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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오전 6시,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 18년 차 주민 A씨는 1층부터 4층을 오르내리며 40개의 방문을 급박하게 두드렸다. 자신이 사는 건물 앞으로 쇠파이프를 실은 트럭 한대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건물주는 세입자들에게 이미 퇴거를 요구한 상태였다.

"아시바를 치러왔다고 하더라고요."

잠결에 팬티 바람으로 뛰쳐나왔다는 B씨의 말이다. '아시바'는 건설이나 철거 시 산업현장에서 쓰이는 가설 발판 등을 뜻하는 일본말이다. 작업에 들어가려던 용역 6명은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돌아갔지만 주민들은 경계심을 늦추지 못했다. 김병택(79) 세입자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오늘 일을 나가지 못한 사람도 여럿 된다"고 말했다.

안전진단 이유로 나가라? 실체 불분명한 진단업체

지난 2월 5일, 쪽방촌 방마다 붙은 공고문 사진. 입주민들은 누군가가 건축주 대리인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쓰여있던 하단을 모두 잘라냈다고 전했다.
▲ 각 방 문에 붙은 공고문 지난 2월 5일, 쪽방촌 방마다 붙은 공고문 사진. 입주민들은 누군가가 건축주 대리인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쓰여있던 하단을 모두 잘라냈다고 전했다.
ⓒ 김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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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의 시작은 지난 2월 5일, 쪽방촌 방문마다 나붙은 노란 공고문이었다. 철거 및 구조 보강공사가 필요하니 입주민들은 3월 15일까지 모두 나가 달라는 내용이었다. 건물 관리인은 "구조 안전진단 결과 안전등급 D를 받았다"고 퇴거 이유를 설명했다. 해당 건물에 살고 있는 41명의 입주자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노숙생활을 하다 6년 전 쪽방촌에 자리를 잡은 C(67)씨는 "여기서 쫓겨나면 다시 서울역 길거리로 나앉을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입주민 대부분이 독거노인들로 정부에서 주는 48만 원이 소득의 전부인 기초생활수급자들이다. 거동이 어려운 장애인도 7명이나 있다. 40여 일 만에 새로운 주거지를 마련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건물은 동자동 쪽방촌에서도 방값이 가장 싼 곳에 속한다. 퇴거 요구 당시 집주인은 도의적인 차원에서 한 달 분의 월세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세입자들로 결성된 비상대책위원회(아래 비대위)는 퇴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입주민 41명은 2월 월세를 모아 동자동 사랑방 공제협동조합 이름으로 법원에 공탁했다. '우리는 집세를 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한편 입주자들은 안전진단 검사를 실제로 했는지 의문을 품고 있다. 김병택 위원장이 지난 2월 25일, 건물주를 만난 자리에서 안전진단 검사결과서가 있느냐고 물었지만 뚜렷한 답을 듣지 못했다. 지난 2월 주민들의 민원을 접수한 용산구청측이 건물주에게 안전진단 보고서를 요청했지만 "보고서가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입주자들은 안전진단을 했다는 업체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표했다. 주민들은 작년 12월에 실시했다는 안전 진단을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다. 한 구조 안전진단 전문가는 "입주자들 모르게 안전 '진단'을 진행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진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방 안으로 일일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안전 '점검'은 건물 외부에서 육안으로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17일 용산구청의 건축디자인과 담당 공무원은 "안전진단을 했다는 업체와 전화통화한 결과, 육안 점검 정도 한 것으로 파악된다"며 "간소한 검사로는 안전등급을 판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13년째 쪽방에서 살고 있는 D(65)씨는 "안전진단 결과를 통보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고개를 갸웃했다. 용산구청 관계자도 "안전진단을 근거로 건물주가 퇴거명령을 내린 건 처음 겪는 일"이라고 밝혔다.

시설물의안전관리에관한특별법에 따르면 공공건축물과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은 정기적 구조안전진단을 받게 돼 있지만 개인 소유 건물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건물주가 육안으로 보고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사비를 들여 전문업체에 안전진단을 맡겨야 한다. 안전진단 결과를 관청에 신고할 의무도 없다.

쪽방촌 주민들의 탄원으로 16일 용산구 안전재난과 공무원이 건물을 찾았다. 하지만 공무원도 "뾰족한 수가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구청 차원에서 외관을 보고 간단한 안전검사를 실시해 건물주에게 안전진단 재실시를 권고할 수는 있다. 하지만 현행법상 강제할 수는 없다.

