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0만인클럽>은 오마이뉴스가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한 언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매달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유료 독자들의 모임(http://omn.kr/5gcd)입니다. 클럽은 회원들의 후원으로 '10만인리포트'를 발행하고 있는데요, 이 글은 김지영 시민기자가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두 돌 지난 장애아동을 입양해서 잘 키워내고 있는 입양모를 2014년 11월 어렵게 섭외해서 만날 수 있었다. 만남에서부터 현재까지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들은 무척 감동적이었지만 그간 그녀가 받았던 상처들이 적지 않아 보였다. 그녀는 개인 신상에 관한 정보들이 밝혀지기를 무척 꺼려했고 사진 촬영도 할 수 없었다. 이 글은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글에 나오는 입양아 이름은 모두 가명을 썼다. - 기자말
산달은 아직 멀었다. 제왕절개를 했고 일란성 쌍둥이를 낳았다.
 산달은 아직 멀었다. 제왕절개를 했고 일란성 쌍둥이를 낳았다.
ⓒ http://pixabay.com

관련사진보기


# 프롤로그

2007년 어느 날, 한 여인이 산통을 느끼고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산달은 아직 멀었다. 제왕절개를 했고 일란성 쌍둥이를 낳았다. 둘 모두 여아였다. 몸무게 880g, 의사들은 임신된 지 6개월 반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쌍둥이 중 하나가 머리에 물이 차서 빠지지 않고 뇌병변 증상을 보였다. 당장 수술은 불가능한 몸무게였다. 정상적인 분만이 아니었고 아이의 상태도 위중했다. 다른 아기도 모든 게 정상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3일 뒤, 아기들을 남겨두고 생모가 자취를 감추었다. 원무과 직원들이 기록을 추적해 찾아냈지만 병원비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사치일 만큼 생모를 둘러싼 주변 환경은 처참했다. 태어난 아기들은 동거남과 낳은 혼외자식이었다. 생모는 아직 법적으로 이혼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이들을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생모가 친권을 포기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러면 나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생모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이미 세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고, 새로 낳은 장애미숙아를 둘씩이나 키울 능력도 그럴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인큐베이터에 들어간 아기들은 병원 의사와 간호사들의 각별한 관심과 치료를 받았다. 소아과 과장은 이유식을 사다 먹였고, 간호사들은 옷을 사다 입힐 정도였다. 몇 달 뒤 쌍둥이 중 하나가 미국 상류층 가정으로 입양을 갔다. 입양 갈 당시에도 장애수치가 나왔었고 미국 양부모도 그걸 알고 있었다.

미국 국적을 갖게 된 아이는 이름도 제시카가 되었다. 제시카의 양부모는 이미 세 명의 한국 아이들을 입양해 키우고 있었다. 양부모의 큰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제시카에게 뒤늦게 보행이 불가능한 지체장애가 왔다. 제시카를 낳은 생모는 출생기록지에 자기의 기구한 팔자를 닮지 말고 좋은 부모 만나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글귀를 남겼다.

뇌병변이 있던 또 다른 아기는 일 년 동안 중환자실에 있으면서 몸무게를 늘린 후 다섯 차례의 뇌수술을 받았다. 뇌에 차는 물을 빼기 위해 머리에서 소장으로 이어지는 호수관이 심어졌고, 수술 후유증으로 뇌 손상에 의한 학습장애가 왔다. 호수관은 아기가 평생 동안 지니고 있어야 할 생명줄이 되었다. 태어나자마자 발견된 뇌병변 장애로 인해 입양갈 수 없었던 그 아기의 이름은 윤경이다. 일 년에 걸쳐 시급한 수술과 처치를 마친 윤경이는 더 이상 병원에 있을 수 없었고,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영유아 장애시설로 옮겨졌다.

[윤경이와 입양모 이야기]

2008년 5월, 치매와 당뇨 고혈압에 중풍까지 앓아 오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자그마치 십 년 병수발이었다. 삼십 대 후반부터 사십대 후반까지의 인생이 거기에 있었다. 마지막 일 년은 어쩔 수 없이 요양병원에 모셨다. 일 년 동안 매일 오후 네 시면 병원에 가서 시어머니 저녁을 직접 먹이고 집에 돌아와 식구들 밥상을 또 차렸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어깻죽지에 날개가 달릴 줄 알았다. 만날 카페에서 친구들을 만나 커피 마시며 수다를 떠는 호사도 누릴 줄 알았다. 천근만근 가슴을 눌러왔던 돌덩이가 쑥 빠지고 솜뭉치처럼 몸이 가벼워질 줄 알았다. 그런데 가벼워야 할 마음에 허무감만 쌓였다. 시어머니 밥을 먹였던 오후 네 시가 되면 불안함이 밀려왔다. 그 시간이면 가야 하는데 갈 수가 없었고 갈 곳이 없었다. 대신 우울증이 찾아왔다.

