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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7일 새벽 1시 10분. 온 나라가 잠든 시각, 사상 초유의 날치기 사태가 일어났다. 우리는 이 시간,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해야 한다. 세월호가 국민의 생명을 바다에 수장시켰다면, 이날 원자력안전위원회(아래 원안위)는 국민의 안전을 '날치기'했다.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안위 전체회의는 '월성 1호기 계속운전 허가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1983년 운전을 시작해 설계수명 30년 만료로 2012년 가동 중단됐던 월성 1호기는 2022년까지 재가동할 수 있게 됐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했던가. 그동안 국회가 보여준 날치기 수법 그대로 이번엔 원안위가 국민의 뒤통수를 쳤다.

짜고 치는 고스톱?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직무유기

사실 논의 과정부터 석연치 않았다. 원자력안전기술원이 수명 연장의 적합성 여부를 판단할 자료인 월성 1호기 심의자료를 원자력안전위원에게 거짓으로 보고했다. 원안위는 월성 1호기 안정성 평가 자료들을 한국수력원자력(아래 한수원)의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공개를 거부했다. 의혹은 묻혔고 쟁점은 해소되지 않았다.

월성 1호기, 해소되지 않은 쟁점들

[쟁점1] 최신 기술 기준이 적용되었나? - 월성1호기는 체르노빌 사고 이후 만들어진 최신 안전기준이 적용되지 않았다.
[쟁점2] 설비개선 비용은 적정한가? - 월성1호기와 쌍둥이 원전인 캐나다 젠트리2호기의 수명연장비용은 4조 원인데 반해 월성1호기는 고작 5600억 원이다. 수명연장 안전비용이 왜 차이가 나는 것인가?

[쟁점3] 월성 1호기 지진에 대한 안전성은 확보되었나? - 62개의 활성단층이 지진안전성 심사에서 누락되었다.

<한국원전잔혹사>(김성환·이승준 지음 / 철수와영희 펴냄 / 2014.11. / 1만5000원)
▲ <한국원전잔혹사> 표지 <한국원전잔혹사>(김성환·이승준 지음 / 철수와영희 펴냄 / 2014.11. / 1만5000원)
ⓒ 이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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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원안위'는 뭘 하는 곳이기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중차대한 결정을 '날치기'할 만큼 뻔뻔하단 말인가.

김성환·이승준 두 <한겨레> 기자가 쓴 <한국원전잔혹사>를 보면 한수원, 원안위, 원자력안전기술원 등 한국 원자력 산업계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비전문가인 현역 기자가 철저하게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핵 마피아'의 실체와 한국 원전사업의 현주소를 해부한다.

원안위는 원자력 안전 규제를 독립적으로 담당하는 국가기구이다. 원자력의 생산과 이용에 따른 방사선 재해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공공의 안전과 환경보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책은 견제와 감시 역할을 해야 할 원안위의 독립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2011년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기관이었던 원안위를 대통령직속기구로 공식 출범시켰다. 1960년대 초, 원자력이 도입된 지 50년만이다. 원자력 관련 법률도 50년 동안 '원자력법' 단일 체계로 유지되다 2011년 7월 원자력진흥법, 원자력안전법, 원자력안전위원회법으로 분리됐다. 구조적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취임 이후 원안위를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기관으로 옮기려다 반발을 샀고 결국 총리실 산하로 이관시켰다. 이 과정에서 위원장의 직위가 장관급에서 차관급으로 낮아졌다. 국무회의, 에너지 관계 장관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상실했다. 견제 역할은 물론 독립성도 약화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견제와 감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원자력산업계는 흔히 '선수가 심판을 겸하는 경기'에 비유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1993년 "원자력 안전기관은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원자력 진흥조직이나 기구로부터 효과적으로 독립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기본 안전 원칙'을 제시한 바 있다(본문 104쪽). '선수'와 '심판'이 뒤섞여 '그 나물의 그 밥'이 되어버린 한국 원자력 산업계의 현실은 국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실제로 이번 월성1호기 수명연장 심사 과정에서 원안위는 의혹과 쟁점은 외면한 채, '제 식구 감싸기'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원안위는 월성 1호기 안전성 평가 자료들을 공개하라는 요구에 대해 '한수원의 영업비밀'이라느니, '한수원의 재산'이라느니 하면서 공개하지 못한다는 입장을 비쳤기 때문. 자료는 공개하지 않으면서 안전하다는 주장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원안위의 모습은 이미 규제 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한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원자력 전문가주의, 폐쇄성, 그런 걸 깰 수 있는 사회적 통제를 생각해야 하는데 지금은 원자력 테크노크라트들이 외부 비판에 '뭣도 모르는 소리 한다'는 식으로 고압적으로 대한다. 일본의 경우 민간 회사인 도쿄 전력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하기 전까지 정부에 자료를 안 줬다고 한다. 원전이 치명적인 위험으로 치닫기 전까지 버틴 것이다. 정보의 공개와 사회적 통제, 이런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 본문 110쪽 중에서

한수원, 그들은 언제부터 '핵 마피아'가 되었나

전문가주의와 폐쇄성으로 무장한 채 '그들만의 리그'를 벌이고 있는 원자력 산업계는 '핵 마피아'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핵 마피아'라는 말은 원전 비리와 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는 원자력 산업계의 폐쇄적인 인적 구조를 빗댄 말이다.

