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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제주도를 찾았다. 나는 고향에 내려갈 때면 매번 혼자서 역사탐방을 다니곤 한다. 태어나서 고등학교까지 20년 가까이 살았다지만, 내 고향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떠나온데 아쉬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천금과 같은 14~19살까지의 시간을 고입과 대입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지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고 나서야, 그것도 '취업'이라는 목숨을 건 사투에서 동떨어진 예술계통의 대학을 가서야(결국 뒤늦게 취업의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지만), 자연 속에서 나의 예술성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나서야, 고향을 둘러보고자 했다. 그리고 2014년 12월 올해의 겨울, 내가 둘러본 나의 고향풍경은 이러했다. - 기자 말

지난해 12월 21일, 나는 제주시 제주공항에서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있는 '알뜨르 비행장'까지, 약 85km에 해당하는 도로를 취한 채 주행했다. 그것도 초보운전자의 취중운전이었다. 천혜 자연 제주도의 풍경을 들입다 부어라 마시며 운전하고 왔다.

매순간 감탄사가 터져 나오니, 제대로 된 운전이 가당키야 하겠는가.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고향 땅이지만, 그 아름다운 풍광은 보면 볼수록 감동적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땅이 '다크투어리즘'의 최적지로 꼽힌다. 어찌된 일일까(다크투어리즘 : 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을 일컫는 말이다_두산백과).

양배추 밭 사이로 듬성듬성 입을 벌리고 있는 격납고. 그리고 멀리 먹구름 사이로 산방산이 보인다.
▲ 알뜨르 비행장의 일본군 폭격기 격납고 양배추 밭 사이로 듬성듬성 입을 벌리고 있는 격납고. 그리고 멀리 먹구름 사이로 산방산이 보인다.
ⓒ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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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주행실력으로 엉기적엉기적 바퀴를 굴려 겨우 도착한 그곳. 차에서 내리자마자 보롬('바람'의 제주방언)이 세차게 불어재낀다. 거의 바람을 헤치다시피 걸으며 걸어간 드넓은 평지에는 양배추 밭이 펼쳐져 있다. 그 사이사이에는 흉물스러운 구조물들이 곳곳에 '아악'하고 입을 벌리고 있다. 흡사 쩍 벌린 아귀의 입모습을 닮았다. 크기로 보아 전투기 한 대가 들어설 정도의 크기이다. 그 개수가 19개에 달한다. 이곳은 어떤 용도로 쓰였던 장소일까.

이곳의 지명 이름은 '알뜨르 비행장'이다. '아래 벌판'이라는 뜻을 지닌 예쁜 이름이지만, 그 이름과는 상이한 역사적 의미를 가졌다. 현존하는 대표적인 일제 군사시설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상흔과 탐욕이 서려있는 곳 치고는 '알뜨르' 너무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알뜨르는 제로센의 도양폭격기지

'알뜨르 비행장'은 일본이 1920년대부터 군사시설을 짓기 시작하여, 1930년대 중반에 준공했다. 1937년 7월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제주도 이곳을 도양폭격기지(본국에 있는 기지를 발진한 폭격기가 대양 건너에 있는 목표를 폭격하는 것) 삼아 36회에 걸쳐 폭격기를 출격시켰다.

일본 본토에서 날아온 폭격기는 이곳 알뜨르 비행장에서 연료를 공급받고 다시 중국 난징까지 날아가 약 300t 가량의 폭탄을 난징에 투하했다. 30만 명의 무고한 생명이 무참히 학살된 이곳은 난징대학살의 '물질적 원인'이 돼버렸다. '알뜨르 비행장'은 그렇게 서글프고 끔찍한 역사의 가면을 버겁게 쓰고 있었다.