윤경이와의 인연... 영유아 장애 시설 자원봉사

정기적으로 영유아 장애 시설에 자원봉사를 하는 친구를 따라 나섰다. 시설에 가면 사랑이 고픈 아이들이 와서 안기고 매달렸다. 와서 안기고 매달리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시렸다. 그런데 안기지도 않고 매달리지도 않는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태어난 지 일 년이 넘었다는데 아직 혼자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배밀이나 겨우 하고 있는 아이였다. 작고 병약한 아이였지만, 도도해 보였다. 그저 나를 자연스럽게 저한테로 이끄는 힘이 있었다. 다가가 안았다. 윤경이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중에는 남편과 두 딸과 아들까지 데리고 봉사를 다녔다. 봉사를 다닌 지 일 년 정도 되었을 때, 원장 수녀님에게 어렵게 허락을 얻어내고 윤경이를 집으로 데려와 하루를 보냈다. 그 날은 어떻게 만지지도 못할 만큼 조심스러웠는데 횟수가 잦아지면서 차츰차츰 그런 마음도 사라지고 일상으로 받아들일 정도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가족들과 함께 놀이동산에 가서 재미있게 놀고 시설로 돌려보낸 다음 날부터 심한 감기로 일 주일을 시설에 가지 못하고 있었다. 원장 수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윤경이가 며칠째 물만 먹어도 토하고 밥이고 뭐고 식음을 끊고 있다고 했다. 시설로 달려갔다. 발에 수액을 꽂은 윤경이가 나를 보자 울음을 터트렸다. 원망이 섞인 울음이었다. 원장 수녀님이 미음을 먹이라 해서 입에 넣어 줬더니 덥석덥석 받아먹었다.

원장수녀님은 '윤경이가 엄마 병이 걸렸다. 데려 가려면 일 주일씩 데리고 있'으라고 말했다.

윤경이와 깊은 정을 쌓아 가고는 있었지만, 입양을 구체적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스물 넷, 스물 하나 꽃처럼 예쁜 딸들도 있었고, 열여섯 듬직하게 커가는 아들도 있었다. 봉사를 다니면서 우울증도 많이 나아지고 있었다. 여전히 금실 좋은 남편과 함께 아웅다웅 이렇게만 살아가도 괜찮은 삶이겠거니 했다.

동생 제시카 키우고 있는 미국 양부모, 윤경이 입양 원해

그러던 가을 어느 날, 윤경이 나이 두 살이었다. 원장 수녀님이 마음 정리를 하라고 했다. 윤경이가 미국으로 갈 거라고 했다. 동생 제시카를 입양해 키우고 있는 미국 양부모가 윤경이 입양을 원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온몸이 으스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눈물을 흘렸다.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남편은 '우리는 어떡하라고' 탄식을 했다. 큰 딸은 "거기를 왜 갔느냐"고, "왜 정을 줘" 가지고. 이제 와서 미국에 가면 한국 말 잊을 때까지 엄마를 생각하고 못 잊을 건데 아이는 얼마나 힘들겠냐고 성를 내면서 말했다. 집으로 데려 오자고. "우리는 어떡하"냐던 남편의 동의는 굳이 필요도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원장 수녀님의 선택이었다.

"미국에 있는 제시카 가족도 모두 여섯이에요 . 하지만 여기 있는 가족들은 자녀들이 거의 다 컸잖아요. 미국에 가면 부모 사랑이 다섯으로 나누어지지만, 여기 집으로 가면 다섯 명의 사랑이 다 윤경이한테 갈 수 있잖아요. 미국에 보내는 것도 나쁠 건 없지만, 한국에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그렇게 윤경이는 우리 집 딸이 되었다.

원장수녀님은 '윤경이가 엄마 병이 걸렸다. 데려가려면 일주일씩 데리고 있'으라고 말했다.
 원장수녀님은 '윤경이가 엄마 병이 걸렸다. 데려가려면 일주일씩 데리고 있'으라고 말했다.
ⓒ http://pixabay.com

관련사진보기


모든 가족이 힘을 모아 입양을 했기에 얼마든지 윤경이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저 잘 먹이고 잘 입히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장애가 뭐고 현실이 어떤지도 알지 못했다.