관피아, 모피아, 철피아 등 각 분야의 여러 '마피아'들이 활개를 치지만 '핵 마피아'가 특히 위험한 이유는 이들의 행태가 국민의 생명을 송두리째 앗아갈 광범위한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뒷돈을 받고 중고·가짜·미검증 불량 부품을 썼다가 들통 난 원전 부품 납품 비리가 대표적이다. 한국 원전의 안전은 이미 돈다발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국의 원전 23기를 운영·관리하고 있는 한수원은 한국전력에서 분리해 나온 에너지 공기업으로 자산규모 46조7177억600만 원의 재계 서열 22위다. 원자력과 수력의 발전의 독점적 권한을 보유하며 한국전력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한수원을 이끄는 주요 임원진과 핵심 인력은 한국전력 시절 입사한 이들이 지배적이다. 한수원의 인적구조와 사내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한국전력의 모습을 짚어봐야 하는 이유다. 책에서는 한국전력의 사내문화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한국전력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복잡하고 독특한 사내 문화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공기업인 탓에 군사독재 정부 시절부터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정치인, 관료, 군인 출신 등 정권의 측근이 '낙하산 사장'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다. 역대 사장 18명 가운데 대부분이 정치인, 관료, 군인 출신이라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지금까지 한국전력 출신은 2명뿐이다. (중략) 이런 배경 탓에 늘 정권의 눈치를 보는 간부들, 지역 중심의 인사, 학연 등이 중심이 된 파벌, 상명하복식 군사문화가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돼왔다." - 본문 79쪽 중에서

"그만큼 배타적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에 대한 한수원 직원들이 자기 평가도 그리 후하지는 않다. 감사원이 2010년 한수원 직원 956명과 한전KPS 등 정비 관리 업체 직원 29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원전비리 원인분석을 위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상명하복식 파벌 문화에 대한 우려가 컸다. 전체 응답자의 45.8%(한수원 직원 43.2%)가 '한수원에는 상사의 부당한 지시라도 따르는 문화가 팽배하다'고 답했다.

또 전체 응답자 중 27.1%(한수원 직원 20.1%)는 "한수원 직원들을 순환 보직 없이 동일 사업소에 장기 근무할 경우 납품업체 등과 유착하게 되는 등의 비리 발생이 개연성이 있다"고 답했다. (중략) 조직 시스템을 통한 내부 통제에 대한 신뢰도 떨어졌다. 응답자의 23.5%(한수원 직원 17.9%)는 '한수원 임직원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비리를 저지를 수 있는 등 내부 통제에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 - 본문 80~81쪽 중에서

이 책의 저자들은 "2012년 3월, 고리원전 1호기의 전원 상실 사태가 벌어졌을 때, 100여명이 넘는 한수원과 하청업체 직원들이 이를 일사분란하게 숨길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한수원의 조직문화를 말해준다"(본문 81쪽)며 "어쩌면 원자력산업계가 '원전 마피아'라는 원치 않는 비난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부패한 특정 개인의 탓이라기 보다 반성할 줄 모르는 업계 전반의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한국의 원전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가. 아니, '제대로'를 묻기 이전에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국민이 알 수 있는가. 알 수 없는데 어떻게 검증하고 견제하며 올바로 이끌어갈 수 있단 말인가. 사회적 견제망에서 벗어나 있는 원전은 끔찍한 재난을 몰고 올 개연성이 높다. 지속가능한 안전 사회를 후대에 물려주고 싶다면, 무엇보다 '핵 마피아'의 손에 내맡겨진 원전에 대한 민주주의적 통제력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하다.

덧붙이는 글 | <한국원전잔혹사>(김성환·이승준 지음 / 철수와영희 펴냄 / 2014.11. / 1만5000원)

이 기사는 이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한국 원전 잔혹史 - 지속 가능하고 안전한 사회를 물려주고자 고민하는 시민들에게

김성환.이승준 지음, 철수와영희(2014)


태그:#원전, #원전마피아, #월성1호기, #한수원, #원자력안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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