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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표지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표지
ⓒ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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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약속이 없는 일요일 저녁에는 소파에 푹 파묻혀 오디션 프로그램 <K팝스타>를 본다. 2~3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최선의 나', '최고의 나'를 뽑아내야 한다는 중압감. 어린 친구들이 이러한 중압감을 이겨내고 프로처럼 당당히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면 그 자체가 너무 감동적이라 주책스럽게 눈물이 나곤 한다.

먹던 과자도 옆으로 물리고 어느새 심각할 정도로 몰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 괜시리 민망함을 느낄 때도 있다. 이게 뭐라고,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들이 어린 친구들이라서 그런 것 같다. '아니, 저 어린 친구가 벌써 어떻게 저런 실력을 갖게 된 거지' 싶은 것이다.

'아니, 저 어린 친구가 벌써 어떻게 저런 감성을 갖게 된 거지? 아니, 저 어린 친구가 어떻게 우리 어른들의 마음을 이리도 속절없이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거지? 아니, 저 어린 친구는 도대체 뭘 먹고 큰 거지? 저 어린 친구는 천재인가?'

젊음의 조숙성, 천재성은 언제나 감탄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천재는 더는 우리의 라이벌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들 앞에서 질투심도, 시기심도 느끼지 않는다. 그저 경탄하며 박수칠 뿐이다.

눈물까지 찔끔하며 박수를 치고 난 후 혼자만의 시간. 슬며시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같은 인간일진데, 나는 왜 이모양이람 하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든다. 만약 그 천재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처지라면 한숨의 깊이는 더 깊어질 것이고, 한숨의 길이는 더 길어질 것이다. 천재는 그들 뒤에 태어난 이들에게만 영감을 주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천재는 천재에 앞서 태어났던 사람들에게는 경미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좌절감과 박탈감을 안겨준다.

어린 친구의 실력과 그 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내 실력. 누가 보더라도 어린 친구가 낫다. 그렇다면 나는 이 길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구루라 일컬어지는 말콤 글래드웰의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를 읽으니 꼭 포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이다. 천재형과 대기만성형. 

우리에게는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란 소설로 유명한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프린스턴 대학 1학년 때 문예창작 과목을 처음 듣는다. 글쓰기에 재미가 붙은 조너선은 2학년 때도 다시 문예창작 과목을 듣기로 한다. 그리고 그해 여름 할아버지가 살던 우크나이나에 딱 한 번 놀라갔다 돌아온 후 우크라이나에 관한 소설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는다. 10주만에 300쪽짜리 소설의 초고를 완성했다.

그의 첫 소설 <모든 것이 밝혀졌다>는 나오자마자 큰 호평을 얻는다. "마음 가는 대로 이야기를 지어내자"고 마음 먹은 후 몇 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우리는 보통 이런 이야기에 큰 호감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우리 삶은 젊은 시절에 이미 다 판가름이 나는 것이라고.

하지만 반대의 이야기도 많다. 1988년, 로스쿨을 졸업하고 법무법인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벤 파운튼은 평소에 하고 싶었던 소설을 쓰기 위해 일을 그만둔다. 파운튼은 당시의 기분을 낙하산이 제대로 펴질지도 모르는 상태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전업 작가의 삶을 살기 위해 철두철미했던 전직 변호사답게 그는 계획대로 움직였다.

아침 7시 30분에서 점심 때까지 글을 쓰고 20분 휴식 후 서너 시간을 더 일하는 원칙을 엄격하게 지켰다. 결국, 그는 몇 편의 단편 소설과 장편 소설을 써내 평단의 찬사를 받게 된다.

<타임스>는 그의 소설 <체게바라와의 짧은 만남>을 읽고 마음이 저미었다고 말했고, 헤밍웨이 제단에서는 그에게 상을 주었으며, 그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올해의 책에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벤 파운튼은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는 달리 대기만성형 인간이었다. 이 모든 찬사는 그가 변호사를 그만 둔 뒤 18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초보 작가 시절에는 투고하는 소설마다 적어도 30번의 퇴짜를 맞았고, 발표도 못하고 넣어둔 장편 소설을 쓰기 위해 4년을 투자했던 파운튼은 마흔여덟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촉망받는 '신진'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책에는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 교수 데이비드 갈렌슨이 창조성과 조숙성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통념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밝히는 작업에 착수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1980년 이후 발표된 대표 시 11 작품을 선정해 이 시들을 지을 당시 시인의 나이를 가려보았다. 나이는 각각 이랬다. 스물세 살, 마흔한 살, 마흔 여덟 살, 마흔 살, 스물 아홉 살, 서른 살, 서른 살, 스물여덟 살, 서른여덟 살, 마흔 두 살, 쉰아홉 살. 갈렌슨은 천재성이 나이와 상관 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고 말한다.

앨프레드 히치콕은 쉰네 살에서 예순 한살 사이에 <사이코> 등의 작품을 쏟아냈고, 마크 트웨인은 마흔 여덟 살 때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펴냈으며, 대니얼 드포는 쉰여덟에 <로빈슨 크루소>를 발표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에 빛을 볼 뿐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나이가 찰 만큼 찬 후에 빛을 볼 뿐인 거라는 거다.

그렇다면 천재형 인간과 대기만성형 인간의 차이는 무엇에서 비롯될까. 말콤 글래드웰은 인상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와 폴 세잔을 들어 이야기한다.

