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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 동안 남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기자 말

카트만두 스와얌부나트 사원. 스님과 신자들이 사원을 뱅뱅 돌며 기도를 드린다. 삶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카트만두 스와얌부나트 사원. 스님과 신자들이 사원을 뱅뱅 돌며 기도를 드린다. 삶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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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가 툭, 떨어졌다. 눈을 떴다. 후회했다. 눈은 왜 떴던가. 눈앞의 장면은 그대로다. 버스 안. 운전석 앞에는 여전히 시바 신의 부릅뜬 눈과 반쯤 벗은 여자의 사진이 조잡하게 붙어 있다. 자자. 자야 한다. 잠아, 다시 나를 찾아오라. 어서 와서, 나의 고통을 앗아가 다오.

"버스 2시간째 멈춰 있어."

내 움직임을 알아챈 더스틴이 말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2시간?

"여기 어딘데?"
"몰라."
"지금 몇 시야?"
"새벽 6시."

새벽 6시? 새벽 6시면 마헨드라나가르에 도착할 시간이다. 지난 스무 시간 동안의 모든 고통을 잊고 이 끔찍한 버스와 작별을 고할 시간.

지난 20시간의 고통은 이러했다. 뙤약볕 아래에서 6시간을 기다려 버스를 탔다. 13시간 동안 어둠 속에서 네팔의 깨진 도로를 달렸다. 버스는 좁았다. 발을 뻗기는커녕 두 발을 바닥에 딛기에도 좁았다. 고맙게도 잠이 찾아왔다. 갈 데 없는 고개가 상하좌우로 끄덕였다. 버스의 바퀴가 깨진 도로를 밟고 쿵! 하고 뛸 때마다, 내 고개도 홱! 꺾이며 나의 잠을 앗아갔다.

그때마다 눈을 떴다. 뜨지 말아야 할 눈. 눈을 뜨면 지옥이었다. 동네 어귀마다 멈춰 사람들을 꾸역꾸역 집어삼키던 버스는 서 있는 자리까지 만 원이 되었다. 복도에 선 사람들의 손이 엉겨 붙어 내 머리칼을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덥고 어둡고 더럽고 좁았다. 닭이 빼곡히 든 어두운 닭장 속 두 마리 우울한 닭, 그게 우리였다.

창밖을 내다봤다. 다른 버스 10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허름한 간이식당들이 버스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밤사이에 들른 휴게실과 별다를 것 없는 풍경이다. 마지막 휴게실인가? 버스 기사가 잘 시간인가? 새벽 4시에 버스가 섰다면 목적지까지 고작 두 시간 남은 건데, 거의 다 와서 이렇게 오래 쉴 건 뭔가? 버스가 고장 났나? 아니. 다른 버스들이 여러 대 있는 걸 보면 그건 아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출발하지 않는 거지? 왜 두 시간이나 멈춰 있는 거지? 여긴 대체 어딘 거야? 한 시간이 더 흘렀다.

"뭐야. 왜 안 가는 거야?"

초조해진 난 더스틴을 붙잡고 물었다. 더스틴이 뭘 안단 말인가. 지금이 아침 7시라는 것, 버스가 세 시간째 멈춰 있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다. 그래도 난 더스틴에게 물었다. 더스틴말고는 내 말을 알아들을 사람도, 뭐라고 대답해 줄 사람도 없으니.

15시간 동안 깡통 버스를 타고 네팔의 서쪽 끝까지 올 정신 나간 관광객은 우리뿐이다.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 줄 가이드도, 영어를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주어진 장면을 종합하여 상황을 파악해 봤다.

"파업이랑 연관 있는 아니야?"

더스틴이 말했다.

"파업?"
"나랑가드 버스 사무소 아저씨. 파업 때문에 버스가 없다고 그랬었잖아."

노 버스, 노 마헨드라나가르?

카트만두 러시아워
 카트만두 러시아워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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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지. 어제 아침. 우리는 사우라하 숙소 앞에서 출발하는 쾌적하고 편안한 소나울리행 여행자 버스를 마다하고 나랑가드로 갔다. 소나울리 대신 네팔의 서쪽 끝인 마헨드라나가르에서 네팔-인도 국경을 넘기 위해서였다.

