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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전국철도노동조합이 KTX 여승무원의 직접고용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 철도노조의 집회 민주노총 전국철도노동조합이 KTX 여승무원의 직접고용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 철도노조 KTX승무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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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조선 공장에서 세모조선의 배를 만드는 사람은 세모조선 직원이어야 한다. 네모마트에서 네모마트 유니폼을 입고 일하는 아줌마는 분명 네모마트 직원이어야 하고, 동그라미대학교에서 청소하는 청소부도 동그라미대학교가 고용을 챙기고 임금을 지급하는 게 맞다. 또 별표방송통신업체의 유니폼을 입고 별표업체의 케이블 설치 및 수리를 담당하는 노동자는 당연히 별표방송통신업체 직원이어야 하리라.

마찬가지로, KTX 승무원직에 지원해 입사하고 KTX 유니폼을 입고 KTX를 타고 일하고, 온갖 KTX 광고에 노출된 노동자는 당연히 KTX를 운영하는 코레일(한국철도공사) 직원이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생각한다. 왜? 그게 '상식'이니까. 게다가 예쁜 여승무원들을 뽑아 KTX의 얼굴인 듯 앞세워 홍보했으니 코레일에서 아주 아끼는 직원이리라 짐작할 것이다.

근데 이게 다 틀렸다. 우리는 매일같이 대감댁의 일을 해주고 있는데, 대감님이 우리를 고용한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대감댁의 숟가락은 몇 개고 장은 언제쯤 가장 맛있게 익고 어느 벽에 보수공사가 필요한지 우리만 아는데, 대감님은 우리를 본 적이 없다고 하고 이윽고 우리는 대감댁의 일을 한 적이 없는 게 된다. 어리둥절하다. 우리를 고용한 것은 과연 누구인가?

2월 26일 대법원이 KTX 해고 여승무원들에 대해 한국철도공사에 소속된 근로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하고 파기환송했다. 1심과 2심에서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성립했다'고 본 것을 완전히 뒤집고 모두 반대로 해석했다. 3월 6일 서울 용산 철도회관에서 만난 전국철도노조 KTX승무지부 김승하 지부장과 정미정 총무는 대법원 판결을 듣고는 그냥 멍했다. 단 한 번도 질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현실 같지 않았다.

법원이 노동사건 재판기간을 엿가락처럼 한없이 늘이며 노동자들을 지치게 하고, 상급심으로 올라갈수록 사용자 편을 들어주는 형국이다. KTX 여승무원들의 싸움은 2006년 해고 이후 9년을 이어왔고, 2008년부터 시작한 소송은 대법원 판결까지 7년이 걸렸다. 게다가 파기환송심이 확정될 경우, 여승무원들은 1인당 약 1억 원의 돈을 갚아야 한다. 1억 원은 2008년, 노조가 낸 임금지급 가처분신청이 법원에 받아들여져 받은 4년간의 임금과 소송비용이다. 가혹하게도 9년 싸움의 결과물이 빚 1억 원으로 돌아올 판이다. 

KTX 여승무원들을 사용한 건 위탁업체인가, 코레일인가?

대법원이 1심과 2심의 판결을 뒤집고 KTX 해고 여승무원들에 대해 한국철도공사에 소속된 근로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 시위에 나서는 여승무원들 대법원이 1심과 2심의 판결을 뒤집고 KTX 해고 여승무원들에 대해 한국철도공사에 소속된 근로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 철도노조 KTX승무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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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2월, KTX 개통을 앞두고 대대적인 여승무원 고용이 이뤄진다. 무려 300대 1에 달하는 경쟁률이었다. 미모와 교양을 갖춘 20대 초중반의 여성들이 대거 입사한다. 이들 중에는 항공사 승무원을 지원하던 사람도 많았다. 입사할 때 이들은 'KTX 승무원직'이라는 타이틀을 보고 왔다.