피카소 같은 천재형들은 개념적으로 작업을 한다고 한다. 탐사나 실험이 이들에게는 필요없다. 처음부터 가고 싶은 곳의 대한 명확한 아이디어가 있고 이 아이디어를 따라 그저 달려갈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피카소는 어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을 얻는 순간 이미 그의 작품은 완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반면 세잔 같은 대기만성형들은 실험하듯 작업에 임한다. 그림을 그려가며 그 속에서 답을 찾아 헤맨다. 실제로 세잔은 비평가 귀스타브 제프루아의 초상을 3개월 동안 80번 넘게 작업한 후 결국 실패했고, 화상 앙브로와주 볼라르의 초상화는 150번이나 다시 그린 후 작품을 버렸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다시 그리고를 반복하는 것. 대기만성형 인간에게는 깨달음이 찾아오지 않기 때문에 이렇듯 계속 시행착오를 겪어나가며 조금씩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대기만성형 인간에 대해 갈렌슨은 이렇게 말했다.

"대기만성형 예술가의 목표는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거기에 이르는 과정이 잠정적이고 점진적이다. 목표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달성했다는 느낌을 갖기 힘들다. 그 결과 그들의 경력은 간혹 하나의 목표를 추구하는 일로 점철된다. 그들은 같은 주제를 반복적으로 그리면서 시행착오를 통해 조금씩 방법을 바꾼다. 작업이 단계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리고 시작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들에게 밑그림 작업은 하나의 이미지를 찾기 위한 조사 과정이다. 그들은 그림을 완성하는 것보다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에 걸쳐 점점 실력을 갈고닦으면서 그림을 발전시킨다. 그들은 자신의 부족한 능력을 수없이 탓하며 쉼 없이 노래하는 완벽주의자이다."

대기만성형 인간에 대해 말콤 글래드웰도 이렇게 덧붙인다.

"대기만성형 예술가는 뛰어난 성취를 이루기까지 비슷한 실패를 겪는다. 그들이 절망과 분노 속에서 몇 번이나 다시 시도하는 작품은 전혀 빛을 볼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반면 신동은 처음부터 천재성을 드러낸다. 신동이 뚝딱 해치우는 일을 대기만성형 예술가는 꾸역꾸역 해낸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인내와 믿음이 필요하다."

대기만성형 인간은 점점 발전한다. 젊었을 땐 형편없는 실력이던 그들은 '꾸역꾸역' 그 일을 계속 해낸 끝에 커다란 성취를 일구어낸다. 그래서 대기만성형 인간을 보기란 쉽지 않다. 언제 빛을 볼지 모르는 그들을 기다려 줄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말콤 글레드웰은 이러한 대기만성형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를 끝까지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누군가가 주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잔에게도 그런 친구들이 있었다. 에밀 졸라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에밀 졸라는 매우 현실적인 방법으로 세잔을 옆에서 도왔다. 그는 세잔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이제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가르쳐줄게. 방세가 한 달에 20프랑이고 점심과 저녁 두 끼를 먹는데 하루 2프랑이 드니까 한 달에 60프랑이 필요해. 거기에 화실 임대비용을 내야 해. 제일 싼 곳이 한 달에 10프랑일 거야. 캔버스와 붓, 물감을 사는 데 10프랑을 잡으면 한 달에 모두 100프랑이 들어. 나머지 20프랑은 세탁비, 전기세, 잡비로 쓰면 돼."

나는 천재 이야기를 좋아한다. 특히 그들의 괴짜 같은 면을 찾아보는 것을 좋아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장면은 페이스북의 창시자 마크 주커버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 <소셜 네트워크>에서 주인공 마크가 추운 겨울날임에도 불구하고 날씨도, 주위의 이목도 상관하지 않고 맨발에 슬리퍼를 끌며 하버드 교정을 뛰어다니던 장면이었다. 나는 결코 세상에 무심할 수 없기에 이렇듯 세상엔 무심하면서 자기 자신에겐 날카롭게 집중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막연히 동경하는 마음을 품게 되는 것 같다.

반면 내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는 언제나 지난한 과정을 겪은 끝에야 결국 어딘가에 닿을 수 있었던 평범하지만 위대한 누군가의 이야기이다. 절망하고 좌절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기에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있었던 건 재능이라기 보단, 인내와 믿음이었다. 인내와 믿음 이 두 가지만 갖고 "20년간 머리를 싸맨 끝에" 비로소 그들은 천재라는 호칭을 얻게 된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대기만성형 인간일 것이다. 깨달음보단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조금씩 발전하는 것이다. 세상은 속도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고, 우리 주위에는 언제나 천재형 인간들이 있다. 그렇다고 주눅들 필요 있을까. 우리에게도 매일을 살게 하는 인내와 믿음이 있지 않은가. 포기하고 싶을 땐 말콤 글래드웰의 이 말을 기억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시행착오를 거쳐 답을 찾는 작업방식 자체가 결실을 보려면 오랜 세월이 걸릴 수밖에 없다."

대기만성형인 우리가 미미하게 성장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말콤 글래드웰/김영사/2010년 03월/1만5천원)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 참을 수 없이 궁금한 마음의 미스터리

말콤 글래드웰 지음, 김태훈 옮김, 김영사(2010)


태그:#말콤 글래드웰,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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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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