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포스터.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포스터.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세계적 베스트셀러의 영화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영화, 치명적인 매력의 남자 주인공과 파격적인 베드신.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대해 알려진 기본 정보였다. 원작 소설이 있지만 미처 읽지 못한 나로서는 이 영화가 더 궁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포스터 속 "깨어나 본능과 마주하라"는 문구에 호기심이 일었다.

남자 주인공 크리스찬 그레이(제이미 도넌 분)는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잘나가는 기업의 CEO이다.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온, 이제 곧 대학 졸업을 앞둔 여자 주인공 아나스타샤 스틸(다코타 존슨 분)은 크리스찬과 마주한 순간 그에게 반한다. 감기에 걸린 친구를 대신해 인터뷰를 하게 된 아나스타샤와 크리스찬의 첫 만남은 이들이 만남이 '운명적'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가 늘 보아왔던 흔한 로맨스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로맨스인 듯, 로맨스 아닌, 로맨스 영화

 영화 속 한 장면. 크리스찬에게 빠져드는 아나스타샤.

영화 속 한 장면. 크리스찬에게 빠져드는 아나스타샤.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준수한 외모는 기본이고, 젊은 나이에 억만장자인 데다 매너 좋고 매력적이며 모든 것을 가진 완벽한 남자. 아나스타샤가 그에게 반한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회 경험도 별로 없고, 아직까지 이렇다 할 연애 경험도 없는 그녀에게 말로만 듣던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났다. 그 사실만으로도 두근두근할 일인데, 그런 왕자님이 너무도 평범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니 어떤 여자가 빠져들지 않을 수 있을까.

거기다 그 왕자님은 자신이 가진 것들을 이용해 여자가 경험해보지 못한 신세계를 보게 해준다. 어느 날 갑자기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 불쑥 찾아와 호감을 표하고, 다른 남자와 있는 그녀에게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녀를 자신의 전용 헬기에 태워 시애틀 하늘을 날게 한다. 매력과 재력을 모두 발산하는 이 남자. 이래서 이 영화는 여자들의 판타지를 위한 영화라고 알려졌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한 장면. 모든 것을 다 가진 완벽한 남자 크리스찬 그레이.

영화 속 한 장면. 모든 것을 다 가진 완벽한 남자 크리스찬 그레이.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여자들의 판타지와는 거리가 멀다. 크리스찬에게 점점 빠져들면서도 그에게 마냥 끌려가지만은 않는, 알고 보니 '밀당'의 고수인 아나스타샤. 그리고 그런 그녀 때문에 생각지 못한 속앓이를 하는 크리스찬. 그들은 '계약서'가 필요할 정도로 나름 진지하고 위험한 밀당을 한다.

첫사랑에 빠져 그와 모든 것을 함께하고픈 여자와 자신의 남다른 취향을 고수하면서도 자꾸만 그녀에게 빠져드는 남자의 이야기가 큰 골자로 보였던 나에게 이 영화는 분명 로맨스 영화였다. 다만 그 과정에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남자의 '남다른 성적 취향'이었고, 그것을 영화의 전반에 걸쳐 요긴하게 부각시켜 영화의 성격이 달리 보이도록 어필했을 뿐이다.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데, 사랑에 빠진 여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착각이 '내가 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란다.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함께하며 그의 남다른 취향도 자신이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반면 크리스찬은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들에게 한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자신이 쳐놓은 울타리 안으로만 그녀를 끌어들이려 한다. '난 원래 이렇다'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안타까워하는 그녀에게 명대사를 날려준다.

"난 50가지 그림자로 채워졌어."

영화를 보기 전 들었던 수위 높은 베드신과 온갖 평범치 않은 성적 취향의 도구들에 대한 호기심은 이 대사와 함께 공중분해되어 버렸다. 아무리 소설이 원작이고,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지만, 어쩌면 이렇게 극단적 문어체의 대사를 날릴 수 있을까. 그렇다고 그가 50가지 그림자가 무엇인지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의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반응이지 싶다.

시각보다 청각을 더 사로잡다

 영화 속 한 장면. 피아노를 연주하는 크리스찬과 그런 그를 바라보는 아나스타샤.

영화 속 한 장면. 피아노를 연주하는 크리스찬과 그런 그를 바라보는 아나스타샤.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영화는 사실 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 보인다. 크리스찬이 그렇게 남다른 성적 취향을 갖게 된 계기가 어린 시절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말하는 자신을 채우고 있는 50가지 그림자에 관한 것, 크리스찬과 오락실에서 유희를 즐기는 아나스타샤가 미처 몰랐던 그녀의 본능 등.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지금 뭐하자는 건가 싶다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열린 결말인가 보다' 하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3부작으로 이루어진 영화란다. 그래서 그나마 '그럼 그렇지' 했다. 뒤에 나올 2편을 보기 전 알아두어야 할 프롤로그 성격의 영화였다고 생각하니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이 사실을 모르는 수많은 관객은 '그레이'가 던진 낚싯바늘을 덜컥 물고 월척이 되어주었다.

영화가 끝난 뒤 영화 속 장면들보다 비욘세, 프랭크 시나트라, 롤링 스톤즈 등이 들려준 끈적끈적하고 묘한 매력의 사운드 트랙이 더 크게 기억에 남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후속편을 기다리게 될까?

덧, 영화를 보면서 가끔씩 관객의 헛웃음을 자아내는 부분들이 있다.

"나한테 이렇게 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작 중에 나오는 대사는 아니지만, 재벌 남과 평범한 여자의 러브 스토리를 패러디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흔하게 듣던 이 대사가 갑자기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는 더 이상 영화를 진지하게 볼 수 없었다. 아마 영화를 본 분들이라면 공감할 수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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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공연을 좋아하는, 아직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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