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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이 아름다운 월관봉인데 공자는 저곳에서 월나라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 남천문과 월관봉 설경이 아름다운 월관봉인데 공자는 저곳에서 월나라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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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간 반의 힘든 등정 끝에 오른 남천문에서 국수와 과일로 점심을 먹는다. 태산을 찾은 황제도 두부 요리와 채식으로 몸을 정갈히 했다고 한다. 해발이 높아질수록 물, 과일 값이 비싸지는데, 보랏빛 속이 예쁜 무를 사서 먹어보니 매콤하면서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알고 보니 사과, 배하고도 안 바꿔 먹는 웨이팡(濰坊) 특산물이라고 한다. 

그리스인들이 올림포스 산에 제우스를 비롯한 12신들이 산다고 믿었던 것처럼, 중국인들도 태산에 신이 있다고 믿었다. 조숙했던 중국의 고대 문명은 태산신에 대한 제례를 순임금 이래 72명의 군왕과 황제가 직접 5년에 한 번 봉선(封禪)이란 이름으로 거행했으니, 그 역사 유적이 태산 도처에 풍부히 남아 있다. 또 그리스 신화에 버금가는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요재지이> 등의 작가들도 모두 태산을 답사해 구전되던 신화와 전설들을 소설에 담고 냈으니, 태산은 중국의 역사와 신화가 한데 어우러진 특설 무대가 아닐 수 없다. 그 특설 무대에 오늘은 눈, 안개, 구름의 특수 효과까지 더해져 그 다채로움이 더욱 현란하게 펼쳐진다.

걸어서 왔든 케이블카를 탔든 하늘 거리에 온 사람은 모두 신선이다.
▲ 하늘 거리, 천가 걸어서 왔든 케이블카를 탔든 하늘 거리에 온 사람은 모두 신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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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이 나타날듯 신비한 풍광들

1264년 원대 대묘의 주지 장지순(張志純)이 지었다는 남천문 서편으로 당시에 조각된 천문명(天文銘) 석각이 있고, 서천문(西天門), 월관봉(月觀峰)이 이어지는데 눈길이 미끄러워 하는 수없이 돌아선다. 케이블카 위에 있는 월관봉은 저녁 노을을 감상하기 좋은 곳으로, 공자가 달(月)과 발음이 같은 월(越)나라를 바라보던 곳이라 한다.

동쪽으로 걸음을 돌려 조금 가자 하늘 거리, 천가(天街)가 나온다. 이미 십팔반의 용문을 지나 왔으니,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등용문(登龍門)한 신선인 셈이다. 그런데 하늘 거리에 웬 인가(人家)가 펼쳐지더니 여기저기 호객을 하며 물건까지 팔고 있다. 태산 원주민들이 명나라 때부터 태산에 소원을 빌러 오는 사람들에게 향을 팔며 숙식을 제공해온 곳이다.

저 멀리 태산의 정상 옥황정까지 가는 길에 수많은 얘기들이 스며있다.
▲ 천가에서 옥황정까지 저 멀리 태산의 정상 옥황정까지 가는 길에 수많은 얘기들이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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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은 일출에 대해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인데 태산은 좀 특별한 지 야간 산행을 하거나 이곳 천가에서 1박을 하면서까지 일출을 보려는 중국인이 많다. 천가 동북 쪽엔 신이 머물러 쉰다는 신게빈관(神憩貧館)이라는 3성급 호텔도 있다. 처음 태산에 올랐을 때 산 정상에 또 하나의 마을이 있는 게 낯설게 여겨졌던 기억이 난다.

빙판길을 조심조심 걸어가니 안개에 쌓인 승중(升中)이란 석방이 보인다. 이곳은 황제가 봉선의식을 마치고 돌아오며 하늘에 제례의 성공을 보고하던 곳이다. 뒷면에는 봉원(蓬元)이라고 쓰여 있는데, 태산이 동천복지(洞天福地), 즉 신선이 사는 세계라는 의미다. 근처에 고대 중국의 발명왕이자 장인의 수호신인 노반을 모신 노반동(魯班洞)과 지금은 대묘에 있는 이사의 진태산각석(秦泰山刻石)이 원래 세워졌던 북두대(北斗臺)가 있을 터인데 몰아치는 눈보라와 안개에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다.  