꾸준히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윤경이를 위해 가까운 지방으로 일 주일에 세 번씩 일 년을 다녔다. 시설에서 소개해 준 곳이었다. 뒤늦게 사는 곳에서 가까운 물리치료실을 찾았고 지금까지 다니고 있다. 처음에는 매일 다녔다. 월요일 감각작업, 화요일 미술심리, 수요일 작업물리, 목요일 언어하고 물리, 금요일 작업물리. 그렇게 윤경이를 데리고 다니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윤경이의 머릿속에 있는 호수관에는 항상 물이 차는데 수압조절을 해야 했다. 윤경이가 태어나고 처음 수술했던 곳까지 찾아가 왼쪽에 있던 호수관을 오른쪽으로 다시 꼽는 재수술을 했다. 뇌수술을 위해 머리를 깎은 윤경이 모습에 또 한 번 한 바가지 눈물을 쏟아냈다. 윤경이 다섯 살 때였다.

십 년 병수발을 했던 시어머니의 빈자리를 윤경이가 대신하고 있었지만, 그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 삶은 누군가를 위해서 빈틈없이 시간을 보내야지만, 살아지게 되어 있는 운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윤경이로 시작해서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 윤경이로 마감이 되는 일상을 살았다.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그런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애들도 다 잘 키워 놨고 십 년 죽도록 몸 고생만 시켰던 시어머니도 돌아가신 마당에 어린 아이를 그것도 장애까지 있는 아이를 데려다 만날 따라다니면서 허청허청 뒷수발 드느라 옴짝달싹 못하는 '미친년'이라고 했다.

한 번은 윤경이와 함께 길을 걷다 큰 딸 아이 학교 학부모를 우연히 만났는데 '혹시 이 아이 큰 딸이 사고 쳐서 낳은 아이 아니'냐는 는 말까지 들었다. 처음 윤경이를 입양할 때, 조심스럽게 우려했던 부분이었는데 역시나 사람들의 저급하고 천박한 호기심에 진저리가 처진 적도 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듣기 고통스러운 말은 윤경이가 나중에 크면 학교생활도 사회생활도 못할 건데 무슨 그렇게 지극정성을 하느냐는 말이었다. 윤경이가 내게 온 순간부터 엄마로서의 삶과 모든 시간은 윤경이를 위해 존재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말을 듣는 순간은 정말이지 가슴에 커다란 대못이 박히는 기분이었다.

윤경이를 키워오는 지금까지 사람들의 이런 편견과 가벼운 호기심에 지쳤다. 윤경이를 향한 가족들의 삶과 진심된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적어진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편견과 호기심과는 무관하게 두 살 반에 와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배밀이나 겨우하던 윤경이는 무럭무럭 잘 커주었다. 오랜 기간 끈질긴 물리치료 덕분인지 읽고 쓰는 거 빼고는 모든 게 훨씬 좋아졌다. 신생아 때 있었던 뇌병변은 완치 판정을 받았고 뛰는 데는 조금 무리가 있지만, 걸음은 곧잘 걷고 계단도 잘 오른다.    

물리치료에 드는 비용과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영상물 판독으로 지적장애 2급으로 장애등록을 했지만, 말도 잘 하고 잘 돌아 다니고 대소변도 혼자 다 처리한다.

오히려 윤경이를 담당했던 신경외과 의사가 윤경이를 대상으로 논문을 쓰고 싶다고 할 만큼 뇌에서 보이는 소견과 윤경이의 실제 상태는 판이할 정도다.

미국에 있는 동생 제시카네 가족과는 트위터로 연락을 계속 하고 있다. 매년 생일이 돌아오면 선물도 주고받고 사진도 보내고 받는다. 제시카 양부모를 한국으로 초청해서 며칠을 함께 지내기도 했다. 손발도 쓰지 못하지만, 지체장애를 앓고 있는 제시카도 양부모의 넉넉한 사랑 속에 살아간다.

윤경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 엄마가 참관해야

하지만 한국에서 장애로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고단한 일의 연속이다. 그런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고통을 배로 감수해야 한다. 윤경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 일이다. 유치원 다닐 때까지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윤경이 담임을 맡은 선생이 문제였다. 입학하기 전에 세 번이나 학교를 찾아가 윤경이 상태를 이야기 하고 입양 사실도 알리고 조심해야 할 사항도 전달을 할 만큼은 했다.

