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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론조사만 놓고 보면, 우리는 역사를 잊은 민족이니 미래가 사라질 수도 있겠군!'

3·1운동 관련 뉴스를 하나 읽다가 저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게 됐다. 그 뉴스는 우리나라 성인 남성 중 절반 이상이 3·1절의 정확한 연도를 모른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성인 1005명을 대상으로 한일관계를 조사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를 담은 기사였는데, 응답자 중 32%만이 3·1운동이 1919년에 일어났다고 정확히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강제병탄이 있었던 1910년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19%인 반면,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은 23%로 더 많았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었다.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P)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격언을 그 기사에 빗대보면 필자의 독백이 전혀 틀린 말이 되지 않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미래가 없는 민족이 되는 것일까? 미래의 어느 한 시점에 우리 민족은 그대로 사라지고 말 것인가?

서대문 형무소에 걸려있는 태극기
▲ 태극기 서대문 형무소에 걸려있는 태극기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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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퀴즈식의 여론조사

삼일절이나 광복절, 혹은 한국전이 발발된 6월 말 경이 되면 저런 역사 퀴즈(?)식의 여론조사 결과가 어김없이 언론에 공표된다. 그런 기사들은 질책을 담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생산되기 일쑤인데 이런 방식이다.

<역사의식 실종? 국민 절반이 3·1절이 언제 일어났는지 몰라...>
<충격적인 청소년들의 안보 불감증! 6·25전쟁이 북침이라고?>

여론조사는 칼럼이나 사설로 재생산되는데 질책의 강도를 더 높인 상태로 기사화 된다. 그런 칼럼이나 사설은 작성자의 성향에 따라 온도차가 있기는 하지만 역사교육 강화라는 결론으로 도달한다.

그런 결론이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교육 강화라는 명제는 큰 범죄만 일어나면 제시되는 '인성교육 강화'와 닮은꼴을 한다. 교육 강화를 외칠 때는 큰 보폭으로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점으로 회귀해 있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강화만하면 무엇 하는가 내용이 달라져야지!

# '3·1절은 아이구아이구'로 외웠다!

학창시절에 필자는 역사를 좋아했지만 국사 시간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연표를 '달달달' 외우고, 인물을 암기하는 방식의 수업 시간이 지루했기 때문이다. 다른 과목들과 마찬가지로 국사도 그저 시험용 학습을 했을 뿐이다.

'3·1절은 아이구아이구(1919년)다'는 식의 암기 방식으로 삼일절 페이지에 '별표'를 했던 것이다.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이 종전이 됐고, 그에 따라 1919년 1월에 파리강화 회의가 개최됐는데 거기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는 부분에도 '밑줄 쫙'을 했다.

'별표'를 치고 '밑줄 쫙'을 하는 단편적인 암기는 시험 문제를 풀 때는 유용했었다. 하지만 그런 기계적인 암기는 필자의 머릿속도 기계적으로 만들었다. 인과관계가 명확한 각 사건들이 파편화되어 단절된 지식으로 머릿속에 저장됐기 때문이다. 분명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우리민족을 위한 정책이 아니었다. 여기서의 '민족자결'은 패전국 식민지에 속해 있던 민족들의 자결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 일본은 승전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혜를 입지도 않은 민족자결주의를 두고 3·1운동의 중요한 원인으로 별표를 했던 것이다. 3.1운동과 민족자결주의 사이에 인과관계를 찾을 생각은 못하고 그저 기계적인 암기에만 열중했던 것이다. 

필자의 학습은 거기까지였다. 시험범위가 거기까지였고 필자가 배운 교과서에도 그 이상의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3·1운동과 민족자결주의와의 간극을 그대로 남겨둔 채 교과서를 덮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에도 무언가 찜찜했는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3·1운동을 준비했던 사람들은 파리강화회의가 강대국들의 놀이터라는 것을 몰랐나? 너무 순진했던 거 아니야?'

일본 대사관 앞
▲ 소녀상 일본 대사관 앞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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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편적 지식 극복하기

파편적 지식으로 필자의 머릿속에서 따로 놀고(?) 있었던 민족자결주의와 3·1운동의 간극이 명쾌하게 극복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교복을 벗고, 또한 군복(?)까지 벗고 나서야 그 연결고리를 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역사읽기>라는 딱딱한 서술 방식이 아닌, 스토리텔링식으로 기술된 역사책을 읽다가 그 연결고리를 알아냈던 것이다. 만약 스토리텔링식의 역사책을 읽지 못했다면 아직까지도 그 둘은 서로 따로 놀고 있을지도 모른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은 독일의 조차지였던, 청도(靑島) 맥주로 유명한 중국의 산동반도와 중부태평양의 남양군도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요구한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남아있는 패전국 독일의 식민지에 대한 침탈 야욕을 보인 것이다. 한마디로 민족자결주의와 어긋난 행위를 했던 것이다. 이런 일본의 행태는 중국과 태평양 지역에 관심을 보이던 미국의 이익과 정면으로 배치됐다.

3.1운동을 준비했던 지도자들은 이런 일본의 야욕과 미국의 이익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충돌할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이다. 비록 같은 제국주의 국가였다 할지라도 미국의 팽창은 우리에게 이익을 전해줄 것이라고 판단했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일제 치하에 있던 우리의 운명을 미국이라는 또 다른 외세의 힘을 빌어 극복한다는 점에서 분명 한계가 명확했다. 어쨌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독립운동 진영에 큰 파동을 전해주었다.

신채호
▲ 단재 신채호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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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면... '기계적 지식' 극복해야

2017년부터 국사가 수능 필수 과목으로 지정됐고, 또한 이제부터는 초등학생들도 정식과목으로 배우게 됐다. 이런 것만 놓고 보면 우리는 분명 역사교육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초중고생들은 필자가 국사책에 별표를 하며 기계적으로 암기를 했던 방식에서 탈피하여 능동적이고 종합적으로 한국사를 배우고 있을까?

수험 대비용으로 '달달달' 외운 파편적인 지식은 오히려 한국사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기계적인 암기는 시험의 공포가 사라지는 순간부터 급격히 뇌리에서 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계적인 암기로 국사를 배웠던 사람들은 서두에 언급한 역사 퀴즈 여론조사에 걸려들어(?) 질책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  

신채호 선생이 강조한 역사 기억하기는 '3·1절은 아이구아이구(1919년)다'라는 식이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를 종합적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거기서 교훈을 얻자는 게 단재 선생의 의도였을 것이다. 기계적인 암기로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을사조약'과 '을사늑약'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직시하지 못할 테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에도 실립니다.



태그:#3.1절, #단재신채호, #역사교육, #역사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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