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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파무아얀 폭포(Pamuayan Falls) 가는 길'이라는 인쇄물 한 장을 손에 들고. 폭포까지 가는 길을 영어로 상세하게 적어 놓은 안내문이었다. 어제 포트 바턴(Port Barton)에 도착해 관광안내소에서 받아놓은 거였다.

1. Just walk along the beach... (해변을 따라 죽 걸어라...)

아침 6시께, 해변의 리조트와 레스토랑의 직원들이 비치 청소를 하고 있었다. 모래사장을 갈퀴로 싹싹 긁어가며. 1km쯤 걸어 해변 북쪽 끝에 다다랐다. 작은 다리를 건너라고 했는데… 어디지? 아, 저기… 오솔길로 들어섰다. 첫 번째 갈림길에선 오른쪽으로… 얕은 언덕바지를 오르다보면 공동묘지가 나오고….

안개 자욱하게 깔린 숲길이었다. '혼자 다니면 무섭지 않아요?' 여행 중에 나는 이런 질문을 자주 받았다. 무섭다면 이러고 혼자 다니겠나. "가끔 외롭지만, 낯선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아 좋다. 무섭지는 않다"라고 대답하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들.

필리핀은 한국인에게 위험한 나라로 악명이 높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강력범죄가 심심찮게 발생한다. 그런데 섬나라인 필리핀은 지역마다 치안 상황이 다르다. 팔라완은 마닐라 같은 대도시와는 분위기가 딴 판이다. 물론 관공서나 큰 상점 앞에 총을 찬 가드들이 서 있지만.

아무튼 나는 팔라완에서 혼자 배낭여행을 하며, 몸을 사릴 위험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살인, 강도 같은 강력범죄가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섬이고 다만, 최근 들어 생계형 좀도둑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난 어딜 가서든 현지인들의 말만 믿는다

나는 어딜 가서든 현지인들이 '그건 여기서 위험한 짓이다. 거긴 우범지역이다'라고, 하는 말만 믿는다. 알고 보면, 외부에서 떠드는 소리는 대부분 부풀려진 헛소문들이다. 그리고 내가 범죄의 피해자가 될 확률이 번개에 맞을 확률과 비슷하다면, 필요 이상의 불안과 걱정은 붙들어 매야 한다. 이 여행을 때려치우고 싶지 않다면. 이렇게 큰소리치며 천방지축 나다니다가 큰코 다칠지도 모르지만.

이른 아침 파무아얀 폭포 가는 길
 이른 아침 파무아얀 폭포 가는 길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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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걷혀가는 오솔길에서 두 아이를 동반한 젊은 부부와 마주쳤고, 할머니 세 분과도 만났다. 그들은 나와는 반대 방향에서 안개 낀 산길을 넘어와 포트 바턴 시내 쪽으로 가고 있었다. 숲 속이나 해변마을의 원주민들 같아 보였다. 볼 일을 보러 도시로, 아침 일찍 먼 길을 나선 복장이었다.

안개가 완전히 걷혔다.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기 시작했다. 숲속의 야생화들이 청초한 자태를 드러냈다. 숲의 기운이 푸르고 푸르렀다. 1시간쯤 걸었을까. 어느새 숲 깊숙이 들어왔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걷는데 숨이 차지는 않았다.

9. After the third bridge take... (세 번째 다리를 지나...)

짧은 나무다리를 몇 개 건넜다. 계곡을 몇 번 가로질렀다. 'keep going→(화살표 방향으로 계속 가시오)' 표지판을 몇 개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폭포에 도착했다. 3.5km 걷는 데 2시간쯤 걸렸다. 안내문에는 50분 소요 거리로 나와 있지만. 워낙 한눈을 많이 팔며 느리게 걷다 보니.

'내 인생의 길도 누군가가 친절하게 만들어준 안내문이나 이정표를 따라, 편히 쉴 수 있는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이 문득 드는 거였다. 그렇더라도 나는 정해진 그 길이 재미없다며, 일부러 안전한 길에서 벗어나 고생을 사서 할지도 모르지만.