승중은 황제가 하늘에 제례의 성공을 보고하던 곳이다.
▲ 승중 석방과 눈꽃들 승중은 황제가 하늘에 제례의 성공을 보고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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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길가에 신선이 만들어 놓은듯 예쁜 눈사람과 눈꽃을 뒤집어 쓴 붉은 열매가 이국의 방문객을 맞이해준다. 게다가 전날 대묘에서 봤던 덩잉차오(鄧潁超)의 글귀를 산정에서 다시 보니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1984년, 80세 고령의 나이에 이 글귀를 남겼는데, 서체에 힘이 없어 마치 어린 아이가 쓴 것 같은 자연스럽고 천진한 아름다움이 묻어 있다.

공자가 안회와 함께 오(吳)나라를 봤다는 망오성적(望吳聖蹟) 석방이 나타난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오는 얘기인데, 공자가 이곳에 서서 안회에게 오나라가 보이냐고 묻자 안회가 보인다고 했다. 그러자 공자는 보인다면 문 밖에 있는 것이 뭐냐 묻는다. 안회가 흰 명주 같다고 하자 공자가 그것은 한 필의 백마(白馬)라고 했다는 것인데, 어찌 여기서 천리 밖 오나라가 보였겠는가. 아마 말을 닮은 하얀 구름이 하늘에 떠 있었던 모양이다. 아들에게 "한국이 보이느냐?" 했더니 바람에 눈뜨기도 힘들다는 심드렁한 대답이다.

나이 여든에 쓴 서체여서 아이가 쓴 것처럼 힘 없이 천진하다.
▲ 덩잉차오(鄧潁超)의 글귀 나이 여든에 쓴 서체여서 아이가 쓴 것처럼 힘 없이 천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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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에 공자묘(孔子廟)가 보여 계단을 오르는데 순간적으로 안개가 걷히며 태산 산정의 설경이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태산은 산 중에 공자(泰山, 山中之孔子)이고, 공자는 사람 중에 태산(孔子, 人中之泰山)"이라고 하는데, 그런 두 인연이 오묘한 조화를 부리는 듯하다. 공자의 핵심 사상이 인(仁)이고, 인자요산(仁者樂山)이니 공자와 태산의 만남이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인연 때문에 도가의 신을 모시는 태산에 유가 사상가인 공자를 모신 공묘를 세운 것이리라.

명 가정제 때 세워진 이 공묘는 전 세계 2천여 개의 공묘 중 해발 고도가 가장 높을 것이다. 공묘에는 공자 외에도 안회, 증자, 맹자, 자로를 모신 사배(四配)와 12현철(賢哲) 사당이 있다. 그러고 보면 공자의 일생은 산과 관련이 깊다. 니구산(尼丘山)에서 숙량흘과 안징재의 야합(野合)으로 태어나 이마가 언덕처럼 나와 구(丘)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죽기 전에도 "태산이 무너지는가, 대들보가 허물어지는가, 철인은 병들었는가(泰山其頹乎, 梁柱摧乎, 哲人萎乎!)" 라는 말을 남기고 임종했다니 말이다.

공자가 자신의 조국 노나라를 바라보았다는 첨로대(瞻魯臺),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았다(登泰山而小天下)는 표지석 등 공자의 흔적을 태산은 그 넉넉한 품으로 안아주고, 공자는 그 품에 안겨 태산의 덕과 인자함을 우러르고 있는 듯하다.

공자와 태산의 만남이 제법 잘 어울리고 인연이 서로 깊다.
▲ 태산에 있는 공자묘 석방 공자와 태산의 만남이 제법 잘 어울리고 인연이 서로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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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묘를 보고 내려와 다시 동쪽으로 계단을 오르니 서신문(西神門)이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천상궁전(天上宮殿), 벽하사(碧霞祠)다. 어느새 또 안개가 몰려와 벽하원군이 사는 곳을 더욱 신비롭게 감싼다. 도교에서 진리를 깨달아 신선이 된 남자를 진인(眞人), 여자를 원군(元君)이라고 하는데, 송대 진종이 건축할 당시에는 동악대제를 모셨는데 명대를 거치면서 벽사원군으로 바꿔졌다.

