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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전공 첫 수업 시간, '간호는 예술이다'라는 명제를 듣고 학부 시절 내내 간호가 어떻게 예술일 수 있는지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아픈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간호하는 헌신적인 돌봄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학부를 졸업하고, 병동에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당시 내가 근무했던 곳은 신장 이식, 간 이식 환자까지 포괄해 외과 병동 중에서도 메이저 파트였는데, 선배 간호사들은 그야말로 간호가 어떻게 예술일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어설픈 우리 신규 간호사들에게는 때때로 호랑이처럼 매서웠지만, 환자에게 제공하는 선배들의 전문적인 간호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특히 병원에서 선정하는 최우수 간호사로 여러 번 선정되었던 선배들의 전문성은 여타의 의료진들도 인정하는 것이어서, 언젠가는 다른 진료 과에서 신장 이식에 대해 문의하자, 과장님은 주저 없이 우리 병동을 지명하며 '간호사에게 물으라'고 답신을 보내기도 했다. 자로 잰 듯 교과서처럼 간호하는 모습에서 어떤 경이로움마저 느끼기도 했다.  

요즘 시간을 내서 챙겨보는 드라마가 있다. 지성, 황정음 주연의 <킬미, 힐미>. 남자 주인공 차도현은 어린 시절 상처로 다중인격을 앓고 있는데, 무려 일곱 개의 인격으로 분화되었다. 드라마는 정신과 질환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장점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이 그려나가는 줄거리도 알콩달콩 재미있어 시청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 캐릭터를 형상화해서 연기해야 하는 배우로서는 쉽지 않은 도전일 터. 그런데, 배우 지성은 일곱 개의 인격을 개성 있게 표현하며 극의 재미와 몰입도를 높이고 있다.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한 이력까지 가늠해보면 근 20여년 동안 줄곧 연기를 하면서 살아온 셈인데,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성실하게 하루하루 정진한 결과는 멋진 연기로 재탄생했다. 어투, 표정, 태도까지 각각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구현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연기를 좋아하지 않고서는 이렇게까지는 이르지 못했겠구나 싶다. 무언가를 좋아하므로 끝까지 치열하게 도전하고 성취하는 것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멋지다'로 표현할 수 없다.  

엊그제 한 모임에서 이번에 명예퇴직하신 보건 선생님들의 퇴임식이 있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보건선생님으로 30여년 이상을 교직에 몸 담으셨는데, 선생님 네 분 모두 표정이 밝으시고 여유로움이 묻어나셨다. 어려움 속에서도 아이들과 부대끼며 올곧게 학교를 지켜 오신 선생님들의 연륜은 함께 자리한 후배들을 겸허하게 하는 어떤 힘이 있었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한 선배들의 격려는 묵직한 울림 그 이상이었다. 

설 연휴 동안 오가며 차 속에서 강신주님의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를 읽었다. 선종 불교의 화두집 <무문관>을 풀이한 것인데, 특히 임제 스님의 직언이 섬광처럼 가슴에 박혔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있는 곳마다 참되다는 의미. 따지고 보면 어떤 상황에서든 주인으로 살라는 명령인데, 주인으로 사는 또는 살아온 이들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병동에서 만난 선배 간호사들, 배우 지성, 퇴임하시는 선배 선생님들...거친 현장에서 주인으로 사는 삶이 보여주는 감흥은 그것이 어떤 모습이었든 예술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학교로 옮겨 짐을 들이느라 보건실에 들어서면서, 잠깐 동안 '수처작주 입처개진'을 되내였다. 교직 생활 15년여를 향해 가는 지금, 나의 삶이 주인의 생이어서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예술로 비춰질 수 있기를 감히 소망하면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보건실, #수처작주 입처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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