당시는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별로 없어, 승무원들은 자신들이 위탁업체인 ○○유통 소속 직원이며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이 뜻하는 바를 거의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유통은 당시 한국철도공사(당시 철도청)의 자회사였다. 그러니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가 문제가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아울러 채용단계부터 철도청이 관여했다. 입사 후 교육도 한국철도공사 연수원에서 공사 직원에게 받았다. 대법원은 여승무원들이 안전업무와 별개의 외주화한 서비스 업무만을 수행했다고 보았지만, 이들은 당시에 안전교육도 받았다. 안전교육은 한국철도공사 내부의 교육일정에 동참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2004년 KTX가 개통될 때는 대대적인 홍보에 이용되었다. KTX 광고에는 거의 다 여승무원이 등장했다. '지상의 꽃', '지상의 스튜어디스' 등 온갖 화려한 문구 아래 미모의 여승무원들은 코레일 직원들과 같은 색, 같은 디자인의 유니폼을 입고 광고에 출연했다.

개통 후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여승무원들이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나갔다. 그들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안전 매뉴얼, 고객응대 매뉴얼 등을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만들어나가야 했다. 10년 묵은 KTX를 들여온 까닭에 고객들의 불평불만도 많았는데, 그것을 여승무원들이 최일선에서 다 받아냈다. 그래도 힘든 줄 몰랐다고 한다. 왜? 그녀들의 생애 첫 직장이었기 때문이다. 또 처음 개통되는 KTX였으며, 그런 KTX의 첫 여승무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여승무원들에게는 이런 말이 수시로 전해졌다. "철도청에서 TO(정원)가 안 나서 현재는 ○○유통 소속이지만, TO만 나면 그리로 옮길 것이다", "철도청이 한국철도공사가 되면 정직원으로 채용할 것이다", "승무원은 핵심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외주화할 수 없다" 등. 철도청이 전하는 그런 말은 달콤하고 편안했다. 여승무원들은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2년 6개월 뒤 상황은 급변했다. 2005년 철도청은 한국철도공사로 바뀌었고, 2006년 한국철도공사는 승무업무를 코레일관광레저로 위탁하면서 여승무원들에게 위탁업체 직원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누누이 들은 감언이설이 새빨간 거짓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여승무원들은 어이가 없어 거부한다. 그들은 공사가 직접 자신들을 고용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리하여 파업에 돌입한다. 하지만 한국철도공사는 전환을 거부한 여승무원 280명을 해고해버렸다.

여승무원은 안전과는 전혀 관련 없는 서비스직? 

2008년까지 3년 동안 KTX 여승무원들은 투쟁을 이어갔다. 생에 가장 아름다울 시절 3년이 그렇게 흘러갔다.
▲ 시위도중 끌려나가는 여승무원들 2008년까지 3년 동안 KTX 여승무원들은 투쟁을 이어갔다. 생에 가장 아름다울 시절 3년이 그렇게 흘러갔다.
ⓒ 철도노조 KTX승무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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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소송에서 핵심쟁점은 여승무원들이 한국철도공사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았고 종속적인 관계에서 일했느냐 하는 점이었다. 앞서 1, 2심에서는 여승무원들의 업무가 실질적으로 업무 독자성이 없었고, 한국철도공사 측의 일개 사업부서로 기능했다고 봤다. 또 한국철도공사가 여승무원들의 제반 근로조건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모든 것을 뒤집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객실 온도 및 조명 체크, 승객 인사, 노약자 승하차 보조, 안내방송 등이 여승무원들의 주업무였다고 보고, 한국철도공사 소속 직원인 '열차팀장'의 안전 관련 업무와는 구분돼 있었음을 근거로 들었다. 여승무원들이 열차 안전과는 상관없이 서비스 업무만 보았고, 그래서 한국철도공사의 직접적인 지시 없이 독자적으로 업무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설득력이 있을까? 우선 여승무원들과 열차팀장은 같은 공간에서 일했다. 또 여승무원들의 주업무는 객실 온도나 조명 체크 따위가 아니라, 고객 민원 처리였다고 증언한다. 고객의 민원에는 안전과 직결되는 일들이 수시로 발생했으며, 그런 상황에서 열차팀장의 관여나 지시 없이는 일의 수행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승무원들이 열차팀장을 상관이라 여긴 것도 그래서였다.

