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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이 너무 좋아서, 비싼 대관료에 행복한 눈물을 흘리며 다시 앙코르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는 내 귓가에 울리던 이준석 후플러스(Who+) 대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당연히 지하에 있는 소극장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신선한 충격을 받은 채 공연장을 향한다.

연극 <흑백다방>의 막이 내릴 때,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계단을 내려가는 '하산'의 과정은 연극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자성과 고행의 순간이었다. 70분이라는 다소 애매한 시간이 관객에게 주문한 건 '부조리'였다. 이를 관통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떠안은 채 계단을 내려와야 한다. 실제로 <흑백다방>의 메인 카피는 "삶의 부조리, 우리 시대 복수의 자화상"이다.

도발적인 것들은 확실히 무례한 법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우리 주변에는 특별한 이유 없이 행복한 사람들, 이를테면 손해가 확실한 계산에도 불구하고 이를 택하는 이들이 있다. 수리적 오류가 아니다. 눈앞의 남루한 현실이 즐거움과 행복을 지배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건 모순도 역설도 아닌 부조리에 가깝다. 멀리서 예를 찾을 것도 없다. 이 연극의 앙코르 공연에 대한 이준석 대표의 말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행복한 눈물을 흘리며 비싼 대관료를 냈다고 하지 않은가.

부조리의 극치를 보여주는 연극, 태생 자체가 부조리

무대에서 연기 중인 정성호
▲ 전화받는 카운슬러 무대에서 연기 중인 정성호
ⓒ 극단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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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은 태생 자체가 부조리다. 그래서 디지털의 문법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쉽게 곁을 주지 않는 드라마라 그런지 이해가 어렵다. 흘끔거리는 시선은 자연히 줄거리를 향한다.

부산 남포동에서 상처받은 사람에게 카운슬링을 해주며 다방을 운영하는 정성호. 그는 1년 중에 유일하게 쉬는 날이 있다. 다름 아닌 아내의 기일이다. 어딘가 모르게 순정파일 것 같은 너그러운 카운슬러에게, 비 오는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고 잠시 후 한 사람이 찾아온다. 비를 뒤집어 쓴 채 배낭을 메고 뛰어 들어온 남자, 윤상호는 어눌하고 자폐아적인 행동으로 흑백다방 주인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꼭 이날 밖에 안 된다며 상담을 요청한 정체불명의 남자는 다짜고짜 배낭을 내려놓는데 묵직한 소리가 들린다. 둘 사이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른다. 그리고 그들 뒤로 소리 없이 돌아가는 LP판. 잠시 후 시간을 거슬러 기억 위로 추억이 포개진다. 잊고 있던 과거가 의식의 수면으로 솟아오른다.

무대에서 긴장어린 연기를 펼치는 두 사람
▲ 카운슬러를 위협하는 피해자 무대에서 긴장어린 연기를 펼치는 두 사람
ⓒ 극단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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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되어 있던 평화가 증발하면서 생면부지의 두 사람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영역에서 대치한다. 그 분기점에서 회칼의 날은 번득인다. 가방에 든 작은 병은 무엇을 의미할까. 지니의 요술램프 같은 그 안에는 대체 무엇이 들은 것일까? 이들은 점점 어떤 사건을 향해서 분주히 서로를 탐문한다.

'복수' 대신 '진실'을 말하는 피해자

<술 한 잔 따라주세요>와 <어서오세요> 사이에 이 <흑백다방>이 있다. 모노 드라마와 7명의 배우 사이에 자리한 2인극, 절묘하게도 개척한 이 틈새시장은 시종일관 관객에게서 지루함을 빼앗는다. 대신 금속질감의 긴장감을 선물한다. 소품은 뭉툭하기 그지없다. 오래 된 전화기, 괘종시계 그리고 LP판. 변화의 흐름을 놓친 세태의 무시무시한 단면 같다. '아빠, 옛날 옛적에'와 같은 복고 콘셉트는, 중반 이후 회칼과 유골함에 곧바로 무게중심을 넘겨준다.

그리고 자신을 피해자로 믿는 혹은 인식하는 윤상호는 오래도록 숨겨둔 복수의 패를 꺼내들면서 정성호를 궁지로 몰아간다. 그런데 피해자가 요구하는 것은 정작 '보상'이 아니다. 심지어 목숨도 아니다. 어리둥절하게도 그는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고 한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에서 박노식이 열연한 백광호가 오버랩 된다. 두 배우, 닮았다. 말을 더듬는다는 면에서도 그렇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러고 보니 그때도 1980년대였다. 귀머거리에 가까운 남자가 제발 믿어달라는 말을 강조하는 <흑백다방>한테 1980년대는 과연 무엇일까? 바로 '말(word)'에 그 힌트가 있다.

