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드맨> 한 장면.

영화 <버드맨> 한 장면. ⓒ 영화 <버드맨>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이 제87회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상당한 기록인데 한국의 누적관객은 개봉 2주차에 20만이 되지 않는다. 하기야 영화제에서 상 받았다고 해서 대중이 환호작약하지는 않는다.

<버드맨>은 대중에게 조금 어렵고 버거운 영화다. 영화에는 분열된 자의식과 허다한 내적 독백, 연극과 영화의 관계, 일상과 환상의 부조화, 부재한 자아의 실존적 확인, 추락하는 자의 공포 같은 것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자상하지 않은 감독과 흔들리는 화면, 끊길 듯 이어지는 롱테이크 기법이 어려움을 더 한다.

그런데도 영화가 끝난 뒤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는 관객이 곳곳에 있다. 무엇인가 생각하고 곱씹을 거리가 <버드맨>에 장착돼 있다는 방증이다. 누구나 느끼는 것처럼 영화의 주제는 명쾌하다. "나는 누구인가?!" <버드맨>에서 방점은 상실된 자아를 찾아가는 멀고도 고달픈 여정이다. 문제는 최후지점까지 도달하느냐 여부다.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서

한물간 배우 리간 톰슨. 그는 1990년대 블록버스터 <버드맨>의 주인공으로 단칼에 수천억 원을 벌어들인 스타였다. 60줄에 접어든 톰슨을 알아주는 이는 중년 세대 정도다. 퇴물 소리를 듣는 그는 영화판이 아니라 브로드웨이에서 재기를 도모한다. 레이먼드 카버의 연극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원작을 각색한 톰슨은 극도의 긴장감에 시달리고 있다. 주변에는 온통 걸림돌뿐이다. 시원찮은 주역배우, 자금 때문에 톰슨을 압박하는 제작자, 오만방자하게 구는 새로운 주연배우 마이크(에드워드 노튼), 존재 자체로 부담을 주는 마약장이 딸 샘(엠마 톰슨) 등등. 무엇보다도 성공강박증과 왕년의 추억이 그를 잔인하게 조인다.

잊힌 퇴물이 아니라 대중의 열광을 온몸으로 받고 싶은 톰슨. 과연 그의 열망은 실현될 수 있을까.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내부에서 음험하게 그를 혼란스럽게 하는 또 다른 자아의 분열책동이 언제나 동반한다. 그가 마주하는 현실을 허접한 쓰레기로 규정하면서 모든 것을 당장 때려치우라는 그의 분신 '버드맨'.  

분열된 슈퍼히어로

실베스타 스탤론에게 영광을 가져다준 <록키> (1976) 이후 영화 연작은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으려는 욕망을 담는다. 기적처럼 온갖 시련을 극복하는 록키의 형상은 상실로 고통받은 무기력한 세인의 영혼을 달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버드맨>의 주인공이 경험하는 시공간은 20년을 넘나든다. 톰슨의 분열은 복합적이다.

실제적인 자아와 영화의 배역인 슈퍼히어로 사이의 간극을 충분히 메워나가지 못하는 톰슨. 현실과 환상 사이의 거리에서 발생하는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기력한 톰슨. 자살 같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아에서 벗어나려는 인간 톰슨. 따라서 톰슨이 경험하는 있는 듯 없는 자아의 존재감은 인생 전체를 관통해왔던 대못이다.   

지나버린 세월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자아와 현실을 수용하려는 자아가 내면에서 충돌한다. 단번에 모든 것을 만회하고 싶은 충동과 강고한 현재의 억압을 수용하려는 이성의 대결은 <버드맨>에서 시종일관 지속된다. 그것은 영화를 인도하는 추진력이기도 하다. 톰슨의 분열은 카버 연극의 초연에서 극대화된다.

시연(프리뷰)을 가까스로 넘긴 그였지만, 초연이 야기하는 극도의 긴장과 자아를 추구하는 내면의 분열은 극한으로 치닫는다. 따라서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충격적이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신의 분열을 극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톰슨. 하지만 명민한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감독은 마지막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극과 영화

셰익스피어는 <뜻대로 하세요>에서 "세상은 무대고, 여자와 남자는 배우일 뿐이다!"고 기록한다. 그것을 바꾸면 "세상은 극장이고, 인생은 연극이다!"가 된다. 영화 <버드맨>은 연극공연을 준비하는 극장 안팎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기초한다. 하지만 연극은 영화의 얼개이자 액자로 마지막 장면만을 되풀이해서 보여줄 따름이다.  