"우리가 안전업무와 관련이 없으면 사전에 안전교육은 왜 받았겠습니까? 열차 내에서의 업무는 안전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를 구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요. 승객의 안전이 최고로 우선시돼야 하는 서비스니까요. 안전과 관련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최일선에서 그에 대응했습니다. 만약 비행기 승무원의 업무가 고객 안전과 별개라고 하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될까요?"

김승하 지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하나 더. 열차팀장이 승무원 업무평가도 했단다.

사회의 정의를 믿었다는 죄

그저 얼굴 예쁘장한 아가씨들이었던 이들이 9년의 싸움을 끌어올 수 배경은 그들이 한없이 순수했기 때문이었다.
▲ KTX 여승무원들 그저 얼굴 예쁘장한 아가씨들이었던 이들이 9년의 싸움을 끌어올 수 배경은 그들이 한없이 순수했기 때문이었다.
ⓒ 철도노조 KTX승무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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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승무원들은 싸웠다. 처음 파업을 하면서는 일주일쯤 파업하면 끝날 줄 알았다. 그만큼 당연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6년의 일은 오늘까지 이어졌다. 그들은 그 세월을 어떻게 보냈을까? 소송에 들어가기 전에는 300명이 넘는 노조원들이 생계를 다 팽개치고 열심히 투쟁을 이어갔다. 노조원들은 거의 합숙생활을 하다시피 하며 살았다.

"우리끼리는 '군대 갔다 왔다'고 표현해요. 또 가기만 한 게 아니라, 전쟁터에서 직접 싸웠다고 말하죠. 우리에겐 투쟁, 데모, 파업, 이런 용어들이 낯설었어요. 대학교 다닐 때 등록금 투쟁도 안 해봤는데요. 그런데 상황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죠."

김승하 지부장의 말이다. 근 3년 그들은 매일처럼 거리로 나가 집회를 열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 그때는 20대 중반, 생에서 가장 예쁠 나이였다.

"봄날, 시위하던 중에 미니스커트에 예쁘게 차려입은 또래 여성이 지나가면 한없이 부러웠어요. 우리는 매일 잠바때기 입고 시위현장에 있어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었겠어요?"

정미정 총무의 말. 그랬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이 그렇게 거리에서 흘러갔다.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1년 후에는 노조원이 90명으로 줄었고, 3년 뒤엔 34명만이 남았다. 생계 때문에 싸움을 지속할 수 없는 이들이 있었고, 소수이지만 사측의 회유에 넘어가 지위를 확보받고 복귀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윽고 이들은 1심 판결만 나와도 거기에 따르겠다는 한국철도공사의 약속을 믿고 소송에 돌입했다. 법정싸움이 장기화할 거라는 건 알았지만 워낙 증거가 많아 법원에서도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철도공사는 약속을 어기고 1심 판결을 따르지 않았다. 

사법부는 그 한 건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데 7년을 흘려보냈다. 7년이라니, 왜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노동자를 처벌하는 판결은 빠르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판결은 오래 걸린다는 항간의 이야기는 여기서도 확인된다. 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약자인 노동자들은 하루하루 지치고, 점점 더 구석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이들은 해고 당시 20대 중반의 사회초년생들이었다. 그리고 좌파니, '종북'이니 하는 말은 전혀 모르는 그저 얼굴 예쁘장한 아가씨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9년의 싸움을 끌어올 수 있던 배경은 무엇일까? 인터뷰 끝에 김승하 지부장의 말에서 의외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될 거란 생각을 못했어요. 그저 우리가 옳으니 당연히 해결될 거라 믿었죠. 또 우리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에 의심이 없었고요. 사회를 불신할 줄 알고 계산할 줄 알았다면 오히려 지금까지 싸우지 못했을 거예요."

