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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7일 국방부 청사 앞 고 주락철씨의 노제 당시 모습. 사과를 요구했던 국방부 관계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2월 27일 국방부 청사 앞 고 주락철씨의 노제 당시 모습. 사과를 요구했던 국방부 관계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 6·25 국군포로 가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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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한 남자의 기구한 인생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처구니없는 비보를 내가 접한 때는 지난 2월 25일 낮이었다. 한 통의 전화가 내게 걸려왔다. 전화를 걸어온 이는 (사) 6·25 국군포로 가족회 한영복 대표였다. 많은 분들에게는 생소한 단체인 '6·25 국군포로 가족회'에는 정말 가슴 아픈 사람들이 모여 있다.

6·25 국군포로 가족회에 속한 회원들에게는 크게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이들의 고향이 전부 북한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우리에게는 '인권 유린'이 자행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아오지 탄광'이 이들의 고향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이들의 아버지가 전부 '대한민국 국군 포로'라는 점이다. 어찌된 일일까?

좌측으로 움직이는 순간, 기관총에서 '탕'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약 6만 명 정도의 국군이 전쟁 포로로 북에 끌려 갔다. 이후 북한당국은 생포한 국군 포로들에게 사상 전향을 요구하는 한편 인민군으로 다시 전쟁에 참전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국군포로는 이를 거부했다. '내 조국은 대한민국'이라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것이다.

돌아온 보복은 가혹했다. 제네바 협약에서 정한 포로 처우 조건을 무시했다. 특히 식량 배급은 '주면 고맙고 아니면 말고'였다. 어느 날은 옥수수 알 13개를 식량이라며 배급한 날도 있었다고 한 국군포로 송환자는 증언했다.

그러던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전쟁이 종료되었다. 신문이나 방송을 접할 수 없었던 국군포로였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조각 정보를 통해 전쟁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만간 포로 교환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극은 쉼표가 없었다. 6·25 국군포로 가족회 한영복 대표가 평안남도 강동의 포로수용소에 갇혀있었던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들은 그 사건은 1953년 7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인민군 고위 장교가 갇혀있던 국군포로 전부에게 수용소 연병장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이어 "조국해방전쟁이 우리 공화국의 승리로 끝났다"는 거짓 선전과 함께 연병장 한 가운데에 줄을 긋기 시작했다.

인민군 장교는 남한으로 송환을 원하는 자는 좌측으로, 북한에 남고 싶은 사람들은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때였다. 처음에는 우물쭈물하며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좌측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포로들도 좌측으로, 좌측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고향, 대한민국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다.

그때였다. 포로들이 좌측으로 움직이는 순간, 도열해 있던 인민군의 기관총에서 총알이 발사되기 시작했다. 그 총알은 좌측으로 옮겨가던 포로들의 발밑을 향했다. 순간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오줌을 지리는 사람, 또 무서워 몸을 움츠리고 고꾸라진 사람도 있었다. 자신이 총을 맞았다고 생각하고 기절한 사람도 있었고 울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 또 들려온 인민군 장교의 목소리.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서 선택하라."

그러자 좌측으로 갔던 이들은 그순간 모두 우측으로 발을 옮겼다고 한다. 장교는 웃으며 "공화국의 이름으로 동무들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말을 남긴후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북한에는 국군포로가 단 한 명도 있지 않으며, 스스로 공화국을 선택한 자들만 있다"는 북한의 거짓된 주장의 주요 근거가 되었다고 국군포로 가족회는 주장하고 있다.

돌아온 국군포로, 남겨진 국군포로 현황은?

이러한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6·25 전쟁 후 송환된 국군포로는 공식적으로 8333명이다. 하지만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는 최소한 5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대한민국 국방부가 공식 발표한 내용에서도 이는 사실로 확인됐다. 1997년 10월 국방부는 북에서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는 최소 4만1971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북에 남겨진 국군포로들은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기관총 난사 사건으로 대한민국 송환을 선택하지 못한 포로들은 그후 2, 3일이 지나가던 어느 날, 전부 화물 기차에 실렸다고 한다. 행선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꼬박 하루를 달려 내린 곳이 바로 아오지 탄광이었다.

