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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수도는 부여와 공주였다. 당연히 백제가 멸망한 이후 부흥 운동도 충청도 일원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벌떼처럼 일어난 백제 부흥군은 한때 당군을 향해 "당신들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느냐? (돌아간다면 추격하여 죽이지 않고) 마땅히 보내드리겠다"고 제안할 정도로 기세를 떨쳤다.

 

백제 부흥군이 처음 일어나고, 또 소멸된 곳은 임존성(사적 90호)이다. 임존성은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의 봉수산 일대 산등성이에 쌓은 성이다. 높이 484m, 둘레 2450m, 성 내부 면적 28만8000㎡에 이르는 석성(石城)이다. 이 성은 여러 골짜기를 성 안으로 끌어안으면서 둘레에 석축을 쌓아 만든 포곡(包谷)산성이 아니라 산 정상 일대를 둥그렇게 테를 두르듯 축성한 '테뫼형' 산성이다.

 

임존성은 특히 세계에 하나뿐인 수정식 산성으로 이름이 높다. 수정식 산성은 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우물을 파서 물을 잔뜩 비축해 두었다가 한꺼번에 터뜨려 적을 우왕좌왕하게 만든 후 총공격을 감행하도록 설계된 성이다. 지금도 임존성에 가면 물이 콸콸 흘러내리도록 성벽에 물구멍을 트고, 그 아래로 도랑을 파놓은 흔적을 볼 수 있다.

 

백제 부흥군의 양대 명장 복신(의자왕의 사촌)과 도침(승려)이 임존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세를 점점 확대해가자, 나·당 연합군은 660년 8월 26일 공격을 감행한다. 하지만 소열(호 정방)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임존성을 공격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삼국사기 무열왕조 7년 기사는 "(소열이) 임존성의 큰 울타리를 공격하였지만 (백제 부흥군이) 군사도 많고 지형도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작은 울타리만 부수고 물러났다"고 증언한다.

 

그 후 소열은 9월 3일 당나라로 돌아갔고, 부흥군의 힘은 점점 커졌다. 급기야 백제 부흥군의 위력에 밀린 당나라 군대는 철수할 것까지 고려한다. 당나라 고종은 소열에 이어 당나라 군대의 총지휘관으로 주둔하던 유인궤에게 "신라에 가서 주둔하라, (중략) 아니면 배를 타고 돌아오라"는 내용의 명령까지 내린다. 당나라의 장군과 군사들은 모두 귀국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유인궤는 "지금 물러나면 백제가 다시 일어날 것이니 그래서야 언제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겠느냐"면서, "신라에 가서 나그네 신세가 될 수도 없다"는 취지의 연설로 그들을 설득한다. 그 이후 당군은 다시 백제 부흥군과 치열하게 싸우게 된다.

 

내분으로 자멸하는 백제 부흥 운동

 

백제 부흥군은 내분으로 자멸한다. 661년 9월에서 662년 7월 사이에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661년 9월 왜에서 돌아와 부흥국 백제의 임금으로 있던 부여풍(의자왕의 아들)이 663년 6월에 복신을 죽인다. 그 후 부흥군은 점점 힘을 잃는다.

 

그래도 임존성은 강했다. 663년 10월 21일 나·당 연합군은 다시 임존성을 공격한다. 이 전투에는 신라의 문무왕까지 힘을 보탠다. 하지만 그들은 지수신 장군을 필두로 한 부흥군을 이기지 못했다. 삼국사기는 "(임존성은) 지세가 험하고 성이 견고한데다 양식도 많았기 때문에 (연합군이) 30일이나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였다"고 증언한다. 이들은 11월 4일 철군한다.

 

백제 부흥군은 임존성에서 마지막 활동을 마감한다. 부흥 백제국의 서울이었던 주류성이 663년 9월 당군에 함락되면서 고립무원 신세가 된 탓이다. 8월에 벌어진 백강 전투에서 패하자 풍왕이 고구려로 도망을 친 후였다. 백제 부흥군의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남은 것은 임존성뿐이었다.

 

주류성에서 항복한 부흥군의 장군 흑치상지를 앞세운 당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끝내 임존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장군 지수신은 항복하지 않고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그 뒤 지수신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또 지수신의 임존성이 무너진 뒤로는 중국의 역사책에 백제 부흥군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백제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임존성 오르는 대표적 등산로는 대련사 길

 

지난 2월 27일, 답사를 위해 임존성을 찾았다. 가장 대표적인 등산로는 예산군 광시면 동산리 마을 안을 지나 오밀조밀한 숲길을 따라 오르는 길이다. 마을이 끝나면 대련사가 나타나고,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대련사는 656년(의자왕 16)에 의각(義覺)선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절은 임존성의 혈투를 두루 보았을 터이고, 지수신이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도 보았을 터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평온하기만 하고, 대련사로 오르는 가파른 오르막도 찾는 이 별로 없는 한적한 시골길로 남아 있을 뿐이다.

 

대련사에서 임존성으로 오르는 이 길의 장점은 끝까지 올랐을 때 백제가 남긴 성곽부터 먼저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길은 보은의 삼년산성을 북쪽에서 오르는 것과 같다. 보통 복원된 성은 비록 웅장하기는 해도 예스런 맛이 없어 크게 아쉬운데, 여기저기 무너지기는 했어도 1400년 세월의 무게를 떠안고 있는 백제의 성곽을 임존성에서 만나니 그저 반갑기만 하다.

 

옛날 성곽에 올라 이리저리 걸어보다가 다시 길을 떠난다. 아무도 몰래 이곳을 되찾아 홀로 눈물을 훔쳤을 살아남은 부흥군 병사처럼 나도 나무 사이에 숨은 듯 서서 임존성 전경을 뚫어지게 한번 바라보리라. 그런 결심을 굳히며 하늘을 쳐다본다. 그러나 낯선 초행길이라 한참 가야 하는 줄 알았었지만, 실제로는 스무 걸음 정도만 옮기면 백제의 성곽이 테뫼식으로 이어졌던 지난 흔적을 볼 수 있다.

 

부흥군 장수 지수신, 나라 잃고 종적도 잃은 곳

 

나무 사이를 지나니, 문득 벼랑이 나타난다. 산이 뚝 떨어져 저 아래 예당호수로 미끄러지듯 가파른 비탈을 이루고 있다. 가로막는 것이 없으니 산성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임존성의 역사만 없다면 그저 시원한 풍경일 뿐이다.

 

저 멀리 아득하게 성이 산을 타고 하늘로 돌아가는 끝이 보인다. 까마득하다. 어림잡아도 1km는 더 될 것 같다. 나무 한 그루 없고 온통 땡볕이다. 당나라 군사들이 휩쓸고 지나간 뒤로는 풀도 수목도 자라지 않은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언제 또 오려나!', 지수신이 다시 돌아오지 못한 것과 함부로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나 역시 오늘이 임존성에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일는지도 모른다. 그래, 저 길을 걸어보자. 백제 최후의 역사가 성곽의 흔적을 따라 애잔하게 깔린 길이니, 고개를 숙이고 끝까지 가보자. 더 나아갈 수 없는 곳까지 가면 고구려로 가는 국경선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역사에서 사라진 지수신이 문득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반길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태그:#임존성, #흑치상지, #지수신, #백제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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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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