"No bus. No Mahendranagar."(버스 없어. 마헨드라나가르 못 가.)
"여기 오면 마헨드라나가르로 가는 버스가 있다고 들었어요."
"No bus. No Mahendranagar."(버스 없어. 마헨드라나가르 못 가.)
"아까 만난 경찰이 여기 오면 표 있다고 했어요."

버스가 없다고 하는 버스 사무소 아저씨. 버스가 있다고 우기는 나. 아저씨와 나는 십여 분간 버스가 있네, 없네, 같은 말을 반복하며 승강이를 벌였다. 억울했다. 나랑가드까지 왔는데 소나울리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아저씨는 'No', 'Not Possible'을 반복하며 귀찮으니 얼른 가보라는 듯 금반지가 잔뜩 달린 무거운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이유라도 알아야 했다. 왜. 왜. 왜 안 되나요.

"Strike."(파업)
"…."

파업. 파업이 잦은 네팔에서는 버스 파업으로 여행자의 발이 묶이는 건 종종 있는 일이라고 들었다. 종종 없는 일도 종종 일어나는 우리 팔자에 어쩌다 종종 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넘어가나 싶더니. 아저씨를 물고 늘어지던 나도 파업이라는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파업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지. 포기하자. 소나울리로 가면 그만이다.

나랑가드 버스 사무소. 마헨드라행 버스가 있네, 없네, 버스 사무소 아저씨와 십분간 실랑이를 벌였다. 그리고 1,000루피짜리 종잇짝을 받아들었다.
 나랑가드 버스 사무소. 마헨드라행 버스가 있네, 없네, 버스 사무소 아저씨와 십분간 실랑이를 벌였다. 그리고 1,000루피짜리 종잇짝을 받아들었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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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헨드라나가르에서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것 외에 아무 정보도, 국경을 넘었다는 사람도 만나보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도 서북쪽으로 바로 가겠다고 네팔 도로를 15시간 동안 달리는 고통을 감내하느니 지금이라도 소나울리로 가서 기차를 타는 게 신상에 좋을 것이다. 우리는 잠자코, 버스 사무소 아저씨가 알려준 정류장으로 걸었다.

정류장 주위에는 다른 버스 회사 창구들이 있었다. 다른 회사는 사정이 다를 수도 있다. 미련이 생긴 나는 버스 창구를 배회하며 마헨드라나가르를 중얼거렸다. 

"마헨드라나가르 간다고?"

지나가던 아저씨 하나가 나의 중얼거림에 응답했다. 모두가 노를 외칠 때 예스라고 말할 수 있는 아저씨였다. 자기를 따라오면 표를 살 수 있단다. 우리는 깡말랐지만, 왠지 믿음직스러운 아저씨의 등짝을 따라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리고 기껏 도착한 곳이, 10분 전 우리를 쫓아낸 그 사무실이었다.

"아까 여기서 표 없다고 했는데요?"

더워 죽겠는데 또 헛걸음했잖아. 짜증이 난 나는 아저씨에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아저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척이나 소신 있는 아저씨였다. 버스 사무소 아저씨도 노, 나도 노, 더스틴도 노를 말하는 마당에 여전히 혼자 예스를 말했다. 아저씨는 'No Problem!'을 외치더니 서랍을 열어 영수증 종이 다발을 꺼내 들었다.

이 아저씨 정체가 뭐지? 아저씨는 종이에 '마헨드라나가르'와 금액을 갈겨쓰더니 우리에게 건넸다. 지금 이걸 표라고 주는 건가. 십 분 동안 졸라도 'Never Ever Possible'하던 마헨드라나가르행 버스가, 종잇장에 도착지와 금액을 썼다고 바로 'Possible'해진 건가. 이 종이를 1000루피나 주고 사야 하나.