그곳에서의 삶은 지옥과 다르지 않은 고통이었다. 우리에게는 북한군이 괴뢰군이었다면, 저들에게는 '국군이 괴뢰군'이었다. 그러한 국군포로 괴뢰군이 받아야 할 대접은 인간 이하의 취급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국군포로와 그 자녀들이 겪은 사연은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고 이들은 전했다.

국군포로들은 북한 아오지읍에 하차한 후 그곳의 여러 탄광에 배치되어 탄을 캐는 강제 노역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그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탄을 캐야 했다고 한다.

더구나 생명에 대한 보호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탄광 사고가 빈발했지만 사고를 알리는 뉴스도, 또 이 사고로 국군포로가 죽어도 책임지는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국군포로였고, 괴뢰군이며 반체제 분자인 그들의 죽음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의 여생이었다고 탈북한 국군포로의 자녀들은 증언했다.

북한 인민 번호 43호, 국군포로를 부르는 호칭

특이한 것은 국군포로를 지칭할 때 부른 번호였다. 43호. 이 번호가 국군포로에게 칭하는 사실상의 북한 인민 번호였다. 우리는 탈북자를 보면 북한에서 갖은 고생을 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탈북에 성공한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탈북자조차도 혀를 차며 불쌍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바로 43호, 국군포로였고 그 자식들이었다.

43호로 불리는 국군포로와 그 자녀들은 북한에서도 아주 낮은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 북한에서 살기 위해서 제일 먼저 인민군에 입대해야 한단다. 인민군에 다녀와야 북한에서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고, 대학도 진학할 수 있으며, 주택도 배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군포로의 자녀들은 애초부터 인민군이 될 수 없었다. 괴뢰군 출신의 아버지를 둔 자식이기 때문이다. 인민군이 될 수 없으니 따라서 좋은 직장도 얻을 수 없고 대학도 갈 수 없었다. 오직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아버지에 이어 탄광에서 채탄공으로 일하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래서 탈출했다. 국군포로의 자식으로 북한에서 탄압받으며  인간 이하로 살아야 했지만 아버지의 조국인 대한민국으로 오면 따뜻하게 맞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6·25 전쟁 당시 참전했던 인민군과 그 후손을 북한이 예우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적국인 북한에서는 멸시받는 국군포로 자식이지만 탈북에만 성공하여 우리 역시 대한민국에서 예우받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올해 쉰 세 살인 주락철씨였다. 1994년 국군포로였던 조창호씨가 처음 탈북한 후 현재까지 대한민국에는 97세대의 국군포로 자녀들이 정착했다. 주락철씨 역시 아오지 탄광에서 국군포로 출신인 아버지 주창섭씨의 아들로 태어나 2005년 3월 탈북하여 대한민국에 정착했다.

대한민국으로 돌아가면 그동안 북한에서 받았던 수모를 모두 보상 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어리석은 생각이란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 군번 하나만 대면 적어도 참전 인민군 자녀만큼은 예우해 주리라 믿었는데 이는 그들만의 착각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그들의 아버지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존재였다. 영웅은 고사하고 국군포로인 아버지가 북한에서 생존해 있었다는 사실조차 부정당했다. 이는 국군포로의 사망일만 봐도 그렇다. 현재 우리나라 6·25 국군 포로 병적기록표에 기재된 사망 일자는 모두 똑같다. 1950년 6월 25일. 그날 국군포로는 전부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랬다. 그들의 아버지는 그냥 6·25 전사자일 뿐이었다. 그들이 기대했던 영웅 대접도, 국가로서 책임져야할 최소한의 예우도 없었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목숨을 걸고 탈북한 그들은 이 나라에서 자기 아버지 호적에도 올라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병적 기록표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에 사망한 사람이 어찌 그후 자식을 둘 수 있냐는 것이 대한민국 국방부의 변함없는 논리다. 내 아버지는 그때 죽지 않았다고, 그래서 내가 북한 아오지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해도 대한민국은 우리가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며 이를 수용하지 않고 있다.

