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T. S. 엘리엇이란 시인이 그랬던가요?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들고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는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그러나 맞벌이 부부에게 잔인한 달은 3월이 아닐까 싶습니다.

3월 2일은 대부분의 학교에서 입학식을 하는 날입니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우리 둘째 아이는 마냥 신이 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잠이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 맞벌이 부부인 동생이 조카를 맡기겠다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조카가 다니는 어린이집은 입학이 2일이 아니라, 3일이라 아이를 맡길 곳이 여의치 않다는 이유였습니다. 동생이 사는 서울에서 이곳 경기도까지 시간이 꽤 걸림에도 동생은 새벽같이 아이를 데려다 주고 출근을 하겠다고 합니다.

"언니, 우리 애 어린이집은 입학식을 왜 3일에 할까? 월초부터 휴가 내기 좀 그래서 못 내겠어. 좀 보낼게."

아빠 따라 출장 간 조카 녀석... 신났지?

2일 둘째 아이 초등학교 입학식에 참석했습니다. 큰 아이 때는 맞벌이 주말부부라 저는 오전 반차, 그리고 남편은 하루 휴가를 내어 참석했었습니다. 오후에 다시 회사에 들어가야 하고, 또 돌봄교실 추첨이 있어 잔뜩 긴장하고 맘을 졸여서 인지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돌봄교실 추첨에서 떨어지면 아이를 도대체 어디다 맡겨야 할지 고민이었습니다. 하지만 둘째는 육아휴직으로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편안히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하루 돌봐주기로 했던 조카 녀석이 입학식이 끝나도록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동생에게 조용히 카톡을 넣어 봤습니다.

"아직두 안 왔네. 제부 아직 도착 못했대?"
"아이구, 깜빡했네. 언니, 남편이 갑자기 출장을 갈 일이 생겼는데 출장지랑 거기랑 반대방향이라 들렀다 갈시간은 없구. 급해서 아이를 데리고 출장 갔대."
"어머나... 그럼 어찌 일을 본대? 암튼 오늘 안 오는 거지?"

아침 일찍 6살 조카 녀석을 깨워 이곳으로 오려던 제부가 늦어져 그냥 출장을 갔다는 겁니다. 얼마 뒤 동생에게 사진 한 장이 왔습니다.

아빠는 일 보고, 아이는 블록 쌓고
▲ 아빠 출장 동행 기념 아빠는 일 보고, 아이는 블록 쌓고
ⓒ dong3247

관련사진보기


"이모한테 보내주래. 그나저나 언니네 가면서 준다고 보름 나물이랑 반건조 오징어 싣고 출발했는데 그거 하루 종일 싣고 다니면 차에 냄새 배겠네."

원래 오늘 자기를 봐줄 사람이 이모였다는 것을 기억하는 조카가 아빠와 출장 가서 만든 블록 사진을 이모에게 꼭 보내주라 했답니다. 그런데 블록은 뭐지? 출장간 제부가 고민 끝에 아이를 근처 블록방에 잠시 맡기고 일을 봤다고 합니다.

어머나... 어쩜 그리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아침부터 당황하며 아이와 함께 출장을 갔을 제부의 얼굴이 따올라 안쓰러운 맘이 컸지만, 적당히 아이를 맡기고 일을 본 제부의 아이디어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3일 어린이집에 입학한 조카는 적응 기간이라 일찍 하원했습니다. 이날 어쩔 수 없이 동생이 휴가를 냈습니다. 아빠 따라 출장간 조카 녀석은 '또 가고 싶다느니, 어떤 블록을 좀 더 쌓고 싶다느니'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기대도 안 했는데 엄마가 휴가를 내고, 또 아빠와 출장갈지도 모른다는 생각하는 조카 녀석은 요즘 너무너무 행복하다고 한답니다.

이 부부의 고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음 주는 동생 큰 아이 학교 개교기념일! 누가 휴가를 내야 할까요? 새로 오신 부서장의 환영 회식이 있는 동생은 절대 불가를 선언하고, 아이 동반 출장을 다녀온 제부 역시 요즘 너무 바빠 휴가가 어렵다고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조카 녀석들을 저녁에 돌봐주시는 분도 갑자기 본인의 손자들을 둘이나 보게 돼 점점 힘이 부친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고 합니다.

3월은 맞벌이 부부의 마음을 정말 잔인하게 휘저어 놓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언땅을 뚫고 새싹이 나온다는 4월처럼 건강하게 잘 자랄 아이들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시간이려니 합니다. 하지만 '오늘 바람은 꽃샘추위가 아니라 겨울 바람인 것처럼 정말 차가워'라는 동생의 말이 비단 날씨 때문만은 아닌 듯싶습니다. 맞벌이 부부의 3월, 정말 잔인하다. 잔인해!


태그:#입학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