나랑가드 풍경. 아침에 도착해 오후 3시까지, 이곳에서 6시간을 뙤약볕 아래서 기다렸다. 마헨드라나가르행 버스가 출발하기를.
 나랑가드 풍경. 아침에 도착해 오후 3시까지, 이곳에서 6시간을 뙤약볕 아래서 기다렸다. 마헨드라나가르행 버스가 출발하기를.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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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헨드라나가르행 버스는 6시간 후인 오후 3시에 출발한다. 10분 전 만난 아저씨가 손으로 적어 찢어준 얄팍한 종이 한 장만 들고 기다렸다가, 6시간 후에야 사기였음을 깨닫는 것만큼 맹한 짓도 없을 테지. 망설이는 사이 값은 치러졌다. 그토록 염원하던 마헨드라나가르행 표가, 아니 1000루피라고 써진 종이가, 우리 손에 들어왔다.

6시간 후, 놀랍게도 버스가 등장했다. 우리를 더 놀라게 한 건 버스의 외관이었다. 네팔 도로가 이리저리 주물러 놓은 거대한 깡통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깡통 버스에 올랐다. 오후 3시부터 새벽 4시까지, 13시간을 달렸다. 그리고 멈췄다. 어딘지 모르는 이곳에. 이유도 알 수 없이. 더스틴 말대로 파업 때문일까? 이미 13시간이나 달려놓고 이제 와서 파업할 건 뭐야?

다시 기다렸다. 닭장에 갇힌 닭들이 그러하듯, 영문도 모른 채. 달걀 대신 땀을 줄줄 흘리며. 새벽이 멀어질수록 해는 뜨겁게 떠올랐다. 다시 1시간이 흘렀다.

네팔 'Strike'의 의미, '파업'이 아니었다

중간에 들린 휴게실. 15시간 달리는 버스는 두 세 번쯤 휴게실에 들른다. 휴게실 치고 맛있고 싼 밥을 먹을 수 있다.
 중간에 들린 휴게실. 15시간 달리는 버스는 두 세 번쯤 휴게실에 들른다. 휴게실 치고 맛있고 싼 밥을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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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안녕)

영어다. 건너편 좌석에 앉아 있던 아저씨다. 아저씨는 밖에서 몸을 풀다 좌석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우리는 간략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아저씨의 영어는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수월하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Hello'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온 동네에 이 아저씨밖에 없다.

"아저씨, 알려주세요. 이 버스는 대체 왜 서 있나요? 왜 마헨드라나가르로 가지 않나요?"
"Bus, no go. War. Strike. People fight, kill each other."(버스, 못 가. 전쟁. 파업. 사람들 싸움. 서로 죽여.)

전쟁? 서로 죽여? 갈 수가 없어?! 아저씨는 'Strike'라고 했다. 더스틴 말이 맞았다. 버스는 'Strike' 때문에 멈췄다. 하지만 아저씨가 설명하는 'Strike'는 우리가 아는 그 'Strike'가 아니었다. 버스 회사나 정부에 대항하는 버스 노동자들의 '파업'이 아니었다. 아저씨가 말하는 'Strike'는 'Riot' 즉, 폭동이었다.

딩동댕. 머릿속에서 종이 울렸다. 이제야 상황이 어렴풋이 이해된다. 나랑가드 버스 사무소 아저씨가 반복해 말하던 'Strike'라는 말 역시, 파업이 아니라 폭동이란 뜻이었다. 파업 때문에 버스를 운전할 노동자가 없는 게 아니라, 폭동의 위험 때문에 마헨드라나가르로 가는 버스가 없다는 말이었다.

위험하니 가지 말라는데 버스표를 내놓으라고 우기는 우리가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아저씨의 말을 순순히 듣고 발길을 돌렸어야 했다. 아아. 이 쓸데없는 데서 솟구치는 나의 고집! 아집! 옆 좌석 아저씨는 영어 단어를 띄엄띄엄 나열하며 계속 상황을 설명했다.

상황은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평범한 네팔 사람들 간의 싸움이다. 싸움의 이유는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위험한 건, 버스가 지나가면 돌을 던진다는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출발한 버스 4대도 폭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돌에 맞아 부서졌다.

