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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7년 1월 14일 오전 11시께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씨가 물고문으로 사망했고, 엿새 뒤인 1월 20일에서야 사건이 검찰로 송치됐다. 검찰은 사흘 전인 1월 17일 신창언 당시 서울지검 형사2부장을 팀장으로 하는 수사팀을 구성했지만, 이는 직접수사가 아닌 치안본부의 수사를 지휘하기 위한 용도였다.

검찰은 사건을 송치받은 1월 20일부터 23일까지 나흘간 수사를 진행했다.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는 사건이 검찰로 송치되기 직전인 1월 19일 수사팀에 합류했다. 이로써 당시 '4년차 검사'였던 박 후보자는 "권위주의 체제를 종식시킨 사건"(검찰 자체평가)을 수사하게 됐다. 하지만 그가 검찰의 '부실수사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주장에 직면해 있다.

그동안 검찰은 박종철 고문치사-축소·은폐 사건(아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를 "검찰 임무의 중요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라고 자평해왔다. 검찰이 잘 수사해서 경찰이 은폐했던 물고문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박 후보자쪽도 부실수사 논란에 "당시 수사팀 일원으로 최선을 다해 수사했다"라고 밝혔다.  

박 후보자의 부실수사 논란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당시 수사기록을 검토하는 일이 중요하다. 하지만 검찰은 두 차례에 걸친 유가족의 자료공개 신청에도 수사기록만은 공개하지 않았다. 다행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오픈 아카이브스'에 1066쪽에 이르는 1·2차 수사기록이 공개돼 있어 최소한의 수준에서나마 그의 부실수사 논란을 검증할 수 있게 됐다.

'고문 경찰관' 강진규-황정웅-반금곤 피의자 신문

서기호 의원실에서 제공한 1994년 11월 18일자 <동아일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검찰 수사 주역들(촬영일은 1987년 3월 1일)' 사진. 왼쪽에 위치한 인물이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며 가운데는 안상수 현 창원시장이다.
 서기호 의원실에서 제공한 1994년 11월 18일자 <동아일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검찰 수사 주역들(촬영일은 1987년 3월 1일)' 사진. 왼쪽에 위치한 인물이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며 가운데는 안상수 현 창원시장이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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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먼저 701쪽에 이르는 1차 수사기록(1987년 1월 20~23일)을 검토한 결과, 박 후보자는 물고문 경찰관인 강진규 경사와 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장을 신문했지만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은폐와 윗선 보고 등을 제대로 추궁하지는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나중에 '축소·은폐'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던 '윗선'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것이다. 이로 인해 1·2차 수사에서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치안본부 5처장의 혐의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먼저 박 후보자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됐던 강진규 경사를 처음으로 신문한 때는 치안본부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지난 1987년 1월 20일이었다. 신문은 강 경사가 구속돼 있던 영등포교도소 보안과 사무실에 이루어졌다.

박 후보자는 신문 관례대로 학력과 경력, 가족관계, 재산, 건강, 담당업무 등을 확인했다. 이어 사건 당시 박종철 열사의 옷차림과 외모를 물은 뒤 치안본부로 연행한 후 그에게 신문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진술하라고 강 경사에게 요구했다. 특히 물고문한 경위를 캐물으면서 욕조의 온도와 물의 양, 욕조의 형태까지 확인했다. 강 경사가 답변에 나섰다.

"약 1분 내지 1분 30초가 지나자 박종철은 반항을 하지 않더니 조한경이 머리채를 욕조 밖으로 끌어올리자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박 후보자는 박종철 열사가 의식을 잃은 이후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물었고, 강 경사는 조한경 경위의 지시에 따라 그를 침대에 눕혔다고 진술했다. 이어 박 후보자는 의사가 사건 장소에 도착한 시각, 응급처치 장면, 사망 인지 시점 등을 확인한 뒤, "박종철 열사를 때리거나 기타 다른 방법으로 폭행한 일이 있느냐?"고 캐물었다. 이에 강 경사는 "전혀 없었다"라고 전면 부인했고, 박 후보자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축소·의혹-윗선 보고 등 추궁하는 질문 없어 

박상옥 검사가 지난 1987년 1월 20일 고문경찰관 강진규 경사를 신문하고 남긴 조서 중 일부.
 박상옥 검사가 지난 1987년 1월 20일 고문경찰관 강진규 경사를 신문하고 남긴 조서 중 일부.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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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후보자는 사흘 뒤인 1월 23일 강 경사를 대상으로 두 번째 신문에 나섰지만 그 내용에서 1차 신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행 당시 박종철 열사의 행색, 담당업무, 신문 내용, 폭행과 사망 경위 등 1차 신문에서 물었던 것을 되풀이했다. 다만 강 경사가 사건 직후 처음 조사받은 시기와 전기고문 여부 등을 '처음으로' 추궁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신문을 통틀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은폐와 윗선 보고 등을 캐묻는 질문은 없었다. 1차 신문에서는 강 경사의 직속 상급자를 물었고, 그가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5처장(치안감) 등을 언급했지만, 이들에게 사건을 '언제', '어떻게', '무엇'을 보고했는지 등은 물어보지 않았다. 2차 신문에서도 "피의자 소속 계장이나 과장, 부장 등 상급자는 왜 박종철이 사망하였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고 있었나?"라고 추궁하는 데 그쳤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박종철 열사가 사망한 직후인 지난 1987년 1월 15일 오후 3시께 "조사경찰관이 박군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책상을 '꽝' 치니 박군이 '억' 하며 쓰러져 심장쇼크로 사망하였다"라고 사망경위를 발표했다. 하지만 나흘 뒤인 1월 19일에는 결국 '고문치사'를 인정했다. '심장쇼크사'로 사건을 축소·은폐하다가 결국 '고문치사'를 인정한 것이다.

수사를 지휘하고 있던 검찰이 이러한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경찰이 고문치사를 인정하기 전에 최환 당시 서울지검 공안2부장이 고문치사 가능성을 검찰 안에서 제기한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후보자는 두 차례에 걸친 강진규 경사 피의자 신문에서 사망 원인 축소·은폐와 윗선 보고 등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특히 박 후보자는 나중에 2차 수사(1987년 5월 18일 이후)로 구속됐던 황정웅 경위와 반금곤 경장도 1차 수사에서 조사했지만, 물고문 가담 여부나 축소·은폐와 윗선보고 과정을 확인하거나 추궁하지 않았다. 

수사팀 막내검사라 잘 모른다고?

한편 박 후보자는 1·2차 수사 때 물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던 강진규 경사 ·황정웅 경위·반금곤 경정뿐만 아니라 정아무개 경정, 박종철 열사의 하숙방 여주인과 그의 장남, 서울대 선․후배(2명) 등 수명을 조사했다. 사건의 핵심 관련자들과 주변인들을 두루 수사한 셈이다. "수사팀 막내검사라 사건을 잘 모른다"라는 일각의 주장을 무색하게 하는 대목이다.

김학규 박종철 열사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박 후보자가 수사팀 막내검사가 맞긴 하지만 4년차 검사로서 강진규 수사를 담당하는 등 아주 중요한 검사였다"라며 "박 후보자에게 나중에 공소유지까지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건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태그:#박상옥, #박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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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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