관객의 관심은 연극의 성공이 아니라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톰슨이 만나는 내면세계의 진척과 결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에 관심을 가진다. 배우와 연출가, 연출가와 제작자, 연출가와 비평가, 배우와 비평가, 비평가와 관객의 관계가 공연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버드맨>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연출가와 비평가의 관계다. 브로드웨이 연극판에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비평가 타비타와 퇴물배우이자 연출가 톰슨의 대결은 흥미진진하다. 인생 전체를 하나의 연극에 쏟아 붓는 톰슨의 목줄을 죄는 냉혹하고 건조한 타비타! 그녀가 작성한 공연평은 어떤 것인가?!

존재의 형식

톰슨의 가족사가 연극과 나란히 진행된다. 톰슨은 결혼기념일에도 다른 여자와 동침할 만큼 폭력적인 사내다. 자살을 시도하지만, 해파리한테 물려서 바다에서 도망치는 인간 톰슨.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딸 샘. 하지만 톰슨에게 샘은 있는 듯 없는 듯하다. 그는 언제나 부재중인 아빠이기 때문이다. 전처가 톰슨에게 말한다.

"샘에게 좋은 아빠가 될 필요는 없었어. 그냥 아빠가 되기를 바랐을 뿐이야!"

샘과 톰슨의 갈등과 대결은 영화의 백미 가운데 하나다. 톰슨이 애면글면 매달리는 공연을 샘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샘이 보기에 톰슨의 공연은 왕년의 스타 '버드맨'의 명성과 영광을 되찾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샘의 판단은 절반만 적용 가능하다. 톰슨은 진정한 자아와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버드맨>에서 감독의 재능은 톰슨이 벌거벗고 거리를 활보하는 장면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사건발생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13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는 톰슨의 동영상. 그것이 21세기 인간들의 존재확인 형식이자 자기발현 매체다. 문제는 20세기의 슈퍼히어로 톰슨이 그것을 모르거나 아예 무관심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다. 톰슨이 슈퍼히어로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까닭은! 21세기를 구원하고 인도할 새로운 영웅이 필요한 시점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에 장착된 페이스북과 트위터 같은 사회관계망 서비스에 열광하는 현대인에게 1990년대 슈퍼히어로는 유행이 지난 제품이거나 퇴색한 앨범에 지나지 않는다.

왜 아카데미는 작품상을 주었을까

수술한 코를 확인하려고 톰슨이 화장실로 간다. 변기에는 화려한 의상과 초록색 날개의 '버드맨'이 앉아 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붕대를 푸는 톰슨. 마침내 그의 얼굴이 드러나고 새로운 코도 모습을 드러낸다. 얼굴전체에 번져있는 핏기는 감출 수 없지만 코는 생각보다 멋지고 잘 어울린다. 그가 창문으로 걸음을 옮긴다.

샘이 창문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알듯 모를 듯 미소 짓는다. 

<버드맨>은 연극의 형식을 가진 영화이자, 영화의 장치를 극한으로 살린 연극이기도 하다. 극장을 둘러싼 갈등은 무대 위에서도 실제생활과 인간관계에서도 고스란히 살아난다. 영화는 톰슨의 내면을 추적하는 심리스릴러 형식을 취하지만, 그가 맺은 관계의 중층구조는 현대인의 복잡다단한 내면풍경을 드러내기에 손색없다.

톰슨의 동선을 따라 흔들리는 영사기는 연극의 사실성에 충실하지만, 그의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영화의 환상을 강화한다. 연극으로 재기를 노리지만, 톰슨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 전체를 성찰하는 진지한 노력을 감행한다.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대변하는 21세기 사회관계망의 헛헛함과 대중이 열광하는 슈퍼히어로의 본질이 야기하는 우울함과 쓸쓸함의 대비는 유쾌하리만큼 현저하다. 사정이 이럴진대 어떻게 아카데미에서 외면할 수 있겠는가!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1999년 제71회 아카데미에서 7개 부문을 수상하지 않았던가?!

버드맨 슈퍼히어로 분열 SNS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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