더스틴의 얼굴이 심각하게 구겨졌다. 내 얼굴도 사정없이 구겨졌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뭘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상황을 이렇게까지 끌고 왔단 말인가. 나는 고집스러운 자신을 스스로 원망했다. 나의 고집을 말리지 않은 더스틴을 원망했다. 서쪽 끝 국경을 외국인에게 개방하여 우리를 유혹한 네팔 정부를 원망했다. 싸우는 네팔 사람들을 원망했다. 자기들끼리 싸울 것이지 애꿎은 버스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원망했다.

"Sorry. Many many strike, Nepal. So we poor."(미안. 네팔 많은 폭동. 그래서 계속 가난하다.)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는 우리에게 아저씨가 사과했다. 아저씨가 사과할 건 없는데. 나도 미안하다. 자기 잘못이 아님에도 미안함을 느끼는 아저씨에게 미안하다. 버스를 탄다는 것이 늘 불편하고 위험한 일이어야 하는 네팔 사람들에게도. 우리는 좌석에라도 앉아 있었지만, 좌석도 없이 바닥에 대충 누워 15시간을 달려온 사람들도 있다. 네팔에서 종종 일어난다는 파업도 이런 걸까. 목적지까지 고작 2시간을 남겨두고 가지 못하는 것이 종종 있는 일일까. 미안하다.

아저씨는 인도 푼자비주로 일을 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뒤에 앉은 청년도 일자리를 구하러 간다. 보따리를 들고 앉은 아주머니. 젊은 부부. 나이 어린 청년들. 인도로 간다. 삶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국경이라도 수월히 넘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다시 한 번 폭동꾼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들도 나름의 사정이 있는 걸까. 그들도 우리 옆에 앉은 사람들처럼, 어떻게든 삶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싸우고 있는 걸까.

"그럼 이제 어떻게 해요?"
"저녁이 되길 기다려요. 저녁이 되면 출발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저녁이면 오후 3시? 6시?"
"…잘 몰라요."

다리 건너 사제가 진하게 찍어준 빈디를 이마에 달고, 다시 잠에 빠졌다. 이틀 동안 씻지 않은 더럽고 추한 모습.
 다리 건너 사제가 진하게 찍어준 빈디를 이마에 달고, 다시 잠에 빠졌다. 이틀 동안 씻지 않은 더럽고 추한 모습.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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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조급한 나머지 아저씨를 다그치는 꼴이 되었다. 침착하자. 다시 지루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기다림. 이번에는 6시간 후인 오후 3시를 위한 기다림이 아니다. 잠들고 나면 찾아올 새벽 6시를 위한 기다림도 아니다. 폭동 문제가 해결될, 혹은 해결되지 않을, 밤이라는 막연한 시간을 향한 기약 없는 기다림이다.

버스 사이로 간식거리를 파는 여자아이들이 둘씩 짝으로 돌아다녔다. 나처럼 며칠 못 씻은 게 분명한 어린 여자아이 두 명이 버스 앞에 오이를 들고 섰다.

"Do you like cucumber?"(오이 좋아해요?)

아저씨가 물었다. 저 오이 사주려는 건가. 오이 좋아요. 아니 오이는 좋지만, 저 오이만은 먹고 싶지 않아요.

"오이 좋아요."

거절하면 속마음을 들킬 것 같다. 아저씨가 여자아이를 불렀다. 아이는 오이를 길게 반으로 잘랐다. 오이의 하얀 속살 위에 빨간 향신료를 뿌렸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건넸다. 오이는 아이의 때 묻은 손에서 15시간 동안 버스를 타느라 15시간 동안 씻지 못한 아저씨의 손으로, 그리고 못지않게 더러운 내 손으로 전달되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했다. 진심으로 감사했다. 하지만 감사한 마음과 땟물 묻은 오이를 먹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더러운 오이를 먹고 언제 출발할지도 모를 이 깡통 버스 안에서 아프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싫다고 할 걸. 오이 알레르기가 있다고 할 걸. 속이 안 좋다고 할 걸. 바보. 바보!

오이를 건넨 아이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가 오이를 맛있게 먹을 것인지, 무척이나 궁금한 모양이었다. 오이는 흥부네 박처럼 컸다. 거대한 오이 두 조각을 도저히 다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오이 반쪽을 아저씨에게 내밀었다. 눈치 없는 아저씨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는 됐으니 시원하게 잘 먹으라는 뜻이렷다. 마지막 희망 더스틴. 오이를 건넸다. 제발 도와줘. 제발 한쪽만 먹어줘. 내 속마음을 뻔히 아는 더스틴이 아저씨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놈.