주민들은 건물을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주민들을 손쉽게 퇴거시킬 명분으로 안전진단을 악용한 게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주민들의 의심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주민들은 안전진단 업체가 인터넷 검색으로 찾을 수도 없고 관할 구청에도 등록돼 있지 않다고 했다.

20일 국토교통부에 문의한 결과, 해당 업체는 한국시설안전공단의 시설물정보관리종합시스템(FMS)과 국토교통부 건설산업지식정보시스템(KISCON) 모두에서 조회되지 않았다. 관계자는 "안전진단 등급을 판정하기 위해서는 안전진단전문기관 혹은 유지관리업체로 등록되어 있어야 한다"며 "(등록되지 않은) 업체의 안전진단 결과는 공신력이 없으며, 그 신뢰성 또한 의심된다"고 설명했다.

건물주 "내쫓으려는 것 아니야"... 주민 "고려장이나 마찬가지"

안전진단 결과를 이유로 건물주가 퇴거명령을 내린 동자동 건물
 안전진단 결과를 이유로 건물주가 퇴거명령을 내린 동자동 건물
ⓒ 김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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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건물주는 "업체에 의뢰를 해서 안전진단을 받았다"며 그 정황을 설명했다. 건물주는 "작년 12월 의정부시 화재 사고(실제로는 1월 10일 발생)를 보고 겁이 나서 쪽방촌 건물에 화재보험을 들려고 하였으나 너무 낡고 위험한 건물이라 보험 가입도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어 "이참에 큰 마음을 먹고 수리를 해보자는 생각에 600만 원의 사비를 털어 안전진단을 받았다"며 "철거 및 구조 보강공사가 요구된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건물주는 안전진단 보고서가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진단서를 발급받는 정밀 안전진단은 수천만 원의 비용이 소요되어 시행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관련 서류가 전혀 없냐는 물음에는 "구두로 내용을 전달 받았다"고 답했다.

건물주는 자신을 악덕 건물주로 몰리는 상황이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2월부터 월세를 받지 않고 퇴거일도 3월 15일에서 4월 20일로 연장해 주었다"며 "월세도 처음에는 한 달치를 안 받겠다고 했고 최종적으로는 석 달 치를 받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쪽방촌 주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여러모로 고려했다는 것이다.

건물주는 입주자들이 살기에는 건물 상태가 너무 위험하다는 우려를 수차례 내비쳤다. 지난 16일 용역들이 건물을 찾은 이유에 대해서는 "주민들을 내쫓으려는 게 아니라 수리 및 철거 준비 작업을 하기 위해서"라고 해명했다.

동자동 쪽방촌이 주시하는 건물 철거

김창현 동자동 사랑방 대표는 "동자동 쪽방촌 주민 전체가 이 건물을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자동에는 저런 오래된 건물이 수도 없이 많다. 안전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도미노 현상처럼 쫓겨날 수도 있다."

해당 건물은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수리를 위해 방을 비워 달라는 집주인의 결정을 막을 근거는 없다. 실제로 계약서도, 보증금도 없는 쪽방촌 세입자들은 임대차 보호법상 임차인에 해당하지 않아 바로 다음날까지 집주인이 방을 빼달라고 해도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

세입자들도 위험하다고 판정된 건물에 무작정 눌러앉겠다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공개된 상태에서 안전진단을 실시하고 안전에 문제가 있다는 결과가 나오면 주민들도 수긍할 수 있다"고 김 대표는 강조했다. 그는 또 이주 및 재정착 대책이 필요하다며 정부의 역할을 주문했다.

김병택 비대위원장은 "갑의 횡포"라고 목소리를 높이다가도 "건물주를 골탕 먹이고 싶은 건 아니라"고 덧붙였다. 서울역 노숙자들을 돕는 자원봉사를 하는 김 위원장은 자신의 쪽방에 노숙자들의 자활을 돕기 위해 컴퓨터를 마련할 계획이었지만, 퇴거 명령으로 실현가능성이 불투명해졌다.

동자동 쪽방촌 건물 출입구 앞을 가로질러 검은색 소파가 들어섰다. 언제 또 용역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보초를 서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다. 소파에 한자리씩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이들은 주름 사이마다 세월의 풍파를 깊이 간직하고 있는 머리가 새하얀 노인들이다.

옆 건물에 사는 30년 쪽방촌 주민 E(53)씨는 서글프다는 듯 읊조렸다.

"이 분들을 고려장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태그:#동자동, #쪽방촌, #퇴거, #안전진단, #동자동 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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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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