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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박근혜 대통령이 '증세 없는 복지를 말한 적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다가 다시 번복되는 소동이 있었지만, 그는 여러 차례 '증세 없는 복지'를 말했었다. 사진은 2013년 8월 대통령이 회의에서 관련 내용에 대해 발언하는 모습이다.
▲ '증세 없는 복지'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증세 없는 복지를 말한 적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다가 다시 번복되는 소동이 있었지만, 그는 여러 차례 '증세 없는 복지'를 말했었다. 사진은 2013년 8월 대통령이 회의에서 관련 내용에 대해 발언하는 모습이다.
ⓒ TJ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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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알아듣기 어렵다. 난해한 어휘를 구사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뜻인지 종잡기 어렵다. 사실 그의 언어는 '난해'하기는커녕 놀랄 만큼 단순하다. "통일은 대박이다"나 "골프가 침체돼 있다"를 봐도 알 수 있다.

한때 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꼽혔던 전여옥 전 의원은 그를 일컬어 "100단어 공주"라고 부른 바 있다. 섬세하고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대통령은 최근에도 특유의 어법을 구사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속보'를 타고 전해진 그 말을 들어보자. 

"'증세 없는 복지'를 직접 말한 적 없다."

곧 '없던 말'이 될 운명이었으나, 이 단순한 발언에 대한 사회적 반응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이 말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언어로 사유하는 인문학자로서 이 만만찮은 수수께끼와 씨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 말이 품을 수 있는 의미를 하나하나 풀어보기 시작했다.  

'증세 안 한다고 말한 적 없다.'
'복지하겠다고 말한 적 없다.'
'말하기는 했으나, 간접적으로 했다.'

이렇게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또 '속보'가 전해졌다.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나서서 '그런 말은 없었던 것 같다'고 해명한 것이다. 다시 말해, "대통령이 '증세 없는 복지를 직접 말한 적이 없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단순한, 그러나 이해 불가능한 그의 '말'

결국 대통령이 '증세 없는 복지'를 말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인데, 정작 유 원내대표는 "증세 없는 복지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정리하면 이렇게 되겠다. "증세 없는 복지는 있을 수 없지만, 대통령은 증세 없는 복지를 직접 말한 적이 없다고 직접 말한 적은 없다." 

내가 보기에, 박근혜 대통령의 언어는 단순한 게 문제가 아니라 이해 불가능한 게 문제다. 앞의 말로 시끄러워지기 전, 대통령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세수가 부족하니까 국민에게 세금을 더 걷어야 된다(는 게) 국민에게 할 수 있는 소리냐"고 꾸짖으면서, "국민의 부담을 최소화하며 복지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재미있는 것은, 대통령의 이 말이 공중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 법석을 떨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이 버젓이 "국민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야 된다"고 말하지 말고 "복지를 공고히 할 것"을 주문한 바로 다음날, 여당 내부에서 '대통령이 증세 없는 복지를 직접 말한 적이 있네 없네' 하며 갑론을박을 벌인 것이다.

박 대통령이 특정 지역에 편중된 사람쓰기를 한다는 지적을 받았을 때, 그는 "출신 지역과 상관없이 최고의 인재를 얻는 게 가장 큰 관심사"라고 말했었다. 이 '인재'들이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회의에서 들은 발언을 채 이틀도 기억하지 못한 셈이다. 뉴스를 보면, 대통령이 입만 열면 정부 관계자들은 입 다물고 받아 적기에 여념이 없던데, 이들은 대체 무얼 기록하는 것인지 궁금하다(대통령이 회의를 주재할 때 읽는 보고서는 관료들이 써준 것일 텐데, 대통령이 그걸 읽을 때마다 '원저자'들은 정신없이 받아 적는다).

회의는 대화를 나누고 의견을 교환하는 시간일 텐데,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하는 모든 회의는 '받아쓰기 대회'가 된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비전문가 한 명의 말을 정신없이 베끼는 웃지 못할 장면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 받아적기 바쁜 '전문가'와 '인재'들. 회의는 대화를 나누고 의견을 교환하는 시간일 텐데,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하는 모든 회의는 '받아쓰기 대회'가 된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비전문가 한 명의 말을 정신없이 베끼는 웃지 못할 장면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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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인재 중의 인재'로 골랐을 게 틀림없는 이완구 총리를 보라. 그는 이틀은 고사하고 두 시간 전의 일도 기억하지 못했다. 대통령 발언으로 시끄러웠던 2월 10일은 그의 인사청문회가 있던 날이기도 하다. 야당 의원이 제보내용을 거론하며 기자들을 협박해 불리한 보도를 막지 않았냐고 추궁하자, 그는 정색을 하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원님, 제가 한 나라의 국무총리 지명자입니다. 아무려면 제가 청문회 통과여부를 떠나서, 제 정치적 소신, 인격, 그리고 제 나름대로의 모든 걸 걸고 그렇게 얘기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후보는 "그런 녹취록이 있으면 공개해 달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곧 스피커로 "이것들 웃기는 놈들 아니여 이거..."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는 분연한 표정을 순박한 미소로 바꾸며 말했다. "현재 제 마음가짐이, 기억 상태가 조금은 정상적이지를 못합니다. 3일째 수면을 취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착오나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고는 생각을 합니다."

피곤해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인지, 피곤해서 한 말을 기억 못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저 목소리는 내가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청문회장에 앉아있기보다 진료실에 누워있어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병원 분위기'가 아주 없던 건 아니다. 녹음내용이 공개된 후, 야당의원이 "이제 그런 발언을 한 기억이 있습니까"고 묻자, 그는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고 답하지 않았던가.