명 주원장에 의해 태산의 위상이 낮아진 것이다. 중앙에 벽사원군을 모신 정전이, 동서로 양광(陽光)할머니,송생(送生)아주머니 사당이 있다. 우주와 생명을 다스리는 여신상들로 고대로부터 다산과 박애를 기원하는 사람들이 태산에 몰린 이유다. 지금도 신령스런 태산의 정기를 받은 자애로운 벽하원군이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믿음이 강해 하루 종일 향객의 향불이 끊이지 않는다.

태산은 산 중에 공자요, 공자는 사람 중에 태산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 태산 공묘 태산은 산 중에 공자요, 공자는 사람 중에 태산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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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복히 눈에 쌓인 벽하사에 모든 소원 다 들어주는 자애로운 벽하원군이 산다.
▲ 공묘에서 내려다 본 벽하사 소복히 눈에 쌓인 벽하사에 모든 소원 다 들어주는 자애로운 벽하원군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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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고도가 높아 기온이 낮고 기와가 얼어 깨지기 때문에 청동 기와를 사용하고 처마나 지붕도 철로 마감한 것이 이채롭다. 강한 바람을 견디기 위해 지붕에 굵은 기와 고랑을 냈는데 모두 360개로 1년을 나타낸다.

안개 속 계단을 더듬어 오르니 대관봉(大觀峰)이라는 이정표가 보이고, 그 앞에 거대한 석각 80여 개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하얀 눈을 배경으로 금빛으로 빛나는 당 현종의 <기태산명(紀泰山銘)>이 단연 시선을 사로잡는다. 당 현종 하면 양귀비와의 로맨스가 먼저 떠오르는데, '개원의 치(開元之治)'로 불리는 28년간의 태평성대를 구가하기도 했다. 725년 9월, 태산 봉선의식 전 과정의 내용을 높이 13.3m, 폭 5.7m에 바위에 석각한 것이다.

당 현종의 <기태산명(紀泰山銘)>과 청마애 등이 병풍처럼 서 있다.
▲ 대관봉(大觀峰) 당 현종의 <기태산명(紀泰山銘)>과 청마애 등이 병풍처럼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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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문단으로 된 내용은 봉선의 역사와 선조의 업적, 자신이 하늘에 비는 소원과 각오 등으로 되어 있으며 총 1008자다. 아이들도 자신이 빈 소원을 비밀로 여겨 말하길 꺼리듯 원래 봉선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는데, 당 현종의 이 석각으로 그 비밀이 알려진 셈이다.

제작 당시 햇빛과 바람에 글귀가 마모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금을 했기 때문에 지금도 다른 붉은색 석각과 달리 금색으로 칠해져 있다. 봉선 의식에 참여한 모든 관리들은 한 계급씩 승진하는데, 당 현종의 봉선 때 한 장인이 자신의 사위를 9품에서 5품으로 승진시킨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어로 장인을 태산 같은 아버지라는 의미로 '악부(嶽父)'로 부른다.

<기태산명>을 당마애(唐磨崖)라 하고, 그 왼쪽으로 청 강희제가 쓴 운봉(雲峰) 글귀가 있는 곳을 청마애(宋磨崖)라 한다. 청 건륭제의 시 <야숙대정자(夜宿垈頂作)>도 여기 새겨져 있다. 몸을 하늘의 은하수에 둔 것 같다는 치신소한(置身霄漢)과 청벽단애(青碧丹崖) 등 80여 개의 석각 사이로 당에서 청나라까지 천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고 있는 셈이다. 암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홈이 파져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원래 이곳에 동악묘(東嶽廟)가 있던 흔적이다.

기온이 크게 떨어지며 옷에 남은 물기가 얼어붙어 걸을 때마다 바삭거린다. 좀 더 올라가자 중국 신화에 나오는 복희(伏羲)를 모신 사당인 청제궁(靑帝宮)이다. 3황 5제 중 최고의 제왕으로 불리는 복희를 태산 정상 가장 가까운 곳에 모시며 황제가 본받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안개와 뒤섞인 향내음을 맡으며 눈길을 헤쳐 오른다. 

