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유리동물원> 포스터

연극 <유리동물원> 포스터 ⓒ 명동예술극장


대공황의 암흑에 침식된 세인트루이스의 허름한 아파트. 그 곳에는 시 쓰기를 좋아하는 남자와 유리로 만든 동물을 수집하는 여자, 두 사람의 헌신적인 어머니가 산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억지로 창고에서 일하는 남자, 남편도 직장도 얻지 못한 절름발이 여자, 두 사람에게 시종일관 잔소리를 퍼붓는 어머니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은빛 유리구두 같은 달빛'이 되어줄 것이라 믿었던 또 다른 남자는, 이 가련한 가족의 희망을 부수고는 떠나 버린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등을 집필한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출세작이자 한태숙 연출의 손에서 다시 태어난 연극 <유리동물원>은 이 같이 비틀린 현실을 잔혹하도록 실감나게 묘사한다.

특히 하나의 장면이 관객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도록 반쯤 기울어져 있는 무대는 <유리동물원> 속 네 남녀가 처한 현실을 즉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각도 탓에 관객이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갈 극 중 인물들의 작은 표정과 몸짓들은 깨진 채로 벽에 걸려 있는 거울이 섬세하게 붙잡아 낸다. 극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처럼 영민하게 시대를 은유한 무대 연출에서부터 조성되어 있었다.

마음속 꿈을 세상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시대

 연극 <유리동물원>에서 톰 윙필드 역을 맡은 배우 이승주

연극 <유리동물원>에서 톰 윙필드 역을 맡은 배우 이승주 ⓒ 명동예술극장


이 공간을 공유하는 <유리동물원>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꿈을 좇고 있다. 아만다(김성녀 분)는 아름답고 여자다워 사랑받았던 과거의 자신에게서, 그녀의 아들 톰(이승주 분)은 영화와 글 속에 존재하는 모험과 도전에서 꿈을 찾는다. 또 톰의 누나 로라(정운선 분)에게는 작은 유리동물의 빛과 낡은 축음기에 꿈을 투영하며, 로라의 첫사랑이자 톰의 친구인 짐(심완준 분)은 자신의 밝은 미래를 꿈꾼다.

그들이 원하는 꿈은 로라가 애지중지하는 유리동물과 닮았다. 빛이 있는 곳에서만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을 뽐내는, 한없이 연약한 그 유리동물들. 그들은 가슴 속에 든 것이 너무도 많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유리동물들을 차마 세상으로 꺼내 놓을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어두웠던 시대 탓일 것이다.

한 달에 65달러를 벌기 위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창고로 출근해야만 하는 톰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사치다. 그래서 그는 술과 담배에 취한 채 남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영화와 마술로 지친 심신을 마취한다. 아파트 맞은편 댄스홀의 화려한 불빛을 바라보던 톰이 끝내 한숨 같은 담배 연기를 토할 때면 그의 묵직한 절망감이 관객석으로 전달된다.

아만다는 그런 톰의 어깨를 붙잡고 져서는 안 된다고 애원하듯 말한다. 하지만 이는 톰이 가슴에 품은 유리동물들을 꺼내 빛을 받도록 해도 된다는 격려가 아니었다. 그래서 톰에게 가족이란, 그들과 함께 사는 싸구려 아파트란 못을 촘촘히 박은 관이다. 마술사는 그리도 쉽게 드나들던 그 관 안에서 톰은 도무지 빠져나올 수가 없다.

톰은 급기야 그렇게 증오하던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가려 한다. 이제 그에게는 전 세계를 폭풍 속으로 몰아넣은 전쟁조차 모험이고 도전이 됐다. 톰은 '떠나고 싶으면 이 가족을 대신 짊어질 사람을 찾아 두고 나가라'는 아만다 몰래 떠날 준비를 한다. 못 박힌 관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들을 찾기 위해서.

로라는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이 두려워 직업학교를 포기한 탓에, 백마 탄 왕자를 기다려야만 한다. 남편 없는 지난한 16년을 보내야만 했던 아만다는 로라가 현실 위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있는 길이라곤 남편을 찾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마침 하늘에 뜬 예쁜 달을 보면서도 로라는 빌 소원이 없다.