이 작품은 작가 박경훈과 강문석이 일제의 태평양전쟁기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전투기인 제로센을 실물크기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2010년 <경술국치 100년 기획 박경훈 개인전 ‘알뜨르에서 아시아를 보다’>의 출품작 중 하나다. 전시 당시의 작품제목은 <애국기매국기>였다.
▲ 알뜨르의 제로센 이 작품은 작가 박경훈과 강문석이 일제의 태평양전쟁기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전투기인 제로센을 실물크기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2010년 <경술국치 100년 기획 박경훈 개인전 ‘알뜨르에서 아시아를 보다’>의 출품작 중 하나다. 전시 당시의 작품제목은 <애국기매국기>였다.
ⓒ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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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곳에만 총 20개의 격납고가 건설되었다고 한다. 이 중에 19개는 현재 거의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갖추고 있고, 1개는 반파되어 형체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19개의 격납고 중에 10개는 등록문화재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알뜨르에서 난징을 보다'

2014년 12월 15일 이곳 알뜨르비행장 벌판에서 소담하게 피었던 행사가 하나 있었다. 난징대학살 77주기를 추념하고, 제주가 비무장 평화의 섬이 돼야 하는 이유를 알아보는 자리, '알뜨르에서 난징을 보다' 비무장 평화의 섬 선언대회 6차 심포지엄이다.

이날 행사에는 세계각지의 평화활동가들이 참여했는데, 국제평화 활동가 에밀리왕과 일본 서승 리츠메이칸대학 교수가 참여했고, 중국 인민일보의 만우 기자도 참석하여 행사 전 과정을 취재했다고 한다. 동아시아 긴장관계가 점차 고조되는 가운데 이런 학계와 시민사회에서의 연대·교류활동은 그 의미가 크다. 각 국가 군·정치집단의 이득관계를 떠나, 보다 포괄적인 평화문화를 교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1부 행사에서는 비행기 격납고 앞에서 난징대학살 희생자를 추모하는 추모식이 열렸다. 이어지는 2부 행사에서는 근처 대정중앙농협 세미나실에서 조성윤 제주대학교 사회학 교수를 비롯해 서승교수, 에밀리왕, 박찬식 역사학자의 발표와 질의응답이 진행되었다.

이날, 마지막 발표에 나선 박찬식 역사학자는 알뜨르 비행장에 해군기지에 이은 공군기지가 들어설 여지가 크다고 언급하며, 알뜨르 비행장은 시민이 되찾아야 하는 서글픈 땅이요, 주민자결 등 대안운동 준비를 서서히 시민사회에서부터 해야만 한다고 호소하듯 주장했다.

알뜨르 비행장을 둘러싼 논의

알뜨르비행장은 일제시대 도양폭격기지 외에도 패전이 짙어져 가는 일제 말기에는 가미카제 전투기를 보호하고 숨기기 위한 격납고로 사용됐다. 광복 후에는 국방부가 이를 인가받아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다.

현재 이곳은 국방부의 허락을 받고 민간인들에 의해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주변에는 격납고 이외에도 일제가 사용했던 지하터널, 무기창고, 섯알오름 동굴진지, 고사포 진지, 해안동굴과 4·3때의 학살터, 백조일손지의묘, 한국전쟁 당시의 육군제1훈련소의 흔적 등이 남아 있다. 근현대사에서 역사적 중요성을 지녔다.

송악산 일대의 해안절벽에는 이처럼 일제말기에 초계함을 숨겨두었던 동굴들이 뚫려 있다.
▲ 해안동굴진지 송악산 일대의 해안절벽에는 이처럼 일제말기에 초계함을 숨겨두었던 동굴들이 뚫려 있다.
ⓒ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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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이 지역 일대를 전쟁 유적지로 관광자원화 시켜야한다는 의견이 거론되어왔다. 하지만 이를 가시화하는 과정에서 '공군 전략기지(남부탐색구조부대) 건설' 파문이 문제가 되었다. 해군기지에 이어 공군기지까지 들어선다면 이곳을 중심으로 제주도가 군사적 요충지화가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도 제주도는 일제 군사시설들을 등록문화재 신청과 함께 '제주평화대공원' 조성사업을 계획했다. 하지만 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알뜨르비행장부지를 국방부로부터 양여 받아야한다. 양여 받기 위해서는 탐색구조비행전대가 들어설 수 있는 대체부지를 내놓아야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은 모양새다. 결국 현재까지 국방부는 요지부동 부지를 양여하지 않고 있다.

