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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 바턴 마을
 포트 바턴 마을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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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에 번쩍 서에 번쩍! 어제 아침엔 엘니도에서 타이타이로, 오늘은 타이타이에서 포트 바턴(Port Barton)으로 이동했다. 북쪽 해안에서 동쪽 해안으로, 동쪽 해안에서 서쪽 해안으로.

타이타이에서는 '다나오'라는 호수에 가려고 예약했던 모터바이크가 연락도 없이 펑크를 내는 바람에, 하루 더 머무르려던 계획을 깼다. 여행 스케줄을 그렇게 뒤집든 말든,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전체 스케줄에 크게 차질을 빚을 만한 일도 아니기에. 그때그때 발길 끌리는 대로, 느닷없이 가다 서다 그런다.

발길 끌리는 곳으로 향하다 보니... 빨간 바나나를 만나다

포트 바턴 아이들
 포트 바턴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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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오늘 여정은 만만치 않았다. 이른 아침, 타이타이에서는 버스 시간이 안 맞아 프에르토 프린세사로 내려가는 벤을 잡아 비좁은 자리에 낑겨서 탔다. 남쪽으로 1시간 30여 분 내려와, 갈림길이 나오는 산 호세 라는 곳에서 혼자 내렸다. 산 호세에서는 포트 바턴으로 들어가는 버스가 이미 출발한 후라, 지나가는 벤을 히치하이크해야 했다. 포트 바턴 주민이라는 필리핀 중년 두 남자와 서쪽으로 50여 분 격렬하게 달렸다. 앉은자리에서 점핑 곡예를 하며, 열대우림 속 비포장도로를.

아침 9시 20분쯤 도착한 포트 바턴은 열대우림 끝에 자리한 해변 마을이었다. 250페소(한화로 약 6500원)짜리 싼 숙소를 수소문해 구해놓고, 마을 구경부터 나섰다. 나는 새로운 장소에 도착하면,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배회부터 한다. 마을 지도를 머릿속으로 대충 그릴 수 있을 때까지. '여기선 뭘 할까, 무슨 일이 있을까, 얼마나 머물까...', 궁리하며, 그때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멋진 남자와 첫 데이트를 할 때처럼.

1km쯤 맨발로 걸었다. 모래해변의 한쪽에는 바다, 다른 한쪽엔 낭만적이고 소박한 분위기의 리조트와 레스토랑이 줄지어 있었다. 해변을 벗어나 마을 안쪽 길로 들어갔다. 열대 숲속 마을. 키가 큰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고, 그 사이로 반듯한 길이 바둑판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길가의 작은 상점들, 담장에 핀 꽃들, 망고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들, 가정집 마당 안의 돼지나 닭들을 기웃거리며 걸었다. 얼음 창고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들여다보았다. 한 청년이 왕겨 속에 묻혀있는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꺼내고 있었다. 내가 한참 들여다보고 있자 청년이 멋쩍은지 수줍게 웃었다.

과일가게에 걸린 빨간색 바나나를 구경했다. 좀 짧고 통통한 바나나였다. '바나나=노란색'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 놀랐다. 내가 얼마나 세상을 잘못 바라보고 있을까 싶어서. 짧은 지식과 경험, 관념과 편견에 사로잡혀. '바나나 그림을 혹 그리게 되면, 빨간색으로도 칠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에서 파는 망고를 샀다.
 거리에서 파는 망고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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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파는 망고를 1kg 샀다. 망고 3개 40페소(한화로 약 1000원). 직접 농부에게 싼 가격에 구매한 거였다. 마침 망고철이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맥가이버 칼을 꺼내 베어 먹었다. 필리핀 망고가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망고로 뽑혔단다. 맛이 정말 끝내줬다. 3개 더 샀다. 오늘 점심은 망고로 때우겠다.

흙 마당에 앉아 소꿉장난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납작한 돌덩이, 빈 병, 플라스틱 숟가락 등 몇 가지 소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아이들 옆에 어린 내가 앉아 흙밥을 하고 있었다. 담장에서 꽃을 따는 어린 소녀들 옆에도, 어린 내가 꽃을 따 입에 물고 있었다. 나는 시골동네에서 그렇게 놀고 있었는데….

언제 다 커서 언제 이렇게 늙어 버렸을까? '가장 뛰어난 예언자는 과거'라고 바이런이 말했는데, 오늘 나의 모습은 나의 과거 어느쯤에서 예언되었던 걸까? 흙밥을 짓던 그때? 꽃을 따던 그때 이미? 또, 지금 나의 모습은 나의 어떤 미래의 모습을 예언하고 있을까? 

꽃을 따던 어린 소녀들 중에, 키가 가장 큰 소녀가 내게 꽃을 내밀었다. 붉은색 히비스커스 한 송이. 받아 귀에 꽂았다. 소녀들이 몸을 비틀며 수줍게 까르르 웃었다. 아이들에게 나는 줄게 뭐 있나?

그러고 보니 팔라완에선 걸인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구걸하는 아이들도 없었다. 마닐라만 해도 많은데. 청정지역이니만큼 사람들도 아직 돈이나 물질에 때가 덜 타 그럴까, 굶주리는 사람들이 없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라 그럴까. 어느새 아이들이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저만치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붉은 꽃그늘의 황홀경, 낭만이 다가 아니다

꽃을 따는 어린 소녀들
 꽃을 따는 어린 소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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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한테 받은 붉은 꽃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 떠나온, 타이타이의 산타 이사벨 요새(Santa Isabel Fort)에서 본 꽃들이 떠올랐다. 산타 이사벨 요새는 바닷가 공중정원처럼 아름다웠다. 부겐빌레아, 향기 달콤한 풀루메리아(칼란추치), 화려한 주황빛의 '파이어 오브 플라워(불꽃)'가 마침 만개했다.