국군포로의 생사 여부와 그들을 다시 대한민국으로 송환해야할 책임은 대한민국에 있는데, 오히려 이를 증언하는 그들의 후손을 핍박하고 있는 것이다.

국군포로의 아들, 대한민국에서 자살한 이유

주락철씨가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하는 모습
 주락철씨가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하는 모습
ⓒ 6·25 국군포로 가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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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아오지 탄광에서 태어난 주씨는 이러한 대한민국의 잘못된 정책에 대해 항의하고자 지난 2014년 7월부터 2015년 2월 24일까지 싸웠다. 6·25 국군포로 가족회 회원으로서 그는 아버지의 명예회복과 보훈 정책 개선을 요구하며 국방부 앞에서 매일 1인 시위를 했다.

주씨의 어릴 적 별명은 '남조선 괴뢰군 새끼'였다고 한다. 국군포로인 아버지는 다이너마이트 발파 과정에서 시력을 잃고 '봉사지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주씨 역시 그런 설움과 핍박 속에서 살다가 대한민국 하나만 믿고 탈북하여 아버지의 고향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2005년 3월 도착한 이 나라에서 주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특별한 기술도, 배움도 없는 주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용직 잡부 밖에 없었다. 그렇게 팍팍한 삶을 살면서 주씨는 국군 포로 아버지의 지위를 인정하고 아버지 호적에 자신을 아들로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처럼 당연한 요구는 지금까지도 수용되지 않고 있다.

그러던 지난 2월 13일이었다. 배신감과 분노, 그리고 절망 속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가던 주씨가 접하게 된 국방부 고위 책임자의 발언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국군포로 가족들이 요구해온 국군포로 유해 송환에 대해 '국가적 책무에서 국군 포로는 제외해야 한다'는 국방부 고위 관계자의 발언을 국회 속기록에서 본 것이다.

주씨는 크게 분개했다. 43호로 불리며 북에서 당해온 멸시와 차별이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알게된 주씨는 분노와 절망으로 괴로워 했다. 북의 43호가 남에서도 여전히 43호임을 깨닫고 그는 분노했다고 한다. 그리고 2월 25일, 1962년생 올해 쉰 세 살인 주락철씨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그가 생전 그토록 헌신했던 6·25 국군포로 가족회 사무실이었다. 그곳에서 주씨는 약을 먹었고 그 옆에는 그가 남긴 자필 유서가 놓여 있었다.

지난 2월 24일 주락철씨가 음독 자살을 하기 전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유서 전문
 지난 2월 24일 주락철씨가 음독 자살을 하기 전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유서 전문
ⓒ 6·25 국군포로 가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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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님들에게.
아버지들의 명예를 찾기 위해 전주에서 서울로 와서 보니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다. 북한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데... 내가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서울에 올라왔다. 혼자서라도 끝까지 1인 시위하다가 죽으면 내 시체라도 회원들이 둘러메고 우리의 아버지들의 명예와 돌아온 자식들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 너무나 억울하다. 우리는 북한에서 와서 힘도 없다. 회원들이 똘똘 뭉쳐 반드시 아버지들의 명예를 찾는 것이다. 너무나 안타깝고 분통하구나.

2015. 2. 24 락철이로부터

나는 그 남자의 죽음에 눈물이 났다. 북한 아오지에서 태어난 국군 포로의 아들 주락철, 이름 대신 '남조선 괴뢰군 새끼'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주락철, 그래서 그 지옥을 탈출하여 대한민국의 당당한 유공자 자녀로 살고 싶었던 고 주락철, 하지만 그는 탈북 10년 만에 대한민국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우리나라 국민 수백 명을 죽인 칼(KAL)기 폭파범 김현희가 영웅처럼 예우받는 이 나라에서 왜 조국을 지킨 국군의 아들은 저렇게 죽어야 하는가. '내 조국은 대한민국'이라며 전향을 거부하고 저 아오지 탄광에서 죽어간 그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군번 하나를 가지고 대한민국을 찾아온 그 아들은 이 땅 대한민국에서 왜 저렇게 죽어야 하는가. 나는 주락철씨를 대신하여 대한민국에 묻는다.