폭포 줄기가 5m쯤이나 될까. 규모가 그리 큰 폭포는 아니었다. 폭 30m쯤 둥글게 파인 물웅덩이에서 물놀이를 할 수 있다. 수영복을 챙겨가라던 친절한 안내문에 따르면. 바닥엔 자갈과 모래가 깔려 있었다. 안쪽 수심은 깊어 보였다. 8시 10분. 그 이른 시각에 누가 오겠나 싶어서, 티셔츠 안에 입고 있던 수영복까지 홀딱 벗고 알몸으로 입수했다. 인적 드문 시간에 혼자 왔으니, 보상 같은 것. 영혼까지 자유로워지는 그 느낌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폭포수와 새소리를 들으며 물속에 앉아,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물은 차고 맑았다. 온몸의 세포가 파닥파닥 깨어나는 것 같았다. 그때 작고 까만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수면을 스치며 빙빙 돌다 날아갔다. 나는 30분쯤 수영을 즐기다 나왔다. 

파무아얀 폭포에서 수영하다.
 파무아얀 폭포에서 수영하다.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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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필리핀 청년을 따라 나서다

몸이 날아갈 듯 상쾌했다. 폭포를 떠나 얼마쯤 내려왔을까. 필리핀 청년을 만났다. 그는 물가의 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다. 청년 옆에 코코넛 두 덩어리와 긴 칼이 놓여 있었다. 그냥 스쳐 지날 갈 수도 있었는데. 코코넛 하나만 팔 수 있냐고 내가 물었다.

청년이 긴 무쇠 칼로 탁탁탁! 코코넛 꼭지 부분을 도려내 내게 건네주었다. 코코넛을 마시며 청년과 얘기를 나눴다. 청년은 근처 마을에서 사는 원주민이었다. 이름은 아놀드, 나이 33살. 짙은 갈색 피부에 눈빛이 강렬했다. 키가 작고 체구가 왜소한 편이었다. 

얼마 후 나는 그를 따라 숲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그때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아놀드가 사는 마을로 가는 길이었다.         

'우리는 기대하지 않은 흥미로운 사람들을 일상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한 만남은 사소하지만 강력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낯선 사람 효과> 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행 중엔, 특히 혼자 배낭여행 중인 여행자에겐, 어떤 '낯선 사람'을 만나냐에 따라 여행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 나의 여행을 '강력한 방식으로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낯선 사람들.' 나는 그런 기대에 부풀어 아놀드의 뒤를 따라갔다.

원주민 마을 소달구지
 원주민 마을 소달구지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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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가 갔을까. 열대우림을 빠져나가자 바나나나무 숲이 나타났다. 바나나나무 숲  길을 지나, 또 얼마나 한참을 걸었을까. 드디어 아놀드가 사는 마을에 다다랐다. 나는 그만, 마을 입구에 멈춰서서 한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 한 눈에 매료되고 말았다. 무엇에 홀린 걸까? 마치 초자연적인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순간, 나는 눈물 나게 행복했다.

열대나무 덤불숲, 코코넛야자나무 숲, 풀밭, 그 사이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니파 헛(필리핀 전통 오두막집). 아무래도 내 기호에 맞는 곳은 도시보다는 시골이다. 서울 생활을 접고 지리산 산골마을로 귀촌한 것도 그래서였다. 도시의 풍경보다 시골의 풍경이 나의 감성을 흔든다. 나를 감동시키는 것은, 오래된 것이거나 소박한 것들, 나무나 풀, 꽃들. 

알라만다 꽃이 아놀드의 오두막집 울타리를 휘감고 노랗게 피어 있었다. 어머니랑 둘이 사는 집이라는데, 어머니는 며칠 전 타이타이에 사는 친척 집에 갔단다. 그가 옆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의 누나 집이었다.

가족이 함께 니파 헛(필리핀 전통 오두막집) 짓는 모습
 가족이 함께 니파 헛(필리핀 전통 오두막집) 짓는 모습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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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넛오일 만들기 작업에 나선 남자 셋

근처 너른 풀밭 속에 뜨문뜨문 보이는 오두막집 7채. 아놀드의 결혼한 형제들이 사는 집이라고 했다. 마침 집에 있던 아놀드의 매형이 나무로 불을 지폈다. 새까맣게 그을리고 찌그러진 주전자에 물을 끓여 커피를 타주었다. 영어를 못하는 매형과 나는 눈빛으로, '잘 왔다. 환영한다, 고맙다, 커피가 맛있다.' 그런 말들을 주고받았다. 

시원한 니파 헛 안에서 커피를 마시고, 아놀드를 따라 마을을 둘러보러 나갔다. 니파 헛을 짓고 있는 가족을 만났다. 부부와 아내의 여동생과 아이들이 집을 짓고 있었다. "우리가 살 집인데 우리가 짓죠." 부부의 그 말이 인상적이었다.

