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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나라 최초의 인물 사진 모델은 강화도 유수를 지낸 분이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러던 차에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 접견 대신이었던 신헌이 쓴 <심행일기>(沁行日記)를 읽다 보니 사진에 대한 글이 있지 뭔가. 강화 유수가 사진을 찍었는데 꽤 정묘하더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오호라, 이때 찍었던 사진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인물 사진이구나'라고 생각했다.

1876년에 일본과 맺었던 조일수호조규, 즉 강화도조약의 우리 측 대표는 판중추부사였던 신헌이었다. 그는 전권을 명령 받은 그날부터 조약을 맺고 도성으로 돌아가 왕에게 보고를 올리던 날까지의 한 달여 동안을 글로 남겼다. <심행일기>에는 강화도조약을 맺기까지의 전모가 낱낱이 담겨 있다. 회담이 막바지로 치닫던 병자년(1876년) 정월 30일(양력 2, 24)에 쓴 일기를 보자.

(일본 측의 수행원) 미야모토 오카즈가 (전어관 즉 통역관) 최조를 보내서 말을 전했다. "행중에 사진의 묘수가 있는데 사진을 찍고 싶으면 즉시 그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비록 감사하지만 내가 지금 병에 걸려서 바람을 쐬거나 노천에 앉을 수가 없다. 놓아두는 것이 좋겠다"고 답했다.(중략) 그 후 유수의 사진을 보았는데, 과연 정묘해서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만 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사진이 바로 그 최초의 인물 사진이구나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강화도 조약을 맺기 위해 한 달 동안 일본 대표단은 강화에 머물렀고 그때 강화 유수를 모델로 해서 사진을 찍은 것은 맞지만, 그 사진이 우리나라 최초의 인물 사진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앞서 중국 연경(현 북경)에서 찍은 이의익의 사진이 우리나라 최초의 인물 사진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물 사진은 이의익

 1862년 연행단의 정사였던 이의익
 1862년 연행단의 정사였던 이의익
ⓒ 명지대학교 한국사진사 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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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에 명지대 박주석 교수가 한국사진학회 학술지에 발표한 '사진과의 첫 만남-1863년 연행사 이의익 일행의 사진 발굴'이라는 논문에서 보면 연행사 이의익 일행이 중국 연경(현 북경)에서 찍은 사진 6점이 현재까지 확인된 것 중 한국인을 모델로 한 가장 오래된 사진이라고 한다. 박주석 교수는 연행사 일행의 행적이 기록된 <연행일기(燕行日記)> 내용도 조사해 당시 연행사 일행들이 찍은 사진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 사진들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 사진사가 조선군 포로들과 그들을 구하기 위해 미 전함에 오른 조선 관리들의 모습을 찍은 것이 가장 오래된 사진이라고 알려져 왔다. 또 프랑스 사진가가 역관 오경석을 촬영한 사진도 가장 오래된 한국인 사진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앞선 사진들이 있음을 박주석 교수의 연구 논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862년 10월에 청나라로 간 연행단의 수행원들.
 1862년 10월에 청나라로 간 연행단의 수행원들.
ⓒ 명지대학교 한국사진사 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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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 따르면, 조선은 청나라로 외교 사절단을 매년 보냈다. 그 사절단을 '연행사(燕行使)'라고 불렀다. 1862년(철종 13년) 음력10월 연행단이 중국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5개월여에 걸친 기간 동안 외교 업무를 보고 조선으로 돌아오기 전에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일행 중 제일 고령이기도 하고 또 연행단의 정사였던 이의익(李義翊)이 독사진을 찍고 그 외의 수행원들도 모여서 촬영을 했다. 그때 찍은 사진들이 현재 런던대에 보관되어 있는데, 현재 전해 내려오는 사진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모델로 해서 찍은 최초의 사진들이다.

조선시대에는 1000호 이상의 군을 도호부로 지정했다. 조선 중기까지 전국에 45개의 도호부가 있었고 강화도 그 중 하나였다. 1627년 1월에 청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인조는 강화로 몸을 피했다. 청군은 빤히 건너다보이는 강화도를 침공할 수 없어 몇 달간 애를 태웠다. 청과 화의를 한 후 도성으로 돌아온 인조는 보장지처(보호를 받을수 있는 곳)로서 강화도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래서 도호부였던 강화를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1627년에서 1895년(고종 32년)까지 총 237명의 유수가 강화에 부임해왔다. 이의익은 204대 강화 유수였다. 그는 강화 유수직을 수행하고 도성으로 돌아간 후 몇 년 뒤 연행단의 정사가 되어 중국의 연경에 갔다. 그리고 일을 다 마친 뒤 러시아 사람이 운영하는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이 바로 우리나라 사람을 모델로 한 최초의 사진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진이라는 용어는 초상화와 같은 개념으로 쓰였다. 인물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를 진영(眞影), 곧 사진이라고 불렀는데 서양에서 원래와 똑같이 그린 그림(photograpy)이 들어오자 그것에 사진(寫眞)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물체를 있는 그대로 똑같이 그리되(寫) 내면의 정신도 담아야 한다는(眞) 뜻이 이 용어에 담겨 있다.