나는 어제 오전 내내, 그 꽃그늘 속에 앉아 황홀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꽃에 홀딱 홀렸다. 그러나 산타 이사벨 요새는 그런 낭만적인 감상에만 젖어 있을 장소는 아니었다. 1667년 스페인의 아우구스티누스 선교사들에 의해 건설된 군사 기지였다.

타이타이의 산타 이사벨 요새에 만개한 불꽃
 타이타이의 산타 이사벨 요새에 만개한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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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식민시절을 상징하는 유적. 당시의 작은 예배당과 대포가 요새에 남아 있다. 그 작은 예배당에 울렸을 스페인 사제들의 설교.

"그대가 패하여 포로가 된 것을 모욕으로 생각하지 마시오. 우리의 임무는 선한 것이므로 하늘과 땅과 그 속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이 일을 허락하셨고, 이는 그대가 하느님을 알고 지금까지의 야만스럽고 사악한 삶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심이오. 하느님은 그 어떤 인디언도 기독교인을 거스르지 못하도록 이 일을 허락하셨기 때문이오."

사실 이 말은, 1532년 페루의 고지대 도시를 정복한 스페인 정복자들이, 잉카의 황제인 아타우알파에게 한 말이다. 종교는 침략자들의 행위에 대해, 도덕적 정당성과 종교적 사명감을 부여하는 메커니즘이었다. 침략, 착취, 살인, 배타... 신의 이름을 앞세운 인간의 '사악한' 욕망들. 필리핀 정복자들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산타 이사벨 요새의 대포
 산타 이사벨 요새의 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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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1565년부터 1898년까지 330여 년간 필리핀을 지배하며, 가톨릭 전파에 주력했다. 당시 식민지통치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 교회였다. 가톨릭 신부들은 영적 지도자이며 동시에 법 시행자들이었다. 세금징수, 지방선거관리, 출생, 결혼, 사망신고 등 모든 법적 관리를 맡아 했다.

가톨릭은 300여 년 동안 필리핀 사람들에게 '아편'처럼 깊이 파고들었다. 현재 1억 명이 넘는 필리핀 인구 중에 83%가 천주교인이다. 개신교는 미국식민지 시절에 전파되어 현재 신도가 9%. 이슬람교도는 5%이다.

당시 스페인의 식민통치와 가톨릭 전파에 대해, 필리핀 무슬림들의 저항이 거셌다. 스페인이 필리핀군도 전역을 지배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모로(moros)라 불리는 필리핀 무슬림들 때문이었다. 모로는 스페인 지배기간 동안 쉬지 않고 저항을 감행했다. 내가 본 쿨리온 섬의 요새와 타이타이의 산타 이사벨 요새는, 바로 그 모로를 방어하기 위해 만든 스페인의 군사기지였다.

산타 이사벨 요새. 중앙에 보이는 건물은 작은 예배당
 산타 이사벨 요새. 중앙에 보이는 건물은 작은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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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내가 여행 중인 팔라완의 북쪽 지역은 기독교, 남쪽은 무슬림 지역이다. 남북으로 650여 km 길게 뻗은 팔라완이 그렇게 두 종교지역으로 나뉜다. 팔라완 중앙쯤에 위치한 주도인 푸에르토 프린세사를 기점으로. 나는 기독교 지역인 북쪽에서 여행을 시작해, 남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무슬림 지역인 남쪽 끝까지 갈 예정이다.

지금 산책 중인 포트 바턴은 푸에르토 프린세사 북쪽에 위치해 있다. 해변 앞에 관광안내소가 보여 들어갔다. 그곳에서 '동 루이즈'라는 이름의 필리핀 중년남자를 만났다. 나는 그에게 이것저것 귀찮게 질문을 던졌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포트 바턴은 1950년에 딱반와(Tagbanua) 부족 5가구가 살기 시작해, 지금은 300여 가구가 사는 마을. 마을 주민의 40%가 코코넛이나 바나나나 쌀농사를 짓고 있고, 30%가 어부라고 했다. 20%가 지방정부기관에서 생계비를 벌고 있으며, 나머지가 관광 투어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동루이즈는 최초 5가구 중 한 집의 아들이라고 했다.

"이곳에선 아일랜드 호핑 투어를 할 수 있다. 지금은 관광 성수기가 끝나가는 때다. 전기는 오후 5시 30분부터 자정까지만 공급된다. 마을에는 은행, 의사, 병원이 없다."

이어지는 친절한 설명을 듣고, 관광안내소 사무실에서 나왔다.

다음날 아침, 나는 날이 밝자마자 안개 낀 열대우림 숲 속으로 걸어갔다. 4km쯤 들어가 파무아얀 폭포 밑에서 수영을 했다. 폭포에서 나오는 길에 우연히 한 필리핀 청년을 만났다. 그를 따라 원주민 마을에 가게 됐다. 가슴 떨리게 아름다운 마을로.

포트 바턴 해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포트 바턴 해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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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팔라완, #필리핀, #배낭여행,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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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2017년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출간. 유튜브 <은경씨 놀다>. 네이버블로그 '강누나의깡여행'. 2019년부터 '강가한옥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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