그런 로라 앞에 그녀를 '블루로즈'라며 특별하게 불러 준 첫사랑이자 반짝반짝 빛나던 학교의 인기인 짐이 나타난다. 로라는 짐에게 자신의 유리 수집품들을, 짐은 텔레비전의 시대 속에서 예전처럼 찬란히 빛날 자신의 미래를 보여 준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가슴 속의 꿈들을 서로의 눈앞에 꺼내 놓으며 이 연극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자아낸다.

짐은 이 가족의 희망이자 유령 같은 현실 그 자체다. 이제는 평범한 회사원이 된 그에게도 유리동물 같은 꿈들이 존재하지만, 톰과 로라의 꿈과는 조금 다르다. 가장 현실과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꿈을 지녔다는 이유로 짐은 톰이나 로라보다 사회적 우위를 점한다. 작가를 꿈꾸는 아이보다 글쓰기를 취미로 하는 회사원이 되겠다고 말하는 아이가 영리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그래서 짐에게는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정신과 의사 같이 로라에게 열등감을 버리라고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그런 짐은 로라와 함께 여린 촛불 곁에서 영롱히 반짝이는 유리 유니콘을 바라본다. 동정과 동경이 오묘하게 섞인 눈길로. 그리고 그것과 꼭 닮은 로라를 향해 6년 전 그날처럼 "넌 특별하다"고 말한다. 순수한 고백 같은 그의 말들과 어루만짐에 로라는 처음으로 유리 유니콘 같은 자신의 이마에서 뿔을 잘라 평범해져도 좋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짐은 돌연 현실이라는 망치로 그녀와 가족의 기대를 산산이 부순다. 첼로 선율이 거실에 홀로 남겨진 로라의 사위로 무겁게 내려앉으면, 마지막 남은 희미한 촛불까지 포기하려 하는 그녀의 작은 손이 보인다. 여기서 느껴지는 깊은 비애는 '유리동물원'이 허락되지 않는 시대의 일원으로서 로라를 향해 보내는 공감과도 같은 모습일 터다.

낯설지 않은 이 가족의 상황,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연극 <유리동물원>의 한 장면

연극 <유리동물원>의 한 장면 ⓒ 명동예술극장


한태숙 연출의 담담하면서도 강렬한 재해석이 돋보이는 연극, <유리동물원>이 묵직한 울림을 주는 까닭은 100%의 현실 중 1%의 완벽한 성공보다는 99% 속 부서진 희망을 그린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산산 조각난 희망의 파편들은 낯설지 않아 더욱 마음에 박힌다.

아만다 역의 김성녀와 그의 아들 존 윙필드를 연기한 이승주가 속사포처럼 주고받는 대화에 기어이 웃음을 터뜨리고 마는 것도 이 낯설지 않음 때문이다. 바라는 것이라고는 내 소중한 자식들의 성공과 행복뿐인 아만다와, 현실과는 동떨어진 '유리동물원'을 지키고 싶은 그녀의 '이기적인' 아들딸.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벌어지는 세대 간 갈등의 단면들은 청량하게 터지는 웃음을 주지만, 동시에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도 한다.

우리는 로라와 짐, 아만다와 톰의 세상만큼이나 짙은 어둠이 깔려 있는 시대를 산다. '죽은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라며 삶을 자조하는 톰과 매주 월요일이 두려운 우리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덧없는 거짓 무지개로 어둠을 물들이고 있는 미러볼'이 존재하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우리만의 빛을 찾을 수 있을까? 모든 이들의 '유리동물원'은 특별하지만, '특별함'이 '쓸모 있음'과 동의어는 아니기에 슬프다. 그리고 우리는 존재하기 때문에, '유리동물원'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아프다.

관록의 배우 김성녀는 억척스러우면서도 소녀 같은 1930년대의 아만다 윙필드에서 2015년을 사는 어머니들의 초상을 노련하게 이끌어 냈다. 톰과 로라 역을 맡은 이승주와 정운선 역시 의지와 상관없이 급변하는 시대의 물결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청춘을 온전히 자신 안에 담았다. 예민한 캐릭터 사이에서 유일하게 넉살 좋고 낙천적인 짐을 연기한 심완준 역시 능청스러운 미소로 잔인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매력적인 역할을 훌륭히 소화했다. 오는 3월 10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한다.

유리동물원 한태숙 김성녀 이승주 정운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