사진에 담긴 강화도는 지금도 계속

'사진'이란 용어는 고려의 대문장가였던 이규보(1168~1241)가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란 문집에서 볼 수 있다. 동국이상국집의 제19권에 '달마대사찬(達磨大師讚)'이라는 시가 실려 있는데, 이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중략) 전할 것은 마음이요(可傳者心兮) 쓸데없는 것은 몸이라(無用者身) 몸이 이미 떠났거늘(身已去矣) 어찌 반드시 상을 그려야 하나(何必寫眞) 상을 그려 마음을 구하는 것은(寫眞求心) 뱀 허물에서 구슬을 구하는 격일세(若尋蛇蛻而索珠) 몸이건 상이건(曰身曰眞) 어느 것은 있고 어느 것은 없으리(孰有孰無) 몸이 꿈속의 물건이라면(身是夢中物) 상은 꿈속의 꿈일세(眞爲夢中夢) (중략)

몸은 꿈 속의 물건이고 상은 꿈 속의 꿈이라고 한 이 시 속에 '사진(寫眞, 진한 파랑 부분)'이란 용어가 들어가 있다.

이규보는 23살에 과거에 합격했으나, 정식 관료가 된 것은 합격한 지 18년이나 지난 41세 때였다. 그가 왕과 권력자들의 신임을 받고 활발히 활동했던 시기는 고려가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던 시기와 비슷하다. 그가 남긴 많은 저작물 역시 강화도 시절에 쓴 것이 많다.

<심행일기>라는 책 속에 한 줄 쓰여 있는 '사진'에 대해 알아나가다 보니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풍경을 담은 사진 중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 촬영 장소가 강화도였다는 점이다.

1871년 6월에 미 아시아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했다. 신미년에 일어난 서양 오랑캐의 침입이라 해서 '신미양요'라고 부르는 전쟁이 바로 이것이다. 이때 미군 전속 종군 사진사가 50여 장의 사진을 남겼는데, 이 사진들 속에 초지진과 광성보 등이 담겨 있다. 군함에서 바라본 강화도의 모습도 있고 또 상륙해서 찍은 사진들도 있다. 그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 사진들은 우리나라를 찍은 최초의 사진이 됐다.

강화도 역사, 계속 된다

 남장포대의 현재 모습
 남장포대의 현재 모습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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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양요 당시의 남장포대. 바다를 향한 곳에 포대를 두고 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남장포대에는 10문의 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신미양요 당시의 남장포대. 바다를 향한 곳에 포대를 두고 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남장포대에는 10문의 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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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고장인 강화도는 사진의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곳이었다. 이규보가 지은 시 속에서 '사진'이란 말을 찾아볼 수 있었고, 또 강화 유수를 역임했던 이의익과 그 일행들을 찍은 사진이 우리나라 사람을 모델로 해서 찍은 최초의 사진이란 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강화도를 찍은 사진이 우리나라 최초의 풍경 사진인 점을 알게 된 것도 새로웠다.

불어오는 바람결에도 봄 내음이 묻어 있는 듯하다. 버드나무 가지도 연초록으로 물이 오른다. 모두가 새 봄을 맞이할 준비에 소리 없이 분주하다. 그 속으로 나들길을 걷는 사람들이 스며든다. 그들은 강화를 눈에 넣고 마음에 그린다.

 강화도의 끝없이 드넓은 들판.
 강화도의 끝없이 드넓은 들판.
ⓒ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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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중에 강화의 오늘을 담는 사람들도 있다. 문화 유적지의 어제와 오늘을 찍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숨어있는 것을 찾아내어 널리 알리기도 하고 이미 잘 알려진 것 중에서 새로운 모습을 찾아내기도 한다. 또 마을의 변모를 담는 사람도 있다. 사라져가는 우리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록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강화에 살고 있는 텃새와 또 매년 찾아오는 철새들을 십여 년 이상 쫓아다니면서 기록하는 사람도 있다.

취미로 시작한 일들이 이제는 의미를 담는 작업이 되었다. 이들의 열정은 재미를 넘어 기록이 되고 있다. 어찌 알겠는가. 지금 찍는 이 사진들이 먼 훗날 오늘의 강화를 증언하는 기록이 될 지. 사진과 관련된 강화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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