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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대교에 써있는 자살예방 문구 옆으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2013.9.9)
 서울 마포대교에 써있는 자살예방 문구 옆으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2013.9.9)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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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을까? 이 먼 나라까지 와서 그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

며칠 동안 이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남의 일에 보이는 값싼 호기심이라 흉잡혀도 그 순간 그의 절박했을 그 마음이 무엇이었을지 알고 싶었다.

그는 왜 그랬을까... 황망한 자살 사건

지난 2월 27일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한동안 시끌거렸다. 바쁜 출근길 수많은 사람이 오가던 서울지하철 2호선 대림역 5번 출구에서 외국의 젊은 남성이 아래 도림천으로 뛰어내렸다. 뛰어내린 순간이나 바닥에 떨어져 누워 있는 모습, 경찰관들이 출동해 수습하는 과정 등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직접 보지 못한 나는 처음 그 소식을 접하고 명확하지 않은 사고 이유에 대해 혼란스러웠다. 어떤 이는 자살이라고도 하고, 누군가에게 당한 것 같다고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현기증에 떨어진 것 같다고도 하며 흔하지 않은 외국인의 죽음에 동네는 술렁였다. 하루가 지나는 동안 그 상황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도 나타나고 경찰의 발표, 신문기사 등을 통해 사건은 구체화됐다. 직접 난간을 타고 올라가 뛰어 내렸다는 것이다. 경찰에서는 유서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자살인 것 같다고 했다.

주말 동안 목욕탕이나 시장 등에서 만난 사람들도 건너건너 전해 들은 그 이야기로 안타까워했다. 실제로 상황을 목격한 사람은 무서움에 잠 한숨 못 잤다는 두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기사에는 캐나다 국적의 국내 사립대 교환학생이었다고 했다. 이 먼 타국까지 와서 생명을 버려야 할 정도로 나름의 힘든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만 할 뿐이다.

40대 후반에 들어서니 직간접적으로라도 삶을 자살로 마감하는 사람들을 여럿 접했다. 한동안 소식이 없던 친척이나 친구들의 비보를 듣고 달려가면 자살인 경우가 여럿 있었다. 그 순간 그 힘듦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지나고 보면 살아있음에 그 시절의 추억 한 페이지일 수 있지만 그 마음이 가득한 순간만큼은 앞이 보이지 않는 고통일 테니 말이다.

보고 묻고 듣기... 이것만으로도 누군가는 산다

자살예방교육에 '보고 묻고 듣기'라는 것이 있다. 절박해 보이는 사람을 보면 힘든 일이 있는지 묻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라는 것이다. 힘듦을 들어주는 사람만 있어도 자살은 많이 예방된다고 한다.

그도 한동안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 했다. 얼마나 많은 생각이 오갔을지 짐작한다. 마음을 나누고 통화할 누군가 그에게 있었다면 마지막 삶이 낯선 타국의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누가 된단 말인가. 말이 그렇지 낯선 사람에게 '괜찮으냐'고 말 걸기가 쉬울 수는 없다. 매일 살아가기 바쁜 우리들은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없다. 그가 그렇게 갔다고 해서 그 주변을 지나던 많은 사람들의 책임은 아닌 것이다.

일요일 그가 뛰어내렸다는 그곳에서 평소 강아지와 산책을 즐겨 하던 도림천을 바라보았다. 차들이 달리는 도로나 사람들이 운동하는 하천변, 흐르는 물빛조차 온통 회색빛으로 보인다. 불어오는 바람도 내달리는 전철의 소음에 섞여 회색 바람 같다. '그래서 여긴가?' '온통 회색빛이라 마음 의지할 데가 없었나?' 파릇파릇한 봄이었으면 그의 생각이 바뀌었을지...

"다리에 칸막이를 해야 해요. 한 번 이런 일이 생기면 계속 그럴 수 있다는데 무서워 죽겠어요."

바로 옆에서 간식 장사를 하시던 분은 그날을 떠올리며 다른 누군가 또 그럴까 봐 무섭다고 했다. 다른 통로는 칸막이가 되어 있는 반면 그곳은 칸막이가 없는 난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성인 가슴 높이까지 오는 난간이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칸막이가 되어 있었다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평소 알던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 유일한 선택이 당신일지 모른다. '왜 못견디느냐, 죽을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살아라' 이것은 오만이고 비난이다.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우린 비난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이 힘든가 보다. 그래도 죽지만 말아 줘. 네가 보고 싶다' 이 말을 듣고 싶을 수 있다. 그렇다면 상인의 말마따나 또 다른 누군가 그 자리에 섰다가도 뒤돌아 갈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

'제발 죽지만 말고 살아 줘.'


태그:#대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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