중국 인민폐 5위안 지폐의 뒷면에 도안되어 있는 풍경이다.
▲ 오악독존 중국 인민폐 5위안 지폐의 뒷면에 도안되어 있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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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유통되는 인민폐 5위안 뒷면에 오악독존이 도안되어 있다.
▲ 중국 화폐 위안 뒷면 현재 유통되는 인민폐 5위안 뒷면에 오악독존이 도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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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온통 눈과 안개로 하얀데, 붉은 글씨로 오악독존(五嶽獨尊) 글귀가 크게 보인다. 중국 인민폐 5위안 지폐의 뒷면에 도안되어 있는 풍경이다.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많아 내려올 때 기회를 봐 사진을 찍기로 하고 더 올라가니, 작은 바위에 공자가 태산에 오른 것을 기념한 공등암(孔登巖)이 새겨져 있다. 그 바로 위에는 한 무제의 커다란 무자비(無字卑)가 눈과 안개를 뒤집어쓰고 서 있다.

자신의 업적이 너무 많아서 글로 쓸 수 없어 무자비를 세웠다는데, 눈싸움에 정신없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만약 이곳에 글을 쓸 수 있다면 어떤 업적을 적어주면 좋을까 물었더니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고조선을 멸망시킨 사람이 바로 한 무제라고 했더니 눈송이가 바로 무자비를 향한다.

무자비 위에 모자까지 씌워 놓아 한 무제의 높은 공덕을 기리고 있다. 그러나 사마천은 <사기, 봉선서(封禪書)>에서 한 무제가 지나치게 봉선의식을 정치 의식화하고 유생보다는 방사를 중시하는 도가적 미신으로 국비를 낭비했다고 지적한다. 무자비에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찾아오는 것처럼, 한 무제는 진시황과 함께 고대 중국 문명의 설계자로 높게 평가 받는 동시에, 지나친 흉노 원정과 도가적 장생불사에 빠져 백성들을 파탄에 이끌었다는 비판 또한 공존한다.

자신의 업적이 너무 많아서 글로 쓸 수 없어 무자비를 세웠다고 한다.
▲ 한 무제의 무자비(無字卑) 자신의 업적이 너무 많아서 글로 쓸 수 없어 무자비를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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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m 비석과 그 주위를 수많은 마음을 연결해주는 연심쇄(連心鎖)가 둘러싸고 있다.
▲ 태산극정(泰山極頂) 1545m 비석과 그 주위를 수많은 마음을 연결해주는 연심쇄(連心鎖)가 둘러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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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 위가 바로 태산의 정상 옥황정(玉皇頂)이다. 중앙에 태산극정(泰山極頂) 1545m 비석과 그 주위를 수많은 마음을 연결해주는 자물쇠, 연심쇄(連心鎖)가 둘러싸고 있다. 딸이 태산극정 위에 그려진 무늬가 뭐냐고 하는데 알 길이 없어 주변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도교에서 오악에 부여한 진형도(眞形圖)로, 비 우(雨)처럼 생겨 불, 재앙을 막고 복을 불러주는 부적과 같은 역할을 하는 거라 한다. 그러고 보니 태산 입구 홍문에서 저 문양을 본 게 생각이 났다. 해를 맞이하는 영욱정(迎旭亭), 황하를 바라본다는 망하정(望河亭)으로 한 바퀴 도는데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만 휘몰아친다. 물기가 있는 것은 모두 얼음 알갱이로 변한 모습뿐이다.

옥황묘(玉皇廟)를 둘러보다 보니, 황제가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거행할 때 밟고 섰다는 고등봉대(古登封臺)가 한켠에 서 있다. 아마 진시황, 진이세, 한무제, 한광무제, 한장제, 한안제, 수문제, 당고종, 무측천, 당현종, 송진종, 청강희제, 청건륭제 등이 저 봉대를 밟고 하늘에 제례를 올렸을 것이다. 시망유풍(柴望遺風) 편액도 보인다. 순임금이 섶나무 장작(柴)에 불을 붙여 하늘에 제례를 올린 것에서 하늘에 대한 제례를 봉(封)이라고 하고, 땅에 대한 제례는 선(禪)이라 해다.

