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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새로운 현실에 직면해야 했다. 일자리를 구하기에 너무 늙어버린 지금, 내가 맞닥뜨린 현실은 자기 몸 하나 부양할 능력도 없고, 그 어떤 회사에서도 반겨주지 않는 미국 노인들이 처한 잔인한 현실 바로 그것이었다. 불안하고 암담하고 창피했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스타벅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떙큐! 스타벅스> 표지
 <떙큐! 스타벅스> 표지
ⓒ 세종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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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주인공 마이클 게이츠 길은 미국의 대표적인 상류층이었다. 태어나자마자 그는 슈퍼 엘리트가 됐다. 부모가 부유한 슈퍼 엘리트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일대에 입학해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과 사귀었으며, 인맥을 이용해 쉽게 일자리를 얻었다. 일자리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생각보다 더 많은 보수를 그에게 안겨 주었기에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회사에 충성했다.

미국의 대표 광고 회사 중 하나인 제이 월터 톰슨JWT에서 25년을 일한 어느 날, 젊은 여자 이사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아침을 함께 하자고 한다. 아침을 먹으며 그는 이런 말을 듣는다. "좋지 않은 소식이에요" 그는 출근을 하기도 전에 잘렸다. 회사에 들어가 짐을 챙길 필요도 없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간 회사에 갖다 바친 충성이 떠올랐다. 회사에 충성하느라 가족에 소홀했던 시간도 떠올랐다. 그렇다고 회사에 뭐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이러한 잔인함이 기업의 생리라는 걸 잘 알고 있던 터였다.

회사에서 쫓겨난 그는 홀로 일어서보려고 10년간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됐고,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전화를 따뜻하게 받아줄 친구도 더는 없었다. 순간적인 욕망을 이기지 못해 아내에게도 버림 받았다. 이제 그의 나이 64세.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스타벅스 라떼 한잔을 마시기에도 벅찼다. 완전히 망해 버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스타벅스 구석 테이블에 멍하니 앉아 있던 그에게 어느 젊은 여성이 말을 건다.

슈퍼 엘리트에서 '알바생'으로

"혹시, 여기서 일하실 생각 없으세요?"

나중에 알고 보니 크리스탈은 장난삼아 말을 걸어 본 것이었다고 한다. 수백만 원짜리 옷을 걸쳐 입은 말끔한 노신사가 이렇게 대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이다.

"예, 일하고 싶습니다."

직원 평균 나이가 기껏해야 스무 살 안팎인 스타벅스 공간에 64세 노인이 들어선다. 평생 거만한 태도로 남에게 명령이나 할 줄 알았던 노년의 백인이 결코 살면서 부딪힐 일이 없을 거라 여기던 젊은 흑인들 틈에서 모든 것을 새로이 배워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기가 막힌 상황이었지만 노인은 포기할 수 없었다. 얼마 전에 뇌종양 초기 진단도 받지 않았던가. 그는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일하도록 허락해준 곳은 스타벅스가 유일했다. 그는 목숨까지 바칠 각오였다. 

스타벅스 창업자이자 회장인 하워드 슐츠가 쓴 <온워드>를 읽은 적이 있다. 책에서 스타벅스는 세상에서 가장 올바르고 좋은 기업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책 속의 스타벅스는 직원들을 '파트너'라 부르며 그들 모두를 존중해줬고, 직원 복지도 뛰어났다. 환경 보호와 커피콩을 재배하는 원주민들의 생활 개선에도 힘을 쏟는 모습이었다.

이런 내용을 다 믿을 순 없겠다 싶었다. 어찌 이런 좋은 기업이 존재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땡큐! 스타벅스>를 읽으니 <온워드>의 내용이 모조리 거짓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직원 존중과 복지만큼은 하워드의 말을 믿어도 될 듯했다. 실제로 스타벅스는 시간제 근무자에게도 의료 보험을 제공했고, 학비까지 대주고 있었다. 한국은 모르겠지만 미국의 스타벅스는 꽤 좋은 일터 같았다.

