지. 회사생활이 왜 힘든지 알았다고. 바로 꼴보기 싫은 사람을 매일 봐야 한다는 거. 거기에 내가 하나 덧붙이자면 우리는 돌봐야 할 아이도 있다는 거. 그래서 남들보다 두 배로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무게가 너무 커서 도망치고만 싶어지지.

엄마와 직장인 사이의 경계에 있는 우리는 여건이 된다면 언제라도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기도 하지. 아이를 핑계로 말이야. 물론 아이 때문에 혹은 남편 내조나 집안 일이 더 적성에 맞는다면 그건 핑계가 아니지. 그냥 경력 이동인 거지. 전업주부도 제대로 하자면 정말 힘든 직업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찾고 훌륭하게 해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요즘 살림과 요리 블로거들 보면 기 팍팍 죽는 경우도 많아. 어쩌면 다들 그렇게 훌륭한지. 생각하건대 그들은 다른 일을 했어도 잘 해냈을 사람들일 거야.

그때 너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친정엄마가 아파서 아이 때문에 사표를 쓰겠다는 너보다 상사가 마음에 안 들고 매일 같이 야근을 해야 하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하는 너의 모습이 더 크게 보였어. 그런데 말이야. 그 상사 때문에 네가 10년 넘게 한 일을 그만 둔다는 건 좀 아까웠어.

엄마이기 전에 직장인, 그걸 포기하는 것은...

네 이야기에서 상사와 하는 프로젝트가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들으니, 그게 지나면 넌 그냥 견딜 것 같았지. 그래서 100일을 견뎌보라고 권한 거야. 그리서 넌 100일이라는 시간 동안 친정엄마 집으로 아이돌보미를 불렀지. 아이돌보미도 고용하고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으면서 비용은 더 들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해결 방법이었던 것 같아.​

사표를 꿈꾸지 않는 직장인이 있을까? 어딘가로 떠나고 싶고, 쉬고 싶고, 혹은 이직을 하고 싶어서 사표를 꿈꾸지. 남자들의 경우 오로지 가정경제를 책임진다는 의무감 때문에 사표를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어. 만약 자신의 꿈을 위해서, 혹은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고자 사표를 썼다면 자신밖에 모르고 책임감 없다는 사회적인 비난을 면치 못할 거야.

직장맘은 어떻게 보면 직장생활에서 여러가지 불합리한 면을 당하긴 하지만, 사표를 썼을 때 적어도 비난을 받지는 않아. 그냥 육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경력이 단절된다는 동정을 더 많이 받지. 솔직히 그런 상황은 여성들이 쉽게 사표를 쓰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고.

나는 그때 너에게 당장 사표를 쓰지 말라고 했지. 딱 100일만 더 버텨보라고.
 나는 그때 너에게 당장 사표를 쓰지 말라고 했지. 딱 100일만 더 버텨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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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나도 매일 사표 쓰고 싶어. 하지만 하루를 버티고, 이틀을 버티고, 그러다가 일주일, 한 달이 가더라고. 또 그러다가 1년이 가면 또 하나의 이력이 쌓이더라. 그런 나의 경험과 이력을 또 어느 프로젝트에서인가는 사고 싶어하고. 나는 팔리고. 팔린다는 표현이 좀 그렇지만, 어딘가에서 나를 알아주고 나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인거지. 경력이란 것, 시간이란 것... 알게 모르게 쌓이는 것이지 매일매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더라고.

어느 날, 너는 나에게 100일이 지났다면서 물어왔어.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그래서 내가  되물었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해답은 누구도 제시해줄 수 없다고. 설령 점쟁이한테 간다한들 회사를 그만두라고는 절대로 이야기 하지 않을 거라고. 선택은 너의 몫이라고. ​너는 조용히 커피만 마셨지. 그리곤 아직까지 회사를 다니고 있어.

그것으로 너의 선택은 결론이 난 것일까? 아마 지금도 사표를 꿈꾸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진짜로 사표를 쓸 때는 네가 육아에만 전념하는 것이 일에서 얻는 성취보다 더 좋을 것 같은지,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욕심을 감추고 사표를 쓰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자신을 들여다 보고 되새김질 한 후에 결정했으면 좋겠어.

아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직업이란, 우리 인생에서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야. 천천히 생각하고 사표를 내도 늦지 않아. 고민 후 너의 선택이 어떻든간에 난 무조건 찬성이야. 화이팅~!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이혜선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틀, 두가지 삶>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워킹맘, #직장맘, #사표,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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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하면서 프리랜서로 글쓰는 작가. 하루를 이틀처럼 살아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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