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12년~2013년, <오마이뉴스>는 '마을의 귀환' 특별기획을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위험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대안으로 마을공동체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마을의 귀환 시즌2는 '1인가구 공동체'에 주목합니다.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1인가구와 마을공동체, 언뜻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요. '1인가구'와 '공동체', 나아가 '마을'의 만남은 가능할까요. '탈고립', '탈가족주의', '탈자본주의', '탈도시'... 1인가구를 위한 마을사용설명서, 지금 공개합니다. [편집자말]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천재 수학자이자, 동성애자였던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일대기를 다룬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천재 수학자이자, 동성애자였던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일대기를 다룬다.
ⓒ 메가박스㈜플러스엠

관련사진보기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천재 수학자이자, 동성애자였던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일대기를 다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암호체계인 '에니그마'를 해독하며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었던 앨런 튜링. 하지만 그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성문란 혐의'로 기소돼 '화학적 거세'를 당해야 했다.

1954년, 튜링은 청산가리를 주입한 사과를 먹고 41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애플'의 로고인 한 입 베어 문 사과는 '컴퓨터의 아버지'인 튜링의 사과를 뜻한다는 설도 있다. 전쟁 비밀요원이자, 동성애자였던 앨런 튜링의 존재를 숨겨왔던 영국 정부는 201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특별사면권에 따라 튜링을 공식 사면했다. 튜링이 세상을 떠난 지 59년 만이었다.

2월의 마지막 날, 합정의 한 영화관에 5명의 여성이 모였다. 이들은 모두 튜링과 마찬가지로 같은 성을 좋아하는 동성애자들. 토요일 저녁, 이성애자들로 가득한 스크린 앞에 이들은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도 그들 옆자리에 앉았다.

'1인가구, 마을과 만나다' 기획을 구상하면서 꼭 만나고 싶은 이들이 있었다. 바로 성소수자들. 공개적으로 결혼식까지 치렀지만 구청에서 혼인신고를 거부당한 김조광수·김승환 커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성애 중심의 현 사회 속에서 성소수자들이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결혼을 하고, '정상가족'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이도 입양할 수 없다. 이들은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까.

오랜 기다림 끝에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아래 마레연) 영화 '벙개'에 참석할 수 있었다. 튜링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겪는 고난들을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궁금했다. 옆에 앉은 이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성소수자들이 함께 본 <이미테이션 게임>

영화가 끝나고, 근처 호프집으로 이동했다. 이날 '벙개'에는 현재 마레연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퀴어문화축제 기획단에서 활동하면서 "영화도 보고, 사람도 만나러" 참석했다는 이, 2년 만에 마레연 모임에 다시 나왔다는 이도 있었다. 몇몇은 이미 다른 퀴어 관련 모임에서 안면이 있었다.

'우야'(30)가 얼마 전 유기견 보호소에서 입양한 강아지를 데리고 합류했다. 과거의 상처로 분리불안이 심한 강아지 때문에 이날 우야는 티켓까지 다 끊어놓고도 영화를 보지 못했다. 마포에서 혼자 살고 있는 우야는 올해부터 마레연 '당번'을 맡아서 활동하고 있다. 일종의 운영진이다. 현재 4명의 당번이 있다. 따로 '대표'는 없다.

"육아 때문에 힘드시겠어요. 말할 수도 없는 아이 때문에(웃음)."

또 다른 당번인 '달꿈'(29)이 맞은편 우야의 강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달꿈은 2년 전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한 이후 은평구에서 독립해 살고 있다. '달꿈'은 "퀴어적인 요소가 있어서 일부러 이 영화를 골랐다"면서 "너무 재밌었다"고 말했다.

"앨런 튜링이 약혼자인 조안 클라크에게 커밍아웃을 했을 때, (조안 클라크가) '그게 뭐 어때서'라고 반응하는데, 멋있었어요.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거든요."

달꿈은 "저는 그 이야기(커밍아웃)를 할 때 뭔가 이상하다"면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하자니 상대방을 살피게 되고, 그렇다고 머뭇거리자니, 나한테는 나의 일부분을 이야기하는 건데... 이야기할 때마다 기분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대학생이라는 '어니언'은 <이미테이션 게임>이 얼마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받았을 때, 수상자인 그레이엄 무엄이 했던 이야기가 가슴에 와닿았다고 말했다.