<땡큐! 스타벅스>의 원제는 'How Starbucks Saved My Life'이다. 말 그대로 스타벅스는 마이크의 인생을 구해주었다. 마이크는 스타벅스에서 새로운 인생을 맞았다. 스타벅스는 중년의 남성에게 삶의 달콤함을 처음으로 알게 해주었고, 가치관까지 변화 시켜 줬다. 그를 구해준 건 스타벅스라는 일자리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그곳에서 만난 젋은 파트너들은 그의 본보기가 됐다.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려준 스물여덟 살의 흑인 지배인 크리스탈은 기꺼이 마이크의 멘토가 돼 주었다. 마이크는 그녀를 존경했고, 그녀는 마이크를 존중하고 이끌어 주었으며 결국에는 그를 좋아하고 인정도 해주었다. 파트너들은 마이크의 과거와 나이를 장애물로 여기지 않으면서 그저 그를 묵묵히 도와주었다. 어린 친구들의 친절함에 마이크의 마음도 활짝 열렸다.

"과거는 짧게, 미래는 길게."

과거의 화려했던 생활은 그만 잊고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겠다던 마이크. 마이크에겐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절심함이 가져다준 열정과 처음으로 맛보는 노동의 기쁨에 감화된 희망이었다. 언젠가부터 그의 에너지가 오히려 어린 파트너들에게 힘을 주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두려워하던 계산대 앞에서도 고객들과의 대화를 이끌며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은 '말'이었다. 치열한 광고 업계에서 25년이나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말' 때문이었으니까. 일을 통해 자부심까지 얻게 된 그는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것이 행복했다.

"이렇게 행복한 적은 없었어"

그가 삶의 새로운 의미를 깨달은 곳, 스타벅스.
 그가 삶의 새로운 의미를 깨달은 곳, 스타벅스.
ⓒ 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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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에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었어.'

따뜻한 행복이 느껴졌다.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여전히 두려웠다. 지금 내가 행복하다고 인정하려니 겁이 났다. 스타벅스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는 지금 내 처지에... 이건 결코 부모님, 가족, 친구들이 내게 기대했던 근사한 직업이나 풍요로운 삶이 아니다. 그러면 이제까지의 내 삶, 지난 64년의 세월은 전부 엉터리였다는 말인가?

'아냐, 그럴 수는 없어.'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여전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선 채로 나 자신과 한판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전 삶에서도 내가 사랑한 것들이 많았다. 내 아이들도 항상 사랑했다. 하지만 나는 냉엄한 정직성을 발휘해 평생 처음으로 내 안의 진실을 인정해야 했다. 무의미한 활동으로 가득했던 이전의 그 특별한 삶의 상당 부분을 사실은 내가 혐오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간 얼마나 오만했던가. 그는 그가 잘났기 때문에 지난 시절의 그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겉으론 포용하는 척하면서 그보다 못난 사람들을 무시하고 속으로 경멸했던 이유였다. 자신과 그들 사이에는 넘지 못할 선이 있어야만 했다. 그들은 재능과 능력이 결여된 사람들이므로 그가 누리는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스타벅스에서 만난 뛰어난 어린 친구들을 보며 그는 충격에 빠졌다. 그는 그들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이 누린 모든 것들은 실은 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안고 태어난 '금수저'때문이었다는 것을. 그의 부모가 그에게 물려준 것들 말이다.

부유함, 피부색, 좋은 교육, 인맥 등등. 다른 사람들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금수저를 안고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능력 발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마이크도 말하듯 스스로 이 길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억지로 떠넘겨진 새로운 삶이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삶을 통해 예순넷의 마이크는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그는 이제라도 이렇게 깨달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의 첫 성장 앞에서 겸허해졌다. 책을 읽은 나 역시 그의 모습 앞에서 겸허해졌다.

나는 이 책을 미래의 어느 날 언제라도 다시 시작해야 할 때 펴보고 싶다. 시작해야 할 땐 언제나 불안하고 두려울 것이다. 어쩌면 서럽고 슬플지도 모르겠다. 그때, 마이크의 깨달음을 배우고 싶다. 그의 태도를 배우고 싶다. 어쩌면 인생이란 더 많이 깨달은 자에겐 조금 더 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아직 인생이 너무 많이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땡큐! 스타벅스>(마이클 게이츠 길/세종서적/2009년 02월 09일/1만2천원)



땡큐! 스타벅스

마이클 게이츠 길 지음, 이수정 옮김, 세종서적(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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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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