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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사람들이 제일 가고 싶어 하는 휴양지 중 한곳이다.
▲ 삔우린의 깐도지 호수 공원 미얀마 사람들이 제일 가고 싶어 하는 휴양지 중 한곳이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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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봄에는 '창경원'으로 벚꽃놀이 가자."

이 말을 들어본 사람은 분명 40대 이상이다. 불과 30여 년 전까지 조선의 왕궁은 코끼리·사자·호랑이 등 온갖 동물들의 분뇨가 가득했다. 특히 봄이면 온통 벚꽃에 뒤덮여 조선의 왕궁이라기보다는 그저 유원지라는 느낌이 훨씬 강했다. 이처럼 '창경원'이라는 단어 속에는 잃어 버린 왕조의 치욕이 들어 있다.

창경원은 원래 수강궁이라 하여 조선 세종 원년에 상왕이었던 태종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그 후 성종 때 대궐을 증축해 창경궁이 되었다. 조선 왕조의 위엄이 깃든 왕궁에 일제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지어 조선에 치욕을 주었다. 한일합방 1년 전인 1909년의 일이다.

이렇게 망국의 한을 담은 채 동물원으로 전락한 왕궁은, 해방이 된 후에도 복원되지 못하고 한참 동안 유원지 형태를 유지했다. 봄이면 일제가 심어 놓은 벚꽃을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은 모여 식민의 치욕도 잊은 채 '창경원 벚꽃놀이'를 즐겼다. 이런 부끄러운 역사는 1984년 서울대공원으로 동물원을 옮길 때까지 계속되었고, 1986년에야 복원되어 창경궁이라는 제 이름을 다시 찾게 되었다.

식민지 시절, 외세가 만든 화사한 유원지

1년 내내 각종 꽃들이 만발하는 곳이다.
▲ 깐도지 호수 정원 1년 내내 각종 꽃들이 만발하는 곳이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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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사람들이 제일가고 싶어 하는 휴양지 중 한 곳이 삔우린(Pyin Oo Lwin)이다. 삔우린은 만달레이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60여 km 떨어져 있는 작은 휴양도시다. 이곳은 해발 1000여 m의 고원 도시로, 고온 다습한 미얀마 기후와 전혀 다르게 1년 내내 시원하고 맑은 공기로 쾌적하다.

미얀마 현지인들은 이곳을 '꽃의 도시"라는 의미로 빵묘도(Panmyodaw)라고 부른다. 1년 내내 각종 꽃과 과일, 향이 좋은 커피 등을 맛 볼 수 있다. 삔우린은 과거에 메묘(Maymyo)라고 불렸다. 영국군 장교인 메이(May) 대령이 살던 마을(묘myo)이라는 뜻이다. 이름 속에 들어 있듯 이곳은 영국신민지 시절 영국군의 휴양도시로 건설된 곳이다. 시내를 돌다 보면 아직도 영국풍의 건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 공원 내에는 잘 가꾸어진 각종 나무들, 향이 좋은 아라비아 커피 농장,규화목 박물관, 공중산책로 등이 있다.
▲ 깐도지 호수 공원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 공원 내에는 잘 가꾸어진 각종 나무들, 향이 좋은 아라비아 커피 농장,규화목 박물관, 공중산책로 등이 있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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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남쪽에는 삔우린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호수 공원 국립 깐도지 정원(National Kandawgyi Garden)이 있다. 대충 둘러봐도 2시간 이상 소요되는 넓은 정원으로 화석·식물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1년 내내 각종 꽃들이 만발하고 여러 종류의 조류가 서식하고 있는, 상당히 잘 보존된 공원이다. 이 아름다운 정원에서 나는 '불경'스럽게도, 한때 동물원으로 빼앗겼던 창경궁를 보았다. 삔우린의 아름다운 정원 속에 우리의 아픈 식민의 역사가 아른거렸다.

미얀마의 식민지 역사... 우리나라와 겹쳐 보인다

대부분 동남아시아 국가가 그렇듯 미얀마의 근대사에도 아픈 식민지 역사가 들어 있다. 1855년 미얀마의 마지막 꼰바웅 왕조는 만달레이 왕궁을 에워싼 영국군에 항복하고 마지막 왕 띠보는 인질이 되어 인도로 유배된다. 만달레이 시내 한복판에는 지금도 사방이 거대한 해자로 둘러싸인, 사라진 마지막 왕조의 한이 서린 만달레이 왕궁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왕궁을 보면서 잃어 버린 우리의 조선왕조가 투영되어 영 마음이 좋지 않았다.

