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내용이 워낙 야하다고 출간 당시부터 입소문이 자자했던 소설. 서점에 가도 미리보기를 할 수 없게 꽁꽁 봉인해 놓아서 괜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던 그 소설. '트와일라잇'의 팬픽인데 전 세계적으로 무려 1억권이나 팔렸다는 사실이 다소 의아스러움을 느끼게 만들었던 그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마침내 영화로 제작되어 전 세계 관객들에게 선을 보였다.

에로틱 장르의 영화가 전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던 적은 1992년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원초적 본능'이후 처음이지 아닐까 싶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각종 가학적인 러브씬의 농도가 기존 영화의 러브씬을 능가할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하였다. 장안의 화제를 모으는 영화에 대한 본능적인 탐구욕구가 강한 필자로서는 이 영화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야심한 밤에 와이프와 애기가 곤히 잠든 사이에 심야의 야릇한(?) 분위기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기대감에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를 보고난 후의 느낌을 의성어로 표현하고 싶어졌다. 조용한 상영관 속에서 곤히 잠든 누군가가 상영관을 쩌렁쩌렁하게 달구는 코고는 소리...바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본 전반적인 느낌을 요약한 의성어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남자 주인공 그레이가 숨막힐 정도의 매력으로 가득차 있다는 뻔뻔한 전제하에 전개된다. 대학 졸업을 앞둔 예비 사회 초년생 아나스타샤(다코타 존슨)는 친구를 대신하여 핸섬한 재벌남 그레이를 취재하러 찾아가고, 그를 처음 보자마자 몸과 마음이 원초적 본능으로 꿈틀거리게 된다.

아쉬울 것 없는 재벌남 그레이 또한 마치 새로운 피규어 장난감을 접한 듯한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아나스타샤에게 작업을 걸게 되고 두 사람은 별다른 밀당없이 뜨겁게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레이란 남자, 사지가 멀쩡한데 취향이 독특하였다.

워낙 돈이 많다 보니 각종 실험을 해보고 싶어진 듯 이미 자신에게 홀딱 넘어온 아나스타샤를 대상으로 계약을 제시한다. 기상천외한 변태행위가 담긴 계약서를 두고 두 사람은 실갱이를 벌이고 아나스타샤는 나름 밀당을 위해 계약서에 서명을 미루지만, 계약서 서명여부에 상관없이 두 사람은 부지런히 애정 행위 적립을 지속한다.

영화 속의 두 남녀 주인공을 보다 보면 각각 국내 드라마와 영화 속의 캐릭터가 떠오른다. 돈도 많고 일도 똑 부러지게 처리하고 게다가 몸도 좋지 악기마저 잘 다룰줄 아는 그레이는 1994년 안방의 여심을 훔쳐갔던 미니시리즈 '사랑을 그대 품안에'의 남자 주인공 강풍호(차인표)를 떠올리게 한다.

사랑 한 번 제대로 못해본 쑥맥같은 표정을 늘 짓고 다니지만 늦바람이 무섭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아나스타샤 역할의 다코타 존슨은 캐릭터 측면에선 백마 탄 왕자님 앞에선 쑥맥처럼 어찌할 바 모르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캐릭터를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뒤늦게 눈뜬 본능에 대한 욕망, 그리고 눈에 뜨이는 뒤태 등을 보면 1994년 개봉한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엉덩이가 예쁜 여자(정선경)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방영한 지 20년도 넘은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를 언급한 이유는 영화 속의 남자 주인공을 묘사하는 방식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얼굴 핸섬하고 몸매 좋고 거기에 매너까지 겸비한 것도 모자라 고독을 즐기면서 악기를 다루는 우수에 찬 모습 등 아예 대놓고 이 정도면 어떤 여자든지 이 남자한테 흑심을 품을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는 완벽남과 신데렐라 여주인공 간의 판타지적 러브 스토리에 초점을 맞추고 양념으로 주인공의 앞길에 방해 요인이 되는 악역 캐릭터를 심어 놓았지만,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철저하게 두 남녀 주인공의 러브 테크닉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그다지 가학적이지도 관능적이지도 못한 채 영화 속에서 주인공 그레이가 아나스타샤의 몸을 수박 겉핣기 하듯 훑어주는 수준에 그친다.

영화 속에서 가장 궁금한 점은 도대체 그레이한테 드리워진 50가지 그림자가 무엇이냐는 점이다. 영화 후반부에 주인공 그레이가 대놓고 대사를 통해 자기에겐 50가지 그림자가 있노라고 실토하지만 더 이상 정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스토리 전개가 뜬금없다. 어찌하여 그레이가 가학적인 애정행각에 집착하는 지에 대해 명확히 알 수가 없다. 그단지 보여주기만을 위한 가학적인 러브행각만 난무하고 있다.

뜬금없는 전개는 영화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기 직전까지 거침없는 질주를 이어간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 장면, 그레이의 가학적인 애정공세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떠나는 아나스타샤와 그레이 사이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이 뜬금없는 결말을 보면서 필자가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신이 떠올랐다. 엘리베이터가 닫히는 순간 주인공 그레이가 엘리베이터 문을 치면서 머리를 기대는 모습으로 마무리 하면 어땠을까? 80년대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속옷 광고에서 당시 터프가이이자 국민 MC였던 이덕화의 강렬한 모션처럼 말이다.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은 상당한 마케팅 재능(?)이 있는 듯 싶다. 시종일관 영화의 전개가 뜬금없다 보니 도대체 원작소설은 어떻게 쓰여져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그리고 속편이 나오더라도 더 이상 시간을 투자할 생각이 없어졌다. 뜬금없는 스토리 구조에 살을 더 붙여봤자 또 하나의 막장 드라마가 탄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992년 '원초적 본능'에서 접했던 탁월한 시나리오와 숨막히는 에로시티즘이 가미된 영화는 더 이상 보기 어려운 것일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네이버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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