니파움막에서 연기가 펑펑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세 남자가 그 앞에 앉아 '탄두아이 럼(필리핀의 대중적인 럼주)'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코코넛오일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작업과정이 궁금해 움막 안을 들여다보았다.

니파움막 안에서 불을 지펴 시렁 위에 얹은 코코넛을 익히는 작업
 니파움막 안에서 불을 지펴 시렁 위에 얹은 코코넛을 익히는 작업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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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넛 기름 만들기 작업중인 사람들.
 코코넛 기름 만들기 작업중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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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2미터쯤 되는 시렁 위에 반으로 쪼개진 코코넛 속껍질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그 밑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꽃. 코코넛 겉껍질이 타고 있었다. 그 화기로 코코넛의 하얀 속살을 굽는 거라고 했다.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다 구어지면 프에르토 프린세사로 가져가 오일을 만드는 공장에 판다고.

맹그로브 숲 나무다리를 건너가자 바다가 나왔다. 해변에 니파 헛들이 몇 채 보이고, 모래사장에 엎드려 핀 보라색 꽃이 아름다웠다. 바다엔 작은 방카(필리핀 나무 배) 두 대가 떠 있었다.

술에서 깨 남자가 나에게 던진 한 마디 "사랑해"

코코넛야자나무 숲 속 니파 헛과 소달구지 타고 가는 아이들
 코코넛야자나무 숲 속 니파 헛과 소달구지 타고 가는 아이들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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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와 나는 만나는 주민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마을을 돌았다. 소달구지를 타고 가는 사람들, 허리춤에 장칼을 차거나 들고 소를 몰고 가는 남자들… 풀밭을 헤치고 다니는 닭과 강아지들… 썰매처럼 생긴 소달구지를 몰고 가는 아이들… 집들이 뜨문뜨문 멀리 흩어져 있어서 마을을 도는데 발품이 꽤 들었다.

그런데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나보다. 느닷없이 천둥이 내리쳤다.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비를 피해 가까운 오두막집으로 뛰어들었다. 마침 주변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도 소리를 지르며 뛰어왔다.

오두막집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니파움막에서 코코넛을 굽고 있던 남자들이 먼저 거기 와 있었다. 그 중 한 남자가 술에 골아 떨어져 바닥에 누워있었다. 그런데 다른 두 남자가 그 남자의 머리통을 무릎에 올려놓고, 가위질을 하고 있는 거였다. 뭉텅뭉텅 머리카락이 잘려나갔다.

"강, 놀라지마. 이 마을 사람들의 조크 같은 거야."

내 표정을 살피며 아놀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쪽에서 할머니 한 분이 니파야자 잎으로 지붕에 얹을 이엉을 만들고 계셨다. 내가 니파 잎 몇 장을 추려들고 이엉을 만들자, 모두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2주 전쯤에 칼라우이트 섬에 있는 바랑가이(마을)에 갔었어. 거기서 배웠어."

아놀드가 통역을 했다. 할머니가 내 등을 손바닥으로 쓸어주며 미소를 지으셨다. 그때, 골아 떨어져 있던 남자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의 머리통은 완전히 쥐가 파먹은 꼴이었다. 그 꼴을 보고 아이들까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남자는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I love you!(사랑해)" 

원주민 마을 니파 헛
 원주민 마을 니파 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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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 좌중이 배꼽을 틀어잡고 웃어댔다. 남자는 몇 번 더 그 말을 반복했다. 아무래도 그가 아는 영어가 그것뿐인 것 같았다.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했던 비가 또 갑자기 그쳤다. 마을구경을 더 했다. 사람도 오두막집도 숲과 바다처럼, 그냥 자연 같은 풍경속을 걸으며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놀드와 바다낚시를 가기로 약속했다. 그의 사촌인 두 소년이랑. 그래서 다음날 나는 또 몇 시간 숲길을 걸어, 그 마을을 찾아갔다. 다행히 길을 잘 찾았다. 나는 어제 꾸었던, 깨기 싫었던 꿈을 다시 꾸는 걸까.  


태그:#팔라완, #필리핀 , #배낭여행, #포트바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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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2017년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출간. 유튜브 <은경씨 놀다>. 네이버블로그 '강누나의깡여행'. 2019년부터 '강가한옥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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