그들의 죄는 순수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겁도 없이 이 사회의 정의를 믿었다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의 패배

KTX 여승무원들은 대법원의 판결 이후 총회를 열어 다시 한 번 싸우자고 결의했다. 이유는 따로 없다. 억울하기 때문이다.
▲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시위 KTX 여승무원들은 대법원의 판결 이후 총회를 열어 다시 한 번 싸우자고 결의했다. 이유는 따로 없다. 억울하기 때문이다.
ⓒ 철도노조 KTX승무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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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판결 후 해고 여승무원들은 총회를 진행했다. 20대 중반의 아가씨들은 이제는 대부분 '애기 엄마'가 되어, 자녀를 데리고 총회에 나온 이들도 있었다. 총회 분위기는 어땠을까? 생각만큼 우울하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아줌마가 돼서 그런지 더 강인해진 듯도 하다고 전한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다시 한번 싸우자고 결의했다. 이유는 따로 없다. 억울하기 때문이다. 김승하 지부장이 계획을 말한다.

"우선 파기환송심 열심히 준비해야 하고요. 한국철도공사에도 조건 없는 대화를 요구했습니다. 가능한 대로 다시 거리에 나갈 계획도 세우는 중이고요."

사회정의 하나 믿고 파업에 돌입한 이 여성들에게 1억 원의 돈을 토해내라는 것은 어느 나라의 정의인가? 총회에서 과연 1억 원의 돈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서민들에게 1억 원이란 돈은 '거의 전부'와 같다. 정미정 총무가 입을 열었다.

"정말 힘든 건… 제가 선택한 것이고, 선택해서 지금까지 온 거니까 제가 책임을 지는 건 괜찮아요. 그런데 사랑하는 남편에게까지 책임을 지우게 된다는 게 너무 가슴이 아파요."

이들은 해고 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도 못했다. 3년 투쟁 기간은 일도 못했고, 또 이후 경력단절에, 투쟁이력이 있는 이들이라 취업이 쉽지 않은 것이다. 일생의 중요한 시기가 그렇게 희생되었다. 아마 그에 대한 위자료를 1억 원쯤 받아도 시원찮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노동자이고 싶을지 궁금했다. 김승하 지부장이 대답한다. 

"노동자이고 싶어요. 지금도 코레일, KTX, 철도 그런 단어만 어디서 들려와도 내장이 끊어지는 느낌이에요. 저의 '첫' 직장이었습니다. 우리가 힘겹게 일해서 기반을 닦아놓았다는 자부심이 있고요. 2년 6개월이지만 온 마음을 다해 일했습니다. 돌아가고픈 고향과 같은 느낌이죠."

인터뷰 내내 차분하게 조곤조곤 이야기를 이어가던 김승하 지부장이 '첫 직장'이라는 말에 기어이 눈시울을 붉힌다.

"혼자서 바꿀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이 많이 들었어요. 피해의식도 많이 생겼고요. 한때 불신과 우울이 겹쳐 정말 이 나라를 떠나고 싶었죠. 그런데 그렇다고 이 나라를 버릴 수도 없더라구요. 왜냐면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 여기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다 여기 있어서 떠날 수도 없는 거예요."

그래, 이런 나라 따위 버리고 떠나고 싶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KTX 여승무원들의 이야기는 아마도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기록될 것이다. 그들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이고, 그들의 패배가 우리 모두의 패배가 될 것이다. 그러니 그대에게 마음이란 게 있다면 이 작고 여린 가슴들에 조금의 힘이라도 돼주어야 한다. 그래야 명백한 패배이더라도 진정한 패배는 아닐 수 있으리라. 아, 봄이 오는데 아프다.


태그:#코레일, #불법파견, #여승무원, #K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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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강사, 전 안성신문 기자, 전 이규민 국회의원 보좌관, 현)안성시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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