먹자.

오이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이왕이면 시원하고 맛있게. 아저씨와 더스틴이 오이를 받지 않은 걸 후회할 만큼. 아삭. 시원하다. 상큼하다. 네팔 사람들이 왜 버스에서 오이를 사 먹는지 알 것 같다. 아저씨의 마음까지 시원하게 삼켰다.

영겁의 시간이 흐르고 겨우 오전 9시가 되었다. 버스 밖으로 나와 야채볶음면으로 배를 채웠다. 더스틴은 버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밥도 안 먹고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영원처럼 계속되는 기다림에 지쳐 인간 기능을 상실한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버스가 곧 출발할 수 있으니 자리를 지키고 있겠단다. 버스가 출발해? 꿈도 크시지.

나는 더스틴에게 짐을 맡기고 혼자 마을을 배회했다. 마을 옆에는 강이 흘렀다. 다리를 건넜다. 오토바이를 탄 네팔 청년 하나가 따라붙었다.

"오토바이 탈래?"
"아니."
"버스는 언제 갈지 몰라. 오토바이 타고 국경 넘을래?"
"아니."
"오토바이 살래? 이거 타고 국경 넘으면 안전해. 1만 루피."
"됐어."
"옆 마을에 가면 내 친구들이 생선 굽고 있어. 먹으러 가자."
"싫어."
"너 뭐야? 오토바이 타는 것도 싫다, 빌리는 것도 싫다, 생선도 싫다. 다 싫어?"

도대체 말이 되는 제안을 해야 승낙을 할 거 아니니. 나는 건달 청년의 말을 반쯤 무시하고 다리 건너 힌두 사원으로 갔다. 신문 가판대 크기의 자그마한 사원이었다. 오지랖 넓은 네팔 청년이 사원으로 들어가 사제를 끌고 나왔다.

"빈디 찍을래?"

오토바이와 생선구이에 비하면 그나마 받아들일만한 제안이다. 그래. 찍자. 사원으로 다시 들어간 사제가 빈디를 들고 나왔다. 사제는 기도를 중얼대더니 내 이마에 붉은 빈디를 찍었다. 언제 다시 씻을 수 있을지 모를 내 이마에, 매우 굵고 진하게. 오, 힌두신이시여. 제발 무사히 국경을 넘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 밤 쾌적한 숙소에서 이 빈디를 지울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새벽 1시, 다시 멈춘 버스

새벽 1시. 버스가 멈춘 지 스물한 시간이 지난 시각. 버스가 출발했다. 앞서 나간 두 대의 버스를 바짝 쫓아, 우리가 탄 버스가 조용하게 굴렀다.
 새벽 1시. 버스가 멈춘 지 스물한 시간이 지난 시각. 버스가 출발했다. 앞서 나간 두 대의 버스를 바짝 쫓아, 우리가 탄 버스가 조용하게 굴렀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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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오후 3시가 되었다. 아저씨가 우리를 불렀다.

"We go Nepalgunj. In Nepalgunji, bus to another border." (우리는 네팔간지로 간다. 네팔간지에, 다른 국경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우리는 못 가요. 외국인이라서 다른 국경으로는 못 넘어가요."

네팔과 인도를 연결하는 국경은 여러 곳이 있지만, 외국인이 넘을 수 있는 국경은 세 군데다. 인도 시킴에서 네팔로 갈 때 우리가 이용한 카카르비타와 대부분의 여행자가 이용하는 소나울리, 그리고 마헨드라나가르. 네팔간지로 가는 건 뻔한 헛걸음이다. 아저씨가 다른 승객들에게 우리의 말을 전했다. 버스에 탄 사람들이 일제히 외쳤다.

"Oh. No Problem!"(오, 문제 없어요!)
"Yes! Yes, Problem!(아니요, 문제 있어요!)"