"이상해도 괜찮다고 했잖아요. 남들과 달라도 괜찮다고. TV에서 그거 보면서 엄마한테 막, '엄마, 이상해도 괜찮대'(stay weird)"

마레연은 마포구에 머물고 있는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들의 커뮤니티다. 2010년 6·2 지방선거 당시 '지역 정치에 퀴어의 목소리를 담자'는 취지로 '마포 레인보우 유권자 연대'를 결성한 것에서 시작해, 선거 후 성소수자 커뮤니티 모임으로 발전했다. 회원들 가운데는 레즈비언이 가장 많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활동하면서 정기적으로 오프라인 모임을 하고 있다. 매달 열리는 밥상 모임은 많을 때는 30명 가까이 참석할 정도로 활성화 돼있다.

마레연 밥상 모임 홍보 포스터
 마레연 밥상 모임 홍보 포스터
ⓒ 마레연

관련사진보기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 밥상 모임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 밥상 모임
ⓒ 마레연

관련사진보기


"처음에는 실제로 마포구에 퀴어들이 많이 사니까, 지역 기반으로 시작한 측면도 있어요. 그런데 마포구 집값이 뛰면서 성소수자들이 은평구 등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 이후에도 마포에 자주 놀러오는 거예요. 마포라는 지역색이 있잖아요. 홍대 문화라는 상징성도 있고, 다양성을 담보할 수 있고, 익명성이 보장되는 느낌... 지금은 오히려 마포에 안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달꿈

이날 마레연 모임에 두 번째로 나왔다는 'LEMON'(35)도 그런 경우다. 안산에서 왔다는 LEMON은 그동안 성소수자 커뮤니티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근에 이별을 했다는 그는 "애인이 아닌 친구를 만들고 싶어서 주변에 물어봤더니 마레연 밥상 모임을 나가라고 소개해줘서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우야는 "저도 인천에 살 때 밥상 모임에 자주 나왔다"고 덧붙였다. 

"성소수자들도 다양해요. 나는 사람들 만나는 건 싫지만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만나고 싶다는 사람도 있고. 나는 그것도 싫다, '벽장' 속에 있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이렇게 모임에 나와서 친해져서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모임은 친구 만들기, 애인 만들기, 취미 생활... 이런 목적이 있는데 마레연은 밥 먹고 생활 나눔을 하니까 부담 없이 나올 수 있는 것 같아요. 취미 생활 없어도 밥만 잘 먹으면 되니까(웃음)."

2014년 연이은 '수난'... "도대체 우리를 뭘로 보기에"

마레연 회원들이 마포구청의 성소수자 인권지지 현수막 게시 거부에 항의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마레연 회원들이 마포구청의 성소수자 인권지지 현수막 게시 거부에 항의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 마레연

관련사진보기


2012년, 이른바 '마포구청 현수막 사건'을 계기로 마레연은 대외적으로 크게 이름을 알렸다. 당시 마레연은 성소수자 인권 지지 현수막 게시를 마포구청에 신청했으나 불허 당했다. '문구와 그림이 주민들이 보기 불편하고 혐오스러울 수 있다'는 이유였다. 마포구가 문제 삼은 게시물 내용은 '지금 이곳을 지나는 사람 열 명 중 한 명은 성소수자입니다', 'LGBT, 우리가 지금 여기 살고 있다' 두 가지였다. 이에 대해 국가인권위는 차별시정 권고를 내렸고, 마포구청은 'LGBT, 우리가 지금 여기 살고 있다' 시안에 대해서만 게시를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현수막 사건 때도 그렇고, 마레연에서는 '여기 퀴어가 살고 있다'고 보여주려는 운동을 해왔잖아요. 번개나 이런 건 우리끼리만 좋고, 재밌으면 되는 거지만 마레연은 퀴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같이 살고 있다'고 알리고, '퀴어를 위한 정책은 뭐냐'고 묻는 활동을 했어요. 물론 우리끼리 있어도 좋지만, 어떻게 하면 (비성소수자와 성소수자가) 같이 좋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모임인 거죠."- 우야 