남의 아픔을 이해하고 문제점을 치유하기 위해 해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한 카운슬러, 그러나 정작 그는 자신을 보지 못한다. 그와 대척점에 위치한 윤상호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데 목숨을 걸고 있다. 그런데 둘의 사이가 기묘하다. 한 사람의 말은 만근 이상의 무게를 지니는데 다른 한 사람은 정작 그 말을 듣지 못한다.

입모양을 보고 해석하는 윤상호가 왜 피해자인가를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에서 카운슬러의 말은 고상하고 부드러운 외피를 벗어던지고 적나라하게 실체를 드러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말(Word)은 세계(World)의 '디스(dis)'가 아닐까? 말이란 잘나봤자 결국에는 보잘 것 없는 세계가 아닌가하고 말이다.

처음부터 이 둘의 다툼과 싸움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노련한 전직 경찰이었던 정성호는 회칼의 위협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윤상호에게 동시대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설파한다. 심지어 어깨동무를 제안하기까지 한다. 그는 귀가 들리지 않는 남자가 자신을 찌르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상대방은 그저 답답했을 뿐, 절대 피해자가 아니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법이니까.

무대에서 열연을 펼치는 정성호와 윤상호
▲ 서로 커피를 마시는 카운슬러와 피해자 무대에서 열연을 펼치는 정성호와 윤상호
ⓒ 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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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이 끝날 무렵 정성호는 흑백다방에 서서히 적응되어 가는 윤상호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만 묻자. 정말 이게, 정말 네가 가져 온 거야? 도저히 널 믿을 수가 없다. 사람이 해서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는데…."

질문에 대한 뾰족한 답 대신 그저 잃어버린 얘기를 듣고 싶은 윤상호는 아내의 무덤을 향해 빗길을 뚫고 나가는 정상호의 닦다만 구두와 안경을 쓰며 흑백다방을 독점한다. 위치가 뒤바뀐 두 사람. 흑이 백이고 백이 곧 흑으로 뭉뚱그려지는 결론을 내린다. 극단 후암의 차현석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분노와 증오도 내려놓고,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기억의 상처들과 화해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자신과 타인의 과오를 용서하고 보듬어 준다. 마치 커피를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준비했다는 이 남자의 말이 귀엽다. 2015년 종로구 우수 연극축제에 초청받았으며 향후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이 색다른 전개가 어떻게 영화에서는 묘사될지 제법 궁금하다.

어쩐지 작품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했더니, 이 작품은 여러 수상실적에서 드러나는 어떤 '내공'의 DNA가 잠복해 있었다. 하지만 불친절하고 난해한 데 대해 면죄부를 주고 싶지는 않다. 괜히 인색해지고 싶다. 이 난해함이 그의 노림수였을지 모르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관람 후 앓은 몸살로 관람료 이상의 비용을 지불한 티켓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 하나, 극작과 연출을 담당한 차 대표의 이력을 더듬어보면 은근 상복이 많은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2001년 극단 창단 이후 꾸준히 작품을 세상에 선보인 저력 덕분이다. 요즘 유행하는 '열정페이'와 '재능기부'가 드러내듯, 특히나 열악한 창작환경 속에서 일군 결과이기에 더 기념비적이다.

극단은 인간의 삶을 몸으로 집대성한 연극의 산파(産婆)이다. 그 명맥을 이어가는 그의 노력을 응원한다. 지나치게 리얼해서 오히려 극단적인 연기를 선보인 두 배우에게 마지막으로 박수를 보낸다. 다음번에 앙코르 공연을 하게 되면 커튼콜 까지는 아니어도 좋으니 관객들한테 조금만 더 친절했으면 좋겠다는 부탁과 함께 말이다. 부조리의 기억을 일깨우는 '셀프 디스'만으로도 관객은 이미 작품의 메시지를 충분하게 수신했을 것이므로….

덧붙이는 글 | 기간 : 2015년 2월 21일 ~ 3월 8일
시각 : 매주 토·일 오후 3시
장소 : 대학로 소극장 스튜디오 76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40)
출연 : 정성호, 윤상호
관람가 : 12세 이상
관람료 : 1만2000원 / 학생 1만 원


이 기사는 <후아이엠>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흑백다방, #차현석, #극단 후암, #정성호, #윤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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