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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등산하다보면 짜증부터 난다. 들과 산에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나오는 노래 때문이다. 노래 진원지는 바로 소형 라디오에 장착된 녹음기 때문이다. 녹음기에는 무려 수백 곡의 노래가 녹음되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고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신년을 맞아 자재암에서는 기도 행사를 하고 있다. 연등 앞으로 독성암이 보이고 있다.
 신년을 맞아 자재암에서는 기도 행사를 하고 있다. 연등 앞으로 독성암이 보이고 있다.
ⓒ 김학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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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객이 자재암 마루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다.
 등산객이 자재암 마루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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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소요산을 찾았다. 봄소식은 아직도 먼 듯하다.  나무만 앙상한 산 그늘에는 아직도 빙판이 그대로 남아 있다. 길가에 몇 그루 서 있는 개나리 나무에는 작은 싹이 오밀조말 돋고 있다. 봄이 멀지 않았음을 말해 주고 있는 듯하다. 노인들이 산에 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고요한 산에 노래소리가 가득하다.  

산사에 이를 때까지도 노래가 계속 된다. 노인들의 등산용 가방이나 주머니에서 노래가 나온다. 소요산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이다. 산 중간쯤에는 자재암이 있고 스님들이 조용히 수행하는 장소도 있다. 하지만 산에 오르는 노인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원효대사가 공부했다는 동굴 앞에서도 버젓이 노래가 계속 된다. 이런 명산들이 때아닌 노래 소리로 몸살을 앓고 있다. 매일 찾는 노인도 있지만 처음으로 찾아오는 노인도 있다. "가까운 줄 알고 왔는데 꽤 멀구먼요."  옆에서 걸어가고 있던 노인은 광명시에서 왔다며 이렇게 좋은 산인 줄 몰랐다면 감탄한다. 주머니에서 유행가 소리가 계속 흘러나온다.

묵묵히 걷고 있던 노인은 묻지도 않은 말을 들려준다. 며칠전 길에서 녹음기를 샀는데 충전기가 불량품인지 한번 충전하면 2시간도 못 간다며 불평을 늘어 놓더니 전에 것은 그렇지 않았다며 시간이 오래 가는 녹음기를 구입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산에 다닐 때 좋은 친구기 된다는 것이다. 노인은 노래를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란다. 짐작갈 만하다.

산을 오를 때도 노래는 계속 되고 있다.
 산을 오를 때도 노래는 계속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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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나 이런 빙벽이 봄을 가로막고 있는 듯하다.
 어디를 가나 이런 빙벽이 봄을 가로막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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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걷다보니 '여기서부터는 경내니 조용히 해주세요'라는 팻말이 보여 노인에게 이제는 음악을 끄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자 노인은 '그러면 그렇게 해야지요' 하고 순순히 녹음기를 껐다. 그러나 맞은 편 노인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볼륨을 더 높인다. 높은 음악 소리 때문에 즐거워야 할 등산길이 짜증길로 변한다. 

이런 일은 산뿐만 아니다. 노인들이 모인 장소면 어디서나 고음의 노래 소리를 듣을 수 있다. 예전에는 술에 취한 노인들이 직접 노래를 불렀지만 이제는 녹음기가 그 자리를 대신해 주고 있는 셈이다. 간편한 기계 하나로 하루 종일 음악을 듣는 것이 행복할 수 있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는 공해가 될 수 있어 걱정이다.         
 
108계단을 올라 자재임에 당도하니 예쁜 연등이 사방에 달려있어 겨울 산사가 더욱 아늑하게 느껴진다. 마음도 편안해 지는 것 같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으려고 보니 잔돈이 없어 망설이는데 그 옆에 돈 통이 놓여 있다.  꽤많은 동전이 있어 마음이 나쁜 사람이면 집어갈 수 있겠구나 헀는데 그런 일은 없다니 마음이 놓인다.
  
짐승이 먹을 도토리를 지금도 줍고 있다.
 짐승이 먹을 도토리를 지금도 줍고 있다.
ⓒ 김학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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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돈으로 바꾸어 커피 한 잔 뽑아들고 자재암 마루에 앉으니 따뜻한  아월 햇살이 뜰 가득 쏟아진다. 연등을 바라보고 있는데 보살님 두 분이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이 암자에 스님이 몇 분이나 계시나요?'하고 물었더니 '그런 것은 왜 묻느냐'며 '그런 쓸데 없는 데 관심 갖지 말고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세요'하고 퉁을 준다.

나는 속으로 '절 인심이 이렇게 고약해서야' 하다가, 보살님의 대답이 아주 틀린 것 같지는 않아서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난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개운하지 못하다. 헐벗은 겨울 산인데도 아름다움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다.

들고양이들이 사람을 경계하지도 않는다.
 들고양이들이 사람을 경계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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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자재 사이로 토끼도 보인다.
 폐자재 사이로 토끼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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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하는 길에 들고양이들이 여러 마리 보인다. 고양이도 배가 부른지 어정어정 산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여유롭다. 사람을 피하지도 않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토끼를 보고도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모른 체 한다. 소요산 동물들도 살생을 해서는 안 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웃음이 나온다.

산을 내려오는 도중 아주머니들이 잘 보이지 않는 산속에서 녹음기를 틀어 놓고 춤을 춘다. 원효대사님이 보신다면 아무래도 좋은 말씀은 하지 않을 것 같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하산 중에도 오고가는 노인들의 바지주머니에서는 어김없이 유행가 가락이 흐른다. 산 입구에 내려오니 아주머니들 여럿이 둘러서서 녹음기 흥정에 한창이다. 스스로 자제함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어폰을 사용해도 된다.

언제부터인가 등산로 입구에는 이런 녹음기를 파는 행상이 많다.
 언제부터인가 등산로 입구에는 이런 녹음기를 파는 행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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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 등산객이 많아지면 산을 찾은 등산객들의 주머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소리로 명산이 몸살을 앓게 될까 걱정이다.


태그:#소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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