도교에서 재앙을 피하고 복을 불러 온다는 일종의 상징 부호이다.
▲ 오악 진형도 도교에서 재앙을 피하고 복을 불러 온다는 일종의 상징 부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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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의식의 의미가 진정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의문이다.
▲ 옥황묘(玉皇廟) 안의 비석과 글귀들 봉선의식의 의미가 진정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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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기록에 의하면, 봉은 태산에서, 선은 태산자락인 양부산(梁父山)에서 거행했다고 한다. 하늘의 동쪽 기둥(天左一柱), 오직 하늘만이 위에 있는(惟天在上) 태산을 찾아 봉선한 역대 황제가 진정 백성들의 삶을 보듬어 안기 위해 보도중생(普渡衆生)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런 글귀들이 태산 꼭대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걸음을 돌려 내려가려는데 또 한 차례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두보처럼 정상에서 뭇 산의 작음을 보고, 이백처럼 천하가 작음을 느껴야 하건만, '시계 제로'의 상황이다. 아쉽지만 하늘의 일을 어찌하랴. 간혹 안개가 걷히며 펼쳐지는 기관(奇觀)에 감사할 따름이다. 올라오며 안개에 사라졌던 석각들이 하나 둘 고개를 내민다. 앙관부찰(仰觀俯察), 우러러 하늘을 보고 몸을 굽히어 땅을 살핀다는 <주역>에서 따온 글귀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지, 또 현실을 살아감에 허황됨은 없는지 성찰하라는 의미로 하산 길에 잘 어울린다. 바로 아래 웅장하게 하늘의 동쪽에 솟았다는 웅치천동(雄峙天東)과 공자가 이곳에 올라 천하가 작은 줄 알았다는 공자소천하처(孔子小天下處) 표지석도 나타났다. 일관봉(日觀峰)으로 가는 이정표가 있지만, 눈에 아예 길이 사라진 상태다. 아내가 미련을 버리라고 한다. 그래 강희제가 그 많은 말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과연(果然)' 두 글자를 남긴 것처럼 마음을 비워야 한다. 

강희제가 남긴 이 짧은 한마디처럼 미련을 버리고 말을 아껴야 한다.
▲ 과연(果然) 강희제가 남긴 이 짧은 한마디처럼 미련을 버리고 말을 아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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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내려오며 특설 무대 태산에 장착된 대자연의 웅장한 특수효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자를 이를 때 태산과 북두칠성가 합쳐진 태두(泰斗)라는 말을 쓰는데, 태산의 권위와 무게는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태산 그 자체가 갖는 매력도 물론 크지만 그가 두르고 있는 역사의 무게, 그를 다녀간 인물들의 무게가 더 찬란하고 막중하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자신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소통을 통한 관계맺음으로 주변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하는 것이 어쩌면 태산과 같은 무게를 갖는 일이리라.

태산 산정의 설경과 달리 천외촌에는 아직 남은 가을이 단풍을 물들이고 있다.
▲ 천외촌(天外村) 태산 입구 태산 산정의 설경과 달리 천외촌에는 아직 남은 가을이 단풍을 물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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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카와 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하산행은 정말 산이 무너지는 것처럼 빠르고 쉽다. 태산 등정의 소감을 묻자 아이들은 한결같이 힘들었지만 뿌듯하다는 반응이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따뜻해지면 한 번 더 오자고 했더니, 다들 손사래를 친다. 지금은 언젠가 한번은 올라야 했던 태산이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홀가분함을 더 즐겨야 할 때인가 보다.

중천문에서 탄 버스가 구불구불 계곡을 휘돌아 천외촌(天外村)에 도착하며 태산 등정이 끝났다. 중천문에 피어있던 개나리에게, 천외천의 늦가을 단풍에게 태산 산정의 그 멋진 설경 얘기를 들려주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해진다. 아마 봉선 의식을 마친 당태종이 이런 심정으로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기태산명(紀泰山銘)>을 새기지 않았을까.


태그:#태산, #남천문, #옥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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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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