그런데 가슴 아픈 일은 또 있었다. 주락철씨의 발인이 있었던 지난 2월 27일, 6·25 국군포로 가족회는 주씨의 시신을 가지고 국방부 청사 앞에서 마지막 노제를 지냈다. 그러면서 "국군포로는 국가의 책무가 아니"라는 망언을 한 국방부 군비통제 관계자의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끝끝내 단 한마디의 사과도 듣지 못했다. 대신 주씨의 시신을 막아선 것은 진압 전경부대였다. 이후 경찰은 노제가 신고되지 않은 집회라며 강제 해산을 명령했고, 만약 3회 이상 불응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전부 체포하겠다고 경고했다. 이것이 주씨에 대한 대한민국의 마지막 '예우'였다. 그는 결국 단 한 마디의 사과도 듣지 못한 채 한줌 넋으로 화장되었다. 과연 대한민국은 이래도 되는가. 이런데도 누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인가. 나는 정말 묻고 묻고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고 주락철씨, 당신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영웅입니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나라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적국에 억류된 미군의 석방을 위해 무엇이든 다 하는 나라다. 미군 유해 송환 역시 마찬가지다. 한 구의 유해라도 인도받기 위해, 비록 적국이라고 해도 외교적 채널을 다 동원하여 무엇이든 다 한다. 이렇기에 적어도 미국 국민은 자신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이는 미국의 기념일만 봐도 알 수 있다. 미국에서 매년 9월 셋째 금요일은 '포로 실종자의 날'로 지정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전쟁 포로에 대한 국가 책임을 상기할 뿐 아니라, 그들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미국이 하는 것이라면 다 좋다고 하는 이 나라 정부가 왜 이런 정책은 따라 배우지 않는가. 묻고 싶다.

국방부는 고 주락철씨에게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한다. 6·25 국군포로 가족회에게 사과하고, 그들을 예우해야 한다. 그들 아버지의 병적 기록표에 거짓으로 기재된 1950년 6월 25일 사망일을 진짜 사망일로 바꿔주고, 그 자식을 그 아버지의 자녀로 호적에 올려줘야 마땅하다. 그래서 그 자녀들이 우리나라 6·25 참전 유공자의 자녀처럼 월 100만 원씩 연금이라도 받게 해 주는 것은 너무도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다.

대한민국과 국방부가 또 명심해야할 일이 있다. 지금은 80세가 다 된 한 국군포로 출신 할아버지의 처절한 분노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포로였던 그는 종전 후 포로 교환 때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 할아버지가 군대 입대하는 손자에게 입대 전날 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절대 용감하게 하지 말고, 피할 건 피하고 절대 잘난 체 하지 마라."

그 할아버지는 '자기가 못나서 국군포로가 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후퇴하지 않고 용감하게 전쟁터를 사수하다 국군포로가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포로 교환을 통해 돌아왔지만 누구도 자기를 전쟁 영웅으로 예우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병적 기록표에는 전사자로 처리되어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조차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국군포로에 대한 대우가 이렇다면 누가 전쟁에 나서겠나.

1962년 아오지에서 태어나 2015년 대한민국에서 죽은 고 주락철씨. 대한민국은 외면했지만 나는 당신의 아버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국군' 고 주창섭님을 영웅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싸워온 당신의 헌신을 애도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당신의 아버지를 인정할 때까지 늘 말하고 기억하겠습니다. 부디 저 세상에서나마 편히 쉬십시오.


태그:#주낙철, #6.25 국군포로 가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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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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