미얀마 근대사는 이렇게 영국 신민의 역사로 시작되었다. 마지막 왕조를 무너뜨린 영국은 미얀마를 인도의 한 주로 편입 시키고 수많은 인도인과 중국인들 대거 유입 시켰다. 그리고 다수의 버마족을 견제하기 위해 친족·까친족 등에게 힘을 실어 주고 라카잉 주에 기독교 선교활동을 지원하여 종족 간 갈등을 조장했다. 이러한 영국 식민 정책의 후유증은 아직까지도 남아 미얀마 종족 간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다.

삔우린의 아픈 식민의 역사, 이곳은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군의 휴양도시였다.
▲ 깐도지 정원 안내판 삔우린의 아픈 식민의 역사, 이곳은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군의 휴양도시였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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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의 역사도 있지만 미얀마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독립운동의 역사도 있다. 1930년대 들어 미얀마의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선 사람이 바로 아웅 산 수 치 여사의 아버지인 아웅 산 장군이었다. 아웅 산 장군은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고자 일본과 손잡고 영국군과 싸워 물리쳤다.

하지만 일본은 제국주의 속내를 드러내며 미얀마 곳곳을 폭격하고 미얀마를 점령한다. 또 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 기간은 영국보다 짧은 기간이었으나 훨씬 악랄하게 핍박해, 미얀마인들에게 분노와 치욕을 느끼게 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으로 죽였고 많은 미얀마 여성들을 위안부로 강제 동원했다.

영화로도 제작된 '콰이강의 다리'는 일제 식민지 수탈의 잔혹성을 대변하는 현장이다. 수많은 미얀마 사람들과 영국군, 네덜란드 포로들이 동원되어 가혹한 노동 끝에 사망했다. 현지 가이드 말에 의하면 미얀마 사람들은 지금도 영국인보다 일본인에게 더 호의적이지 않다고 한다.

미얀마 곳곳을 여행하면서 느낀 점은 미얀마 사람들은 식민의 역사를 결코 쉽게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얀마 독립의 영웅 아웅 산 장군에 대한 존경의 마음은 거의 신격화 수준이다. 미얀마 곳곳에는 아웅 산 장군의 이름을 딴 지명이나 거리, 공원이 있으며 집집마다 아웅 산 장군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니 아직까지도 많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제대로 된 평가도 받지 못한 채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현실과 비교되어 부끄럽고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매국의 더러운 자양분을 먹고 자란 대부분 친일파 후손들은 자기반성도 없이 오히려 기득권 세력이 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하니 속이 터질 지경이다. 물론 미얀마도 들여다보면 식민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구석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나라의 모습은 '누가 뭐래도 이건 진짜 아니다'.

최근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하여 제헌국회에 설치되었던 특별기구) 해체의 주범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겠다는 무리들을 보면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면 과오는 반복된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다.

길거리 노점에서 파는 아웅산 장군 관련 책
▲ 미얀마 독립의 영웅 아웅산 장군 길거리 노점에서 파는 아웅산 장군 관련 책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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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노골화되어 가는 일본의 우경화도 마찬가지다. 아베 정권은 식민의 역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가 전범들을 추모하고 수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과도 없이 오히려 군국주의 부활을 준비하는 듯한 행보를 하고 있다. 파렴치한이 따로 없다.

그 이면에는 우리의 제대로 된 친일 잔재 청산과 반성 그리고 평가가 미흡했던 이유도 있다. 올해가 광복 70주년 되는 해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당장 친일잔재를 청산해야 한다. 국가는 아직도 머나먼 타국에서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온당한 대우와 평가를 해줘야 한다.

이제 곧 봄이다. 다시 찾은 창경궁에도 봄은 흐드러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제 식민의 아픈 상처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미얀마 삔우린 아름다운 꽃밭 속에 식민지의 아픈 역사가 숨어 있듯이 말이다.

덧붙이는 글 | ※미얀마어 표기는 현지 발음 중심으로 표기 했으며 일부는 통상적인 표기법을 따랐습니다.



태그:#미얀마, #삔우린, #깐도지 정원, #땅예친 미얀마, #아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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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공작소장, 에세이스트, 춤꾼, 어제 보다 나은 오늘,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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