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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일본 연극 <의적 지로키치>를 관람한 것은 행운이었고 축복이었다.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국경과 영토를 넘나드는 전파와 같은 무형물이 홀로그램처럼 우리의 시각과 청각 앞에 쏟아내는 복제가능한 문화는 사실 신기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눈과 눈이 마주치며 가슴과 가슴이 만나는 것은 전파가 개척할 수 없는 영역이다.

영혼을 분양하는 이 떨림 앞에 류잔지 쇼 컴퍼니의 연극 <의적(義賊) 지로키치>가 당당히 서 있다. 시종일관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박수와 감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랬냐고? 하필이면 그것도 삼일절에? 차라리 나를 쳐라. 그럼 어쩌면 줄거리가 답을 대신할 수도 있을 테니까.

'비언어극'이라 해도 좋을 만큼 굉장히 친절한 연극

의적 지로키치의 무대
▲ 공연무대 의적 지로키치의 무대
ⓒ 이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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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오쿠마의 손에서 자란 고아 지로키치는 우연히 도검 제작사인 신스케와 그의 연인 오모토가 사기 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 지로키치는 비탄에 잠긴 두 사람을 위해 도둑질을 결심하고 한 부잣집으로 침입한다. 그러나 문지기 요소베이에게 발각되고 우연히 그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충격에 휩싸인 지로키치는 훔친 돈을 신스케에게 건네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자신이 건넨 돈 때문에 신스케와 오모토가 잡히고 그의 친아버지인 요소베이까지 도둑으로 의심받고 있다는 것이다. 고뇌에 빠진 지로키치는 결국 자수하기로 결심하는데….

한일수교 50주년 기념 초청 공연이라는 수식어보다 궁금했던 건 말이 다른데 어떻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설마 대사를 우리말로 하지는 못할 테고…. 의문은 아주 금세 풀렸다. 풀렸다라기 보다는 그냥 사라져 버렸다. 무대 중앙 위쪽에 마련한 길쭉한 직사각형의 스크린을 통해서 우리말 음률인 시조의 3.4조로 번역한 대사가 자막 처리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떠나서 이 극은 비언어극이라 해도 좋을 만큼 타자에게 굉장히 친절하다.

중간마다 우리 말로 대사할 뿐만 아니라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차용하고 관객 중 한 명을 무대 위로 끌어올려 극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른바 현지밀착형 전략인데 형식에 그치지 않고 공감대 형성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경제성이 돋보이는 소품인 인형극과 괘도(掛圖)를 이용한 극의 진행은 2시간 가까운 시간과 공간적 제약으로부터 연출상의 최대한의 자유와 최상의 연기력을 보장받기까지 한다.

총 12명이 최대 28명의 역할을 복수(複數)로 연기하는 기계적 완성도 또한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그들의 전신에 흐르는 땀을 통해서 엿볼 수 있었다. 250여 편에 달하는 연극을 제작 및 연출했다는 류잔지 쇼의 노련함이 관록을 과시하는 장면 전환은 명불허전을 넘어서 동심의 세계로까지 확장된다. 훌륭한 작품에 초대받은 관객들이 모두 즐거워하는 이유는 사실 아주 간단하다. 바로 재미와 감동의 제공이다. 이 두 가지 키워드는 모든 예술가에게 있어서 영원불멸의 사명감이 아닐까?

삼일절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아픈 날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가식 없이 눈부신 호연의 저 편에는 그런 시대적 배경에 대한 무의식적인 긴장이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스쳤다. 그래서 더 뜻이 깊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로 인식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면 그 행보는 비록 육안으로 볼 때 미미하다고 하더라도 결국, 언젠가는 꽃을 피우리라는 믿음에서다.

문화를 통한 최선이 국가의 이름으로 얽힌 문제를 전부 해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상처를 덧나게 하지 않고 아물게 할 수 있는 순기능은 분명히 가능하다. 그리고 꼭 그런 관점이 아니더라도 가부키에 뿌리를 든 연극은 그 자체로서 완성도가 뛰어나기에 호평의 즐거운 짐을 짊어질 명분이 뚜렷하다.

그 점에서 우리의 현대극은 그 기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말문이 막힌다. 마당놀이? 아니면 남사당패? 불행하게도 이것은 정답이 아니다. 배우는 연기자이지 광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내린 닻은 어디인가?

두 마리 토끼 잡는 데 성공한 <의적(義賊) 지로키치>

의적 지로키치연극 포스터
▲ 포스터 의적 지로키치연극 포스터
ⓒ 이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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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화된 이 작품은 원래 8시간짜리 가부키 원작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것은 500년에 육박하는 그들 고유의 독자적 전통공연예술의 뿌리가 얼마나 탄탄하지를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싶지 않다. 문화와 예술로서 국경을 넘는 소통에 인색할 만큼 쇄국적일 이유가 없어서다.

