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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 "박원순과 한겨레마저... 우리한테 왜 이러세요?"에 대한 '어떤 사람들'의 반응에 대하여 써보았다... 기자 말

2013년 12월에 고려대학교에서 시작된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운동을 기억한다. 나는 성소수자임을 밝히며 성공회대학교에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안녕하지 못합니다"라는 대자보를 써 붙인 뒤 '안녕들'에 합류했다. 이듬해 초에는 "성소수자,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를 써 붙이고 같은 이름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며 다양한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안녕들' 활동을 하던 당시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이 운동에 감명 받았다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말할 수 있는 사람'과 '말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멋대로 구분한다는 점이었다. 말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지목된 이들 중에는 성소수자도 있었다. 내 첫 번째 대자보에는 "이런 소리들이 분열을 조장한다"는 댓글이 달렸고, 두 번째 대자보에는 "개나 소나...", "안녕들의 본질은 철도민영화"와 같은 비난조의 댓글이 무수히 달렸다.

이 비난들이 오죽했으면, 안녕들 측에서 직접 댓글을 달았을까.

"안녕들하십니까의 초심, 취지는 자기 정치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 다루게 된 것은 저희 입장에서 매우 반가운 일이지, 구별 짓고 배제할 일이 아닙니다."

2014년 1월, '성소수자, 안녕들하십니까?' 게시물에 달린 댓글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 관리자에게 캡쳐 화면 사용에 대해 양해를 구했음을 밝힙니다.
▲ 2014년 1월, '성소수자, 안녕들하십니까?' 게시물에 달린 댓글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 관리자에게 캡쳐 화면 사용에 대해 양해를 구했음을 밝힙니다.
ⓒ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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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경향신문>사의 건물을 침탈하고 민주노총 사무실을 쑥대밭으로 만든 날, 철도민영화 저지 운동이 끝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전하던 청년들이 보신각에서 경찰에게 쫓기던 2014년 새해 첫 순간 등을 기억한다.

이 밖에도 숱한 사건이 벌어진 바로 그 현장 그 때에, 나는 뭇 사람들이 '정치적'이라 말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썼다. 나도 이 사회의 시민이라는 것 외에 다른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소수자는 조용히 해!"라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대놓고 할 수는 없었다. 마치 내가 이만큼 노력했으니, 이제는 내 처지를 좀 이야기 해도 되겠냐고 엎드려 비는 모양새가 될까 싶어 꾹 참았다. 다만 대자보를 엮은 책 <안녕들하십니까?>의 에필로그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못 다한 이야기'에 지금까지와 같은 맥락의 말을 남겨두었을 뿐이다.

그런 내가 이제 와서 결국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내 분노 '버튼'이 제대로 눌렸기 때문이다. 최근 <오마이뉴스>를 통해 외친 나의 목소리(관련 기사 : 박원순과 한겨레마저...우리한테 왜 이러세요?)에 달린 댓글 중 추천을 가장 많이 받은 댓글 때문이다.

"이보소 기자양반. 지금 박원순 처지에 성소수자 챙길 형편이 된다고 보요? 집에 빚이 산더미라 그거 갚는다고 뼈골이 빠지는 아버지더러 자식이 형 누나는 사탕 챙겨 주는데 나는 왜 안 챙겨 주냐 따지는 꼴이지. 서울시에 이명박이나 박근혜 같은 사람이 뽑혀서 아예 완전 입도 뻥긋 못해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적절한 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지난 글에서, 나는 정부, 정치, 공권력, 언론이 자기 본분과 원칙을 무시하는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주장은 과격하지도 극단적이지도 않다. 터놓고 말해서, 기본을 지키자는 것이 소위 '진보적인' 주장으로 불릴 만큼 우리 사회가 병든 게 아니라면 이 주장은 진보조차 아니다.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말한 것 그리고 지난 글의 비판 대상 중 박원순 서울시장이 포함되었다는 것, 이 밖에 내가 댓글에서처럼 비난을 받은 다른 이유가 있을까?

박원순 서울시장이 인권헌장 제정을 거부함에 따라 인권활동가들이 서울시청 점거농성에 돌입했을 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성소수자를 비난하며 박원순 서울시장의 처지를 감쌌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민들에게 그의 처지를 이해받아야 할 정도로 무력한가? 아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오히려 영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동시에 분명히, 그가 서울시장으로서 가진 권력이 막강하다는 것을 민주적 절차를 훼손하고 인권헌장 제정을 거부함으로써 보여주었다.

사회적 소수자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려는 활동이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의 발목을 잡고 분열을 조장하는 것인양 매도하는 사람들은 늘 있었다. 그들은 소수자 시민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지금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으니, 당신들의 권리와 안전을 내팽개친 권력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라고. 다른 소리를 할 바에는 차라리 침묵하라고.

지금 국가안보가 시급하니, 민생이니 인권이니 운운하지 말라는 누구들의 말을 똑 닮았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아니라는, 성소수자가 말해도 되는 '적절한 때'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아니, 오지 않는다. 인종차별을 당하는 사람, 여성, 장애인, 청소년이 말하기에 적절한 때가 그렇듯, 늘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성소수자가 말해도 되고 말해야 하는 적절한 때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치적이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이야기할 때 성소수자 노동자들의 권리 또한 함께 이야기되기를 희망합니다. 성소수자 노동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편하게 또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일터를 희망합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이야기할 때 성소수자들의 권리 또한 함께 이야기되기를 희망한다. 적절한 때는 없다. 언제나 말해야할 때는 지금 이 순간이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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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뭇 사람들이 말하는 정치적인 사건에 개입하든 하지 않든, 성소수자 인권 문제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아직 이 사회에는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정신병동에 감금당하고, 가정폭력이나 집단 따돌림을 당할까 전전긍긍하고, 일터에서 자기 모습을 감춰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처지를 말하면, 사회진보와 인권을 외치던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들로부터 침묵을 강요받고는 한다.

이게 '왜 나에게만 사탕을 챙겨주지 않느냐고 따지는' 수준의 문제인가? 이러한 상황이 방증하는 것은, 성소수자 인권 문제가 사람들 간에 권력이 불균등하게 배분된 현실을 반영하며, 인권의 속성이 그러하듯 다분히 '정치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쓴 나는 정치적이다.

나의 정치적 필요를 근거로 다른 시민의 정치를 잡설 취급하는 것은, 정치의 영역에서 시민들 간에 이루어져야 할 건강한 토론이 아니다. 만약 지난 기사에 달린 최고 추천 댓글과 같은 반응이 흔치 않았다면, 나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어떤 성소수자는 박원순 서울시장과 타협할 수 있는 그의 면면을 찾으려 애썼을지도 모르겠다. '성소수자'는 성소수자에게 간과할 수 없는 정체성일지는 몰라도 유일한 정체성은 아니니까.

잘못을 저지른 상황에서 공연히 적을 늘리지 않고, 잘만 하면 오히려 상대를 아군으로 포섭할 수도 있다. 그 방법은, 잘못을 잘못이라 깨끗이 시인하고 이를 바로잡거나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사회적 소수자의 목소리를 침묵시킴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관철하려는 분들에게, 정중히 묻는다.

"지금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덧붙이는 글 | ※ 참고도서
<안녕들하십니까?>(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지음 / 오월의 봄 펴냄 / 2014.03 / 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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