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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휴양지 인근 바닷가의 풍경, 관광객을 위한 배들이 쉴 새없이 오고 가고 있다.
▲ 필리핀 세부 바닷가 세부 휴양지 인근 바닷가의 풍경, 관광객을 위한 배들이 쉴 새없이 오고 가고 있다.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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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인생에서 여행은 어떤 의미일까? 귀농이라는 새로운 삶이 시작될 무렵, 내 머리에서 해외 여행이라는 단어는 소멸됐다.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특별한 의미를 찾을만한 가치나 요인도 없었다. 그만큼 귀농의 삶은 내 의식 안에 가득 찬 새로운 세계였다.

어머니의 팔순을 맞아 떠난 필리핀 효도 여행 

귀농 후 8년 되는 해에 처음으로 홍콩에 다녀왔다. 귀농한 농부에게 일과 관련해 해외 나갈 기회가 주어지기도 어렵거니와 그 실상을 깨닫고 나서는 내가 벌어서 내가 다녀오는 게 가장 낫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게다가 비행기에서 비롯되는 대기오염의 실태, 환율에 따른 경제적 격차를 이용(?)한 부의 과시 등등 '공정한 여행은 없다'라는 어느 신문의 글을 읽고 나서는 더욱 해외 여행에 대해 신중한 생각을 갖게 됐다.

홍콩의 상징이라는 야경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 대한민국도 서울, 부산, 광안리 등의 야경이 홍콩 못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 지난해 봄 홍콩에서 홍콩의 상징이라는 야경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 대한민국도 서울, 부산, 광안리 등의 야경이 홍콩 못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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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로 다녀온 가족 여행이었다. 홍콩에 있을 때 한 번은 꼭 다녀 가라는 오랜 친구의 권유와 숙식을 다 책임지겠다는 우정 어린 제안에 저가 비행기 표만 끊고 떠난 여행이었다.

귀농의 경이로움이 이제는 조금씩 시들어가는 탓일까. 가끔씩 조금이라도 더 젊을 때 더 많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꿈틀대고 있다. 그러던 차에 지난 3월 중순 경, 내년 팔순을 앞둔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시고 누이 둘과 아내, 막내 딸 등 일곱 명이 필리핀으로 효도 여행을 다녀오게 됐다.

부모님과 누이들의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매제의 효심 어린 제안으로 전격 이뤄진 효도 여행은 아들인 나로서는 여러모로 결정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3월은 본격적인 농사철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을 낼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시골에서 5일 동안 집을 비운다는 것과, 가게 되면 아내와 나, 막내딸 셋씩이나 되는 여행 경비에 대한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또 하나, 이미 정해진 여행지인 필리핀 세부라는 곳에 대한 개인적 거부감 때문이었다.

세부 호텔에서 해질 무렵 야자수 나무가 풍차처럼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이국의 열대 야자수 세부 호텔에서 해질 무렵 야자수 나무가 풍차처럼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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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이 이미 한번 다녀왔다는 세부는 전형적인 휴양지 코스로 노약한 부모님을 위한 일정이었다. 걷기 좋아하고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탐방을 선호하는 나에겐 비싼 돈 내고 결코 갈 수없는 일정이었으나 효도 여행이라는 주제 앞에 그냥 순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올해 84세인 아버지를 보더라도 이렇게 부모님을 모시고 나가는 해외 여행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농사, 비용 등등을 다 접고 일등 보호자로 함께 하기로 했다. 3박 5일의 여행은 전날 상주에서 서울로 이동, 아침 8시 비행기를 타기 위한 준비로 새벽 3시부터 시작됐다. 설친 잠 때문에 피로한 몸을 실은 필리핀 국적기는 4시간 반을 날아 우리 식구들을 동남아 필리핀의 뜨거운 섬에 내려놨다.

관광 휴양지로 유명한 세부의 호텔 경내는 그야말로 휴양을 즐기는 외국인, 특히 한국인이 90%를 차지하는 것 같았다. 가이드는 첫날부터 호텔을 벗어난 지역에서의 사고에 대해서는 철저히 개인의 책임이라며 엄포를 주었다. 버스 차창으로 보이는 호텔 밖의 세상은 그야말로 가난으로 그늘진 삶의 현장이었다.

올해 84세이신 아버지와 79세 어머니가 호텔 부페에서 아침 식사를 하시는 모습. 술과 담배를 원래 안하시는 아버지는 남달리 건강하셨으나 근래들어 체력이 많이 떨어지신 듯 했다.
▲ 효도여행 부모님 올해 84세이신 아버지와 79세 어머니가 호텔 부페에서 아침 식사를 하시는 모습. 술과 담배를 원래 안하시는 아버지는 남달리 건강하셨으나 근래들어 체력이 많이 떨어지신 듯 했다.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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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질서한 거리 교통, 비위생적이고 낡은 주택 환경, 곳곳에 버려진 쓰레기들, 관광객을 향한 어리 아이들의 물건 팔기 경쟁, 같은 하늘 아래 호텔 안의 세상은 수영장과 온갖 휴양 시설이 즐비한 천국(?)이고, 한 걸음만 나서면 펼쳐지는 바깥을 지옥(?)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밤에 혼자라도 거리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행여 부모님께 걱정 끼치는 불효를 저지를까 효도 여행의 질서에 따르기로 했다. 호텔 수영장에서 딸 아이는 물 만난 고기처럼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놀기에 정신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몇 번 물속에서 허우적대다 사진에서나 봤던 비치 의자에 누워 봤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 맑은 공기, 가끔 불어오는 바닷가의 산들 바람, 의자의 안락함, 살살 밀려오는 부드러운 잠.