전국시대 말기 서민들 속에서 태어난 그들의 대중문화가 21세기 한국에서 연극의 메카인 대학로에서 삼일절에 우리를 만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 경이로움이 경색국면의 한일 양국에 희망의 씨앗이기를 바라는 것은 비단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에도 막부가 사실상 쇠토기에 접어들 무렵에 태어나 삶을 마친 지로키치. 우리나라로 치면 홍길동 정도에 해당한다는 실존인물이 의적이 된 계기는 26살 무렵 억압받는 민중들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후 36살의 나이에 붙잡혀 처형될 때까지 10년 동안을 '도둑'으로 살면서 금은 1만 2천량(지금 돈으로 약 50억 원)을 훔쳐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부잣집 재산만을 전문적으로 훔쳐 민중에 나눠주었기에 그를 의적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의적과 도둑 사이에 피해자가 부잣집이라는 매개물이 통쾌하지만은 않다. 차라리 그가 훔쳐야했던 것은 금은보다는 부도덕하고 부정직한 권력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의적이 아닌 성인의 반열에 올랐겠지만.

호불호와 시시비비를 떠나서 그 실존인물을 극의 주인공으로, 후대에 문화유산으로 남겨준 존재는 당대 최고의 가부키(歌舞伎) 극작가인 가와타케 모쿠아미(河竹默阿彌 1816~1893)였다. 시적인 아름다움과 창의적인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유명세를 떨친 작가의 솜씨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본연극을 처음으로 접한 관객들이 보기에도 보편성과 함께 특수성,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의적(義賊) 지로키치>.

그 배경에는 양국의 서민들이 지도층에 느끼는 냉소와 불신이라는 공통분모가 자리한다. 몇백 년의 시차와 지역성에도 불구하고 이 이분법적인 대결구도는 신기할 정도로 유효하다. 재미 너머에 이런 단단한 진보와 개혁의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 반가울 뿐이다. 더불어 이런 전통공연예술은 현대 일본의 국가 이미지와 문화 제고에 엄청난 뒷배로 작용한다. 명분과 실리, 모두에서 확실한 한판승을 거둔다.

연극과 뮤지컬의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극의 성격상 12명이라는 비교적 많은 인원을 동원한 무대가 비좁을 수도 있었는데 정밀한 공간 배분에 대한 계산 덕분에 그야말로 완벽한 활용도를 선보였다.

좌우와 중앙을 그리고 앞뒤를 입체적으로 재단해 공간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것은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했으며 열정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사실 내가 제일 놀란 것은 그들의 폭발적인 에너지였다. 정적일 거라는 선입견을 완전히 허물어버린 이 희대의 유쾌, 상쾌, 통쾌한 문화테러에 관조의 자세는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

확실히 유머와 해학으로 희극적인 요소를 극대화 시켰다는 평을 받는 류잔지 쇼 컴퍼니가 왜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인기 있는 극단인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실례였다. 우리나라에서 공연을 마치고 바로 대만으로 공연을 가는데 대만 현지에서는 이미 티켓이 솔드아웃이 됐다고 할 정도라니, 일본 소극장 연극계의 대부 혹은 거장이라는 타이틀이 꼭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연극 시작에 앞서 자막을 담당한 마정희님의 소개로 류잔지 쇼를 만났다. 70세 가까운 나이에도 젊은 감성과 청년의 에너지를 갖고 연극에 임하는 이웃 나라의 거장은 소탈하고 꾸밈이 없었다. 개방적이고 털털한 일본 현대 연극 혁명 2세대 연출가의 다음 내한 작품이 인터뷰 내내 기다려졌다.

공연장 입구
▲ 공연장 입구 공연장 입구
ⓒ 이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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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연출가이자 평론가인 박정기 선생님 말씀처럼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걸작인 <의적(義賊) 지로키치>. 한일수교 50주년 기념초청 공연이라는 딱딱한 외피에도 불구하고 형식을 뛰어넘는 우수함으로 우리 곁에 다가온 이 작품의 진짜 메시지는 어쩌면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의 정서와 부합하는 일본산 익살과 해학이, 그들이 추구하는 연극의 콘셉트가 바로 아베로 상징할 수 있는 권력에 대한 저항과 그 속박으로부터 탈일본적인 자유의 수신호를 타전하는 것이라고.

그게 사실이라면 그들은 현해탄 너머의 인간들과 소통을 꿈꾸는 문화 의적(義賊)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훔쳐야 할 것이 지로키치처럼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눈과 눈이 마주치며 가슴과 가슴이 부딪히는 관계에서 서로가 그것을 느꼈다면 평균치 일본인들보다 유목민적인 유전자가 월등할 그들의 문화 유랑(流浪)은 사실상 그 자체가 의적(義賊) 지로키치를 그리워하는 일본 민중의 속내를 전하는 침묵의 아방가르드일 것이다.

그것은 160년 전 흑선의 출현 이후 그들이 개항과 개화의 길을 걸어갔던 것과 달리, 쇄국을 추구하는 21세기 일본 매파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서 열도의 생존을 위한 비상구와 같은 진심어린 제스처다.

2015년의 삼일절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후아이엠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태그:#의적 지로키치, #류잔지 쇼 컴퍼니, #삼일절, #가부키,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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