그런데 담임선생이 무조건 엄마가 옆에 앉아 학교 마칠 때까지 함께 있는 참관 수업을 하라고 했다. 읽고 쓰는 거 말고 다른 건 큰 문제가 없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참관 수업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윤경이는 학교에서 친구들을 마음껏 사귀고 즐겁게 학교를 다닌다. 몸무게 17kg으로 얼굴도 귀엽고 예쁜 윤경이는 주위 사람들에게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 어딘가 모자라면 다른데서라도 제 생존능력을 키울 줄 아는 윤경이다.

그런 윤경이가 말하는 다섯 가족에 대한 평가를 보자. 아빠하고 오빠는 윤경이가 예뻐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이제 서른 살 큰 언니는 안 봤으면 하는 무서운 사람 훈육대장이다. 스물여덟 작은 언니는 가장 만만한 사람이다. 스무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있지만, 집에서 싸울 때 거의 비슷한 수준의 대화로 싸움을 하는 유일한 사람이 작은 언니다. 그리고 엄마는 그냥 아무렇게나 놀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 봤을 때 항상 제 뒤에 있는 사람이다. 대체 누가 이렇게 뻔한 속마음을 지니고 있는 윤경이를 보고 장애라고 놀리고 업신여길 수 있단 말인지.

이제 남은 문제는 초등학교 2학년 윤경이의 미래다. 엄마 나이가 벌써 오십대 중반을 넘었다. 큰 딸은 엄마 아빠가 언젠가 가고 나면 윤경이는 자기들의 몫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시내에 시어른들이 남겨 준 3층 단독주택을 개조해 일층에는 카페를 내서 윤경이 몫으로 남겨 줄 예정이다.

2층과 3층에는 언니 둘을 함께 살게 할 생각이다. 큰 딸은 그걸 즐겁게 각오하고 있는 것 같다. 결혼 상대의 첫째 조건이 윤경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다. 다만 큰 언니는 윤경이가 지나치게 과보호되는 그런 어른으로 성장하는 걸 반대한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이것저것 시도하도록 도움을 주는 게 가족들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윤경이 앞으로 장애연금과 입양수당을 합쳐 매달 나오는 80만 원을 가급적 축내지 않고 저축하고 있다. 부모로서 쓸 수 없는 돈이다. 능력이 안 되면 그 돈이라도 헐어 병원비네 물리치료비용으로 써도 무방한 일이지만, 가능한 그 돈 만큼은 손대고 싶은 마음이 없다. 모르는 사람들은 돈을 받아 아이를 키우네 어쩌네 하지만 어디 그 돈 받고 한 번 키워보라고 하고 싶다. 길바닥에 뿌리는 돈도 모자라는 실정이라는 것을 며칠 만에 알게 될 것이다.

사십대 후반에 윤경이를 딸로 맞았다. 삼십대와 사십대를 고스란히 시어머니 병수발에 바쳤고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우울증이 찾아왔지만 윤경이가 그런 나를 구원했다. 이제 남은 인생은 윤경이를 위해 살다 갈 것이다. 다른 자식들이야 다 커서 더 이상 엄마 손이 필요하지 않으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 자식들 덕에 요즘은 한 숨을 덜고 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깨어 일어나 잠들 때까지 온종일을 윤경이와 함께 했지만 학교를 보내고 나니 엄마에게 자유시간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화, 목요일은 학교에 보내고 네 시까지 자유다. 토요일은 아침에 도자기 공방에 갔다가 성당 다녀오면 하루가 간다. 일요일에는 언니들한테 윤경이를 맡기고 바람 쐬러 줄행랑을 치기도 한다.

지금 윤경이는 저를 중심으로 하는 다섯 식구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중이다. 윤경이를 윤경이 엄마에게 내주었던 원장 수녀님의 말씀이 틀리지 않았다.

다섯 명이 주는 다섯 개의 사랑이 온통 윤경이에게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로 본 장애입양
통계청 지표로 2010년 장애입양은 모두 252건이었다. 이 중 국내입양은 47건 해외입양은 205건이었다. 2011년 장애입양은 국내가 65건 해외가 그보다 세배를 웃도는 210건이었다. 2012년 역시 국내장애입양은 52건에 그친 반면 해외장애입양은 148건에 이르렀다. 같은 기간 비장애아동의 국내입양은 해외입양에 비해 두 배를 웃도는 통계를 보여주었다. 아직 우리사회에 뿌리 깊은 장애에 대한 편견이 그렇지 않아도 편견을 벗지 못하고 있는 입양에 대해서도 예외를 두지 않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태그:#장애아입양, #공개입양, #입양
댓글19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