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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우마 1

고향인 천안을 떠나 대전으로 이사를 온 건 지난 33년 전이다. 당시 아들은 생후 백 일을 갓 넘었고 나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그 즈음 나는 재직 중인 회사에서의 직함이 주임(主任)이었는데 이듬해 과장급인 소장 자리를 놓고 각축이 벌어졌다.

소장 물망에 오른 사람은 기존 대전지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주임 급 세 명과 나, 이렇게 모두 네 명이었다. 한데 치열한 소장으로의 승진 경쟁은 비단 실적뿐만 아니라 근거 없는 비방(誹謗)으로까지 이어졌다.

그 비방의 중간에는 실로 어처구니없게도 소위 '지역감정'까지도 실려 있었다. 예컨대 "감히 조그만 영업소 소재의 천안 출신이 지사(支社)가 있는 대전으로까지 이사를 와서 승진자리까지 넘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결국 소장 자리는 나에게로 낙착되었다.
하지만 한동안 어떤 트라우마(trauma)는 나를 괴롭혔다.

# 트라우마 2

오랫동안의 출판과 언론사 생활을 청산하고 지난 2012년부터 경비원이란 직업으로 갈아탔다. 경비원은 통상 두 명이 짝을 이루는 짝꿍 형태로 일한다. 그런데 내 짝꿍이 된 이가 어찌나 텃세를 부리며 또한 괴롭히는지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그렇지만 나를 경비원으로 소개한 이의 체면을 봐서라도 내 맘대로 그만 둘 수도 없었다. 당시의 기분이 어땠는가 하면 아침(주간근무)이나 오후(야간근무)에 직장에 나가자면 흡사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느낌에 다름 아니었다.

참다 못 해 그와 한바탕 언쟁을 벌인 뒤 얼마 안 되어 지금의 직장으로 이동했다. 꿈에서조차 보기 싫었던 그 짝꿍과 헤어지니 마치 지옥에서 천국으로 온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그 당시의 안 좋았던 기억 또한 또 다른 트라우마였다.

# 트라우마 3

며칠 전 절친한 죽마고우가 지금보다 급여가 많고 처우(處遇)도 좋다는 곳으로의 이직을 권유했다. 친구의 나를 향한 우정과 배려가 고마워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외 다수의 증빙서류까지 준비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직은 그만 두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건 거기서 다시금 맞닥뜨릴 수 있을 또 다른 텃세와 아울러 낼모레면 육십이 되는 나를 향한 유.무형의 신출내기 취급 따위가 다시금 또 다른 트라우마의 어떤 두려움으로 다가온 때문이었다.

대저 직장의 경우, 특히나 박봉의 경비원이란 직업일수록 그 조직원과의 관계, 혹은 짝꿍과의 사이가 금슬상화(琴瑟相和)이긴 어렵다. 오히려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못 잡아먹어서 한이 된 양 그렇게 치졸하게 구는 이가 더 많은 것이 이 세상사의 어떤 부조화(不調和)이다.

오늘 오후에 처조카가 결혼한다. 그래서 정오 즈음 아들과 딸도 올 것이다. 아들과 딸이 결혼하고 나면 지금의 직업인 경비원을 그만 둘 생각이다. 그리고 야근과 피곤, 그리고 트라우마까지 없는 새로운 직업과 직장으로 바꿀 요량이다.
첨부파일
SAM_0516.JPG


태그:#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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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초경서반]&[사자성어는 인생 플랫폼]&[사자성어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 대전자원봉사센터 기자단 단장 ▣ 月刊 [청풍] 편집위원 ▣ 대전시청 명예기자 ▣ [중도일보] 칼럼니스트 ▣ 한국해외문화협회 감사 / ▣ 한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CEO) 수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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