더스틴과 내가 한목소리로 외쳤다. 네팔간지까지 갔는데 국경을 넘지 못하면, 다시 15시간의 끔찍한 버스를 타고 소나울리로 가야 할 것이다. 못 간다. 네팔간지로 간다던 사람들도 어찌된 일인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방향으로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우리는 다시 곰처럼 미련하게 기다렸다.

지루했다. 끔찍하게 더웠다. 몇 분 정도는 훌쩍 뛰어넘어가도 좋으련만. 시간은 믿음직스럽고 고지식한 친구처럼, 1분 1초를 단 한 번 건너뛰지 않고 곧이곧대로 흘렀다. 저녁 6시가 되었다. 아저씨가 다시 소식을 들고 찾아왔다.

"Problem, no fixed."(문제. 해결 안 돼.)
"그럼 어떻게 해요?"
"8 o'clock. Dark and safe. Then all the buses here. Go together."(8시. 어둡고 안전하다. 그때 여기 버스들 함께 간다.)
"위험하지 않겠어요?"
"We go together at night. OK."(밤에 함께 가면 괜찮다.)

괜찮다고 말하는 아저씨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했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재수 없는 일들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사람들이 돌을 던진다. 날아온 돌에 창문이 깨져서 창가에 앉은 더스틴이 다친다. 돌 때문에 타이어가 빠져서 버스가 멈춘다. 사람들이 버스 안으로 들어와 외국인인 우리를 납치한다. 누군가 위험한 무기를 들고 나타난다. 

괜한 걱정이었다. 저녁 8시가 되도 버스는 출발하지 않았으니. 새벽 4시에 멈춘 버스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밤 10시를 넘겼다. 자정이 넘었다. 그리고 새벽 1시. 버스가 멈춘 지 21시간이 지난 시각. 버스가 출발했다. 앞서 나간 두 대의 버스를 바짝 쫓아, 우리가 탄 버스가 조용하게 굴렀다. 무서웠다.

온종일 버스가 다시 출발하기만을 기다렸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버스에 탄 네팔 사람들도 긴장한 눈초리였다. 불을 켜지 않은 어두운 버스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작게 빛나는 서른 쌍의 눈빛들이, 창밖을 보며 초조히 상황을 살폈다.

30분쯤 달리던 버스가 멈췄다. 버스 차장이 승객들에게 무언가 외쳤다. 사람들이 일제히 버스에서 내렸다. 폭동에 나선 사람들의 공격이 시작된 건가? 당장 버스에서 내려 피신하라는 명령인가? 의지할 데 없는 우리는 아저씨를 찾았다. 이미 밖으로 나가 있던 아저씨가 창문 밖에서 가엾은 우리를 발견했다.

"국경까지 안 쉬니까, 미리 볼일을 보래요."

버스가 지나는 어두운 마을의 풍경은 스산했다. 타이어 빠진 버스 한 대가 마을 한쪽에 주저앉아 있었다. 네팔 경찰들이 마을을 삼엄히 지키고 서 있었다. 버스는 굼뜨게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다시 30분. 원형 교차로에 닿은 버스는 둥근 길을 따라 5바퀴를 돌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원형 교차로에서 다음 길로 빠지는 길이 나올 때마다, 젊은 버스 기사는 운전대를 잡은 두 팔에 잔뜩 힘을 주고 망설였다. 사람들이 반쯤 일어나 논쟁을 벌였다. 그렇게 2바퀴를 더 돌던 버스가 다시 주저앉았다.

사람들이 버스 중앙으로 모여 조용히 토의를 시작했다. 표정들이 진지했다. 새벽 2시. 어딘지 모르는 네팔의 서쪽 끝. 폭동으로 인해 가지 못하는 버스. 심각한 네팔 사람들의 표정. 겁이 났다. 화이트 아웃 속에서 해발 5500m 쏘롱 라를 넘을 때보다 더. 브레이크가 고장 난 버스를 타고 히말라야 산자락을 급히 내렸던 때보다 더.

자연재해나 사고가 아닌, 사람이 우리를 해칠 수 있다는 생각에 더 두렵고 무서웠다. 5분 정도의 웅성거림 끝에 결론이 난 듯했다. 승객 일부가 짐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짐을 들고 용변을 보러 가는 건 아닐 텐데?