'아~ 이 맛에 사람들이 이런 곳엘 오는구나'싶은 생각이 들었다. 산골의 농부가 어느 날 갑자기 동남아 휴양지에서 이런 호사를 즐기는 현실이 꿈같기도 하면서 '여행이라는 것이 도대체 흘러가는 인생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물었다.

'코미디'같았던 여행사의 상술

여행사를 통한 상품에는 곳곳에 여행사의 상술이 섞여있어 기분을 불편하게 했다. 계약에 포함된 일정으로 알았던 다이빙 체험은 수영장 연습까지는 무료인데, 실제 바닷 속으로 들어가는 체험은 유료였다. 일종의 미끼였던 것이다. 동남아 여행이 저가이다 보니 다 그런 것이라며 억지 이해를 구하는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둘째 날 '선상 디너'는 단어에 속은 코미디였다. 제법 큰 배 안에서 호화로운 만찬을 상상했던 선상 디너. 우리가 먹어야 했던 것은 중소형 어선 정도의 선상에서 고기 튀김과 잡채 정도의 가장 저급한 식사 수준이었다. 게다가 튀김은 얼마나 오래돼 질긴지. 대부분의 관광객이 입만 대곤 그대로 남길 정도였다. 말은 없어도 식사에 대한 불편함을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나마 노을 지는 푸른 바닷가 선상에서 열린 생음악 무대 공연이 불쾌감을 상쇄해줬다.

깊고 푸른 바다를 보고 있으니 문득 떠오르는 세월호의 어린 학생들 때문에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들어야 했다. 그 아이들도 이렇게 바다를 보고 즐거워 하다가 참사를 당했을 텐데...  살아 있는 이들은 이렇게 한 끼 식사로 기분이 오락가락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3박 5일의 일정은 순식간에 흘러갔고 마지막 날 그나마 산티뇨 성당과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이끌고 섬을 정복하려는 마젤란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필리핀의 영웅 라푸라푸 추장의 기념 공원을 둘러보면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여행사의 상흔은 마지막 날까지 우리를 피로하게 만들었다. 밤 12시 반 비행기를 타야 하는 상황에서 모든 일정이 7시쯤 종료되니 5시간 이상을 공항에서 보내지 않으려면 2시간 반에 160불짜리 고가의 스파 마사지를 선택하라는 제안을 첫째 날
듣게 됐다.

필리핀의 영웅 라푸라푸 추장 동상 앞에서 효도여행 가족이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5백년 식민지배의 아픈 역사속에서 그나마 라푸라푸 추장이 필리핀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필리핀의 영웅 라푸라푸 추장 동상 앞에서 효도여행 가족이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5백년 식민지배의 아픈 역사속에서 그나마 라푸라푸 추장이 필리핀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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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둘째 날에 두 시간짜리 마사지를 옵션으로 받은 상태에서 또 더 비싼 맛사지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장시간의 비행기 대기 시간을 악용한 상술로밖에 보이지 않아 가족 회의 끝에 거부하기로 했다. 신기(?)한 것은 다른 관광객 대부분이 고가의 마사지를 또 받는다는 것이었다. 모님만이라도 받으시라고 권했지만, 이미 가격을 알아버린 부모님은 그런 사치를 또 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한밤 중에 비행기는 다시 바다를 건너 어슴푸레 새벽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돌아오자마자 내 눈에 처음 들어 온 풍경은 인천 공항 공식 주차 대행과 사설 주차 대행 간의 살벌한 경쟁이었다. 카메라까지 들고 다니며 '사설 대행은 불법이고 차량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공식 대행, '문제 될 게 없는 데 손님 뺏기지 않으려고 저런다'는 사설 대행 간의 경쟁은 여독조차 풀리지 않은 여행객의 기분을 더욱 서글프게 만들었다.

늘 개방되어 있는 성 산티뇨 성당의 내부 모습, 현지인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정면의 십자가 예수상이 두드러져 보였다.
▲ 성 산티뇨 성당 늘 개방되어 있는 성 산티뇨 성당의 내부 모습, 현지인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정면의 십자가 예수상이 두드러져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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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과 미국, 일본의 식민 지배를 500년 가까이 받은 불행한 나라 필리핀, 2차 대전 후 풍부한 천연 자원과 노동력으로 한 때 아시아 경제 2위 국가로 부상한 필리핀이 지금은 완제품 하나 제대로 생산해내지 못하는 후진 국가로 전락한 데는 마르코스 20년 독재의 부정부패가 치명적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잦은 외세의 침략, 일제의 36년 식민 지배와 군사 독재 30년을 겪은 대한민국의 미래가 필리핀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든 '심각한' 효도 여행이었다.


태그:#필리핀, #효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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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을 존경하고 깨어있는 농부가 되려고 노력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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