2014년 6월 7일 오후 서울 신촌 연세로에서 열린 '제15회 퀴어문화축제'에서 성소수자들이 동성애 반대시위를 하는 기독교인들 앞에서 피켓을 들고 맞서고 있다.
 2014년 6월 7일 오후 서울 신촌 연세로에서 열린 '제15회 퀴어문화축제'에서 성소수자들이 동성애 반대시위를 하는 기독교인들 앞에서 피켓을 들고 맞서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지난해는 성소수자들에게 '수난'의 해였다. 6월 신촌에서 열린 퀴어축제 퍼레이드가 보수단체에 막혀 몇 시간 동안 지연됐고, 12월에는 서울시민 인권헌장에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을 포함하는 것을 놓고 논란이 계속되다 결국 인권헌장 제정이 무산됐다. 성소수자와 인권단체 등으로 구성된 '무지개 농성단'은 이를 규탄하며 12월 6일부터 11일까지 6일간 서울시청 로비에서 농성을 벌였다.

"퀴어문화축제가 2000년부터 시작됐는데, 누군가 저희가 진행하는 행사에 와서 직접적으로 혐오를 표출하고, 저희 행동을 막겠다고 그렇게 명확하게 액션을 취한 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퍼레이드 하는데 아예 사람들 행진 못하게 드러눕고... 나중에 생각할수록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성소수자들을) 싫어할 수도 있고 이해 못할 수도 있는데, 백번 양보해서 본인들 목소리를 내기 위해 집회를 하거나 행사를 할 수는 있는데, 이렇게 훼방을 놓는다는 건... 도대체 우리를 뭘로 보기에.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지."- 달꿈

"혐오가 의견이 된 거예요. 예전에는 부끄러워서 못했던 것들을 지금은 당당하게 하죠. 기독교 단체들이 점점 더 조직화되는 것 같아요. 교회는 절대자가 있으니까 매주 모이고, 그게 큰 힘이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개인화 돼있다 보니까 적극적인 대응을 할 수가 없어요. 뭔가 모임을 하고 행사를 할 때 대규모로 홍보를 하면, '또 누가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지' 고민하게 되는 거죠. 많은 사람들과 공유를 하고 논의를 해야 하는데 무서우니까... '우리끼리만 알고 있어야 해' 이렇게 되는 거예요."-우야 

성소수자를 혐오하고, 그 혐오를 드러내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2010년대 한국 사회는 튜링이 여성 호르몬을 맞으며 죽어가던 1950년대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였다.

"우리도 막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고, 호르몬 맞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역사는 돌고 돈다니까." 

LEMON의 말이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았던 이유다.

영화, 소풍, MT... "재밌는 거 많이 해볼 거예요"

외부의 위협은 내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달꿈은 희망도 보았다고 말했다.

"서울시청에서 농성할 때, 처음에 농성 들어가기 전에 걱정을 했던 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일까, 외로운 싸움이 되지 않을까였어요. 그런데 시청에 온 사람들도 많았고, 갈수록 많은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지지의사를 밝혔어요. 분위기도 즐거웠고. 또 늘 항상 보던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얼굴도 많아졌어요. 젊은 사람도 많아지고. '나도 성소수자인데 지지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적이었어요. 물론 보수기독교 세력도 그만큼 집결하고 있겠지만요(웃음)."

지난해 마레연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퀴어 에세이 낭송회를 열었다. 올해부터는 좀 더 다양한, '생활밀착형'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달꿈은 "현수막 사건 이후 피로도가 심해서 한동안 활동이 조금 침체된 측면이 있었다"면서 "우리는 커뮤니티 모임이니까, 재밌는 걸 많이 해보자면서 각자 하고 싶은 것들을 모아봤다"고 말했다.

한 달에 한 번씩 해오던 밥상 모임을 격월로 바꾸고, 영화도 보고, 소풍도 가고, 약사인 회원으로부터 '알고 먹는 약'에 대한 강연도 듣고, 마포의료생협과 함께 자세교정에 대해 배우고, 민중의 집에서 1박2일 동안 MT도 즐기고... 현재 정해진 프로그램들이다. 우야는 "퀴어들 혹은 퀴어 프렌들리(친화적인)한 친구들이 마포구에 얼마나 살고 있는지 가시적으로 보여주자는 의미에서 무지개 문패를 만드는 작업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태그:#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 #마레연, #이미테이션 게임, #1인가구, #마을
댓글2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