"Mahendranagar. Strike. People fight now. If bus go, people attack. Very dangerous. What do you do now?(마헨드라나가르 폭동. 지금 사람들이 싸우고 있다. 버스가 가면, 공격한다. 매우 위험하다. 어떻게 할 거냐?)"

어떻게 할 거냐고? 새벽 2시에, 어딘지 알 수 없는 마을 한가운데서, 폭동 때문에 갈 수 없는 버스에 앉아 있는 이 상황에, 어떻게 할 거냐고? 태어나서 받은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게다가 주관식이다. 답이 없다. 답이 없지만 답을 내야 했다. 아저씨의 표정은 초조했다. 상황이 급하니 당장 결정하라고 다그치는 듯했다.

"그럼 지금 이 버스는 어디로 가요?"

내가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Dhangadhi. 20 min from here. There is another border. We go there."(20분 거리에 당가디 마을. 거기에 국경이 있다. 거기로 간다.)
"그럼 지금 내리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요?"
"I don't know. Maybe, they must go Mahendranagar."(잘 모른다. 아마 마헨드라나가르로 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빨리 판단하자. 외국인인 우리가 국경을 넘으려면 마헨드라나가르로 가야 하지만,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을 쫓아 새벽 2시에 어딘지도 모르는 이곳을 정처 없이 걸을 순 없다. 무엇보다 이 아저씨 옆에 붙어 있어야 한다. 국경을 넘지 못하고 소나울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지금에 와서 문제는 국경을 넘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이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이다. 당가디로 가자. 

버스가 다시 천천히 굴렀다. 아무리 기다리고 염원해도 갈 수 없는 마헨드라나가르와 달리, 당가디는 정말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더스틴과 나는 버스에서 내린 20여 명의 사람과 한 팀이 되어 벤치에 앉았다. 보따리를 든 젊은 부부와 일자리를 구하러 가는 청년. 그리고 우리의 아저씨. 사람들은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네팔어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어른들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는 아이. 하지만 이들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진 아이. 우리는 신이 난 모기떼의 먹이가 되어, 쏟아져 내려오는 잠을 쫓으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새벽 4시. 작은 소리로 대화하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경으로 간다. 거리는 아직 어두웠다. 국경까지는 걸어서 30분. 20여 명의 사람들이 우리를 감싸고 걸었다. 배낭 무게에 걸음이 늦춰졌다. 사람들과 함께 걸어야 안전하다며, 아저씨가 배낭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버스 안을 가득 채웠던 두려움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무섭지 않았다.

새벽 4시, 네팔의 서쪽 끝, 이름도 알 수 없는 마을에서, 건널 수 없는 국경을 향해 걷고 있지만, 무섭지 않다. 우리는 길을 잃었다. 혼자였다. 길은 아직 뚜렷하지 않지만,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우리 곁에는 어제를, 그제를 함께한 네팔 사람들이 있다. 아저씨가 있다.

국경에 닿았다. 더스틴과 나는 출입국관리사무소로 보이는 작은 건물로 들어갔다. 직원은 시간이 일러 오전 7시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금세 따라오리라 짐작한 네팔 사람들이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작별이다. 우리의 아저씨. 청년들. 젊은 부부. 말없이 웃어주던 아주머니.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걱정해주고 지켜줘서 고맙다고. 아쉬운 마음에 그들의 등을 향해 외쳤다.

"7시까지 기다려야 해요! 잘 가요! 고마워요! 안녕!"

사람들이 돌아봤다. 일자리를 구하러 인도로 간다던 청년이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청년은 국경을 지키는 군인에게 상황을 물었다. 군인의 대답을 들은 청년은 안심했다는 듯, 우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 무리로 달려갔다. 희미한 여명 아래서 그들이 걸었다. 인도를 향해. 여명 때문인지, 그들의 뒷모습이 희미하게 빛났다. 수호천사의 뒷모습처럼.

그리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태그:#마헨드라나가르, #네팔, #네팔 국경, #네팔 인도 국경, #네팔 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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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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