"이곳에 공군기지를 세워야 한다는 국방부의 주장은 이렇다. 북한의 전쟁 도발 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기 위하여 서해상에서 한·미 연합군의 해상작전을 방해하고 접근을 차단할 경우를 대비해 전략공군기지를 만들어야 한다." - 정욱식의 책 <강정마을 해군기지의 가짜안보> p103~104 참고.

결국 평화대공원사업이 유야무야되어가는 가운데 서귀포시는 2018년까지 총사업비 80억 원을 투입하여 '다크투어리즘'을 추진한다고 2014년 12월 28일에 밝혔다.

국방력을 더욱 견고히 해야만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는 국방부 차원의 시선과 전쟁억제정책은 '평화연대문화'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시민사회의 가치와 서로 어긋나는 분위기이다.

한국·중국 대 일본은 과거사를 놓고 갈등이 고조되는 양상이다. 또, 이어도를 둘러싼 방공식별구역 갈등도 여전하다. 한·미·일 군사협력체를 이용하여 서서히 중국을 압박하고자 하는 미국, 최근에는 사드 배치문제까지. 강대국들에 의해 갈팡질팡하는 한국의 모습 속에서 작고 평화로운 섬 제주도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특별자치행정구역, 세계평화의 섬이라는 제주도는 이러한 주변 국가들의 패권싸움과 남북분단체제 속에서 평화를 지켜나갈 수 있을까.

전쟁억제를 위한 군사력 증진정책은 갈등을 잠재우기 위함도 있지만 전쟁의 잠재력을 키우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억제정책만으로는 전쟁의 씨앗을 온전히 잠재울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런 위험을 마냥 떠안고 있는 우리 모습을 통해 인간의 본성 자체에 '전쟁'이 잠재되어 있지 않나 하는 의심도 해 본다.

전쟁과 평화는 그 사회의 '문화'와 '구조'에 의해서...

한겨레 새해기획 특별대담에서 요한 갈퉁의 사진.
▲ 요한갈퉁 한겨레 새해기획 특별대담에서 요한 갈퉁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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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벽두 1월 2일자 <한겨레>에서 내놓았던 특별한 대담이 있었다. 2014년 12월 중순에 '연세대 박명림 교수'와 현대 평화학의 창시자이자 세계적인 석학 '요한 갈퉁'이 이메일을 통해 주고받은 대담이다.

이 대담에서 "막대한 비극을 초래하는 전쟁을 인간들은 왜 그렇게 자주 벌이는가?"라는 박명림 교수의 의문에 갈퉁은, 전쟁과 폭력의 원인을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인간의 내적 본성보다는 '구조'와 '문화'에 의해 설명된다고 했다. 이어서 그는 더 '협력적인 구조'와 '평화의 문화'를 만들면 북유럽의 노르딕 국가들이나 유럽연합(EU) 국가들, 아세안 국가들처럼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했다.

협력적인 관계와 평화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은 국가의 몫이기도 하지만, 시민사회와 학계의 의식과 노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를 키워 공통의 비전을 제시하고, 강대국들의 욕망을 잠재울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사드배치 문제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본다. 우리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피력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한다. 그럴 수 있을 때, 우리의 주권을 지키고 한반도와 각자의 인생이 평화로울 수 있을 것이며, 제주 또한 진정한 평화의 섬으로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평화의 섬 제주가 두 번 다시 붉은 눈물을 흘릴 일이 없었으면 하는 애달픈 바람을 가져본다.

덧붙이는 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는 알뜨르비행장 외에도 대표적 유적지로 제주4.3사건 유적지인 백조일손지의 묘가 있다. (참고기사:http://omn.kr/b7nw)



태그:#알뜨르비행장, #난징학살, #전쟁과 평화, #다크투어리즘,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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