대통령의 '빈말'이 재앙인 까닭

"모든 걸 걸겠다"던 이완구 후보는 뻔한 위증을 하고도 "한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이제 국민들은 총리가 일을 잘 하는가보다, 그가 잠을 잘 자고 있는지를 더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가 중대 발언을 할 때마다 이렇게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잘 주무셨어요?"

피곤한 상태에서 두 시간 전 일을 기억하는 것은 범인의 능력 밖이라 치자. 잠도 잘 잔 '인재'들이 대통령의 그 쉬운 말을 듣고도 발언을 '했네', '안 했네' 하며 싸우는 기이한 현상은 어떻게 봐야 할까?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대통령 자랑과 달리, 주위 사람들 지적능력이 "최고"가 아니거나, 대통령의 말이 애초에 해독 불가능하거나.

더욱 안타까운 건, 대통령조차 자신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과거 '골프 활성화'를 요구하는 제안을 무시하거나, 대놓고 "골프 칠 시간이 있느냐"고 말했었다. 하지만 최근 태도를 바꾸어, "골프 활성화에 대해서도 방안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팔을 걷고 나섰다. 청와대 참모진을 상대로 "골프 칠 시간이 있느냐"고 한 과거 발언이 '골프 치지 말라'는 뜻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골프 칠 시간이 있느냐'가 금지령이 아니라면, 다른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①실제 질문이거나 ②제안의 의미를 담은 수사의문문이다.

"골프 칠 시간 있나요?" "예, 많아요."
"골프 칠 시간 있나요?" "저는 언제든 좋아요. 며칠로 '라운딩' 날짜를 잡을까요?"

과거의 사소한 말을 끄집어내어 트집을 잡으려는 게 아니다. 대통령의 말은 결코 '빈말'일 수 없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든, 지도자의 말에는 막중한 무게가 실린다. 대통령의 발언은 그저 '말'이 아니라, 짧게는 국가 정책을, 멀리는 한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의례적인 신년사조차 우방의 어느 나라를 먼저 언급했네, 무슨 단어를 몇 번 사용했네 하며 치밀한 분석 대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통령이 과거에 한 말을 대충 넘기라고 요구하는 것은, 대통령의 존재를 심각히 여기지 말라는 것과 같다. 이런 주문은 지도자 자신에게 가장 큰 모욕이 될 것이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한 사람의 사고능력은 그 사람이 쓰는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그의 말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드러내 준다.

말에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을 질 수는 없다. 어제 말해놓고 오늘 나 몰라라 하거나, 두 시간 전에 제가 한 말을 부인하는 사람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들이 남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인이 되는 경우, 문제는 심각해진다. 자신의 삶뿐 아니라 사람의 삶까지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이는 세월호 사고를 통해 우리가 뼈저리게 깨닫게 된 사실이다.

대통령의 진짜 배신은 따로 있다

대통령은 후보시절 '공약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말을 수없이 했다. 그는 <힐링캠프>에 나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최악의 정치'라는 말까지 했다.
▲ '최악의 정치인' 대통령은 후보시절 '공약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말을 수없이 했다. 그는 <힐링캠프>에 나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최악의 정치'라는 말까지 했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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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증세가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고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분명히 '증세 없는 복지'를 약속하고 표를 얻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증세 없는'은 수단일 뿐, 궁극적인 약속은 '복지'였다. 따라서 더 큰 '배신'은 세금을 핑계로 복지 약속을 어기는 것이다. 

이제 말하기도 지겨운 한국사회의 높은 자살률과 낮은 행복지수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제 복지는 개인이 죽고 사는 문제이며, 사회를 존속시킬지 말지를 결정하는 문제다. 우선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말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법인세 인상과 누진세 강화 등 복지재원 마련을 위한 현실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 시간 고통 받는 국민들을 돌아보는 것부터 시작할 일이다. 1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세월호는 그 자리에 가라앉은 채로 있고, 유족들은 사고 발생 당일처럼 고통 받고 있다. 이들을 외면한 채 '국민행복시대'를 연다는 것은 잔인한 말장난이다.

"언제든 유가족들을 다시 볼 것입니다. 무엇보다 진상규명에 유족 여러분의 여한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대통령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세월호 사고에 관한 한 대통령은 이 시간에도 '사라진 존재'다. 국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는가. 최근 수모를 겪고 있는 아파트 경비원들은 7시간은 고사하고 70분도 자리를 비우기 어렵다. 7시간 떠나있기는커녕, 7시간 이상 초과근무를 해도 자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게 한국사회다.

한국 아파트 단지들은 최근 임금 인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무급 휴식시간'을 늘리는 추세다. 말이 '휴식'이지, 경비실을 떠나기 어렵고, 새우잠을 자면서 택배나 방문객 관리 등의 업무를 계속해야 하는 야간노동이다. 하물며 한 나라의 지도자가 국가재난 당시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묻지 말라는 것은, 대통령이 무의미한 자리라고 웅변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여전히 답해야 하는 이유

이번 이완구 총리 인준에도 '도덕성보다 능력을 본다'는 기이한 말이 동원되었다.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은 "세종대왕도 흠 있지만 능력 있는 인재 택했다"고 주장했다. 왜 세종대왕이 '흠 많은' 후손 하나 때문에 청문회장에 끌려나와 욕을 보여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도덕-무능" "부도덕-능력"이라는 '대립쌍'이 끊임없이 동원되는 한국의 언어현실은 더욱 기괴하다.

도덕적 결함과 과오가 '능력'과 연결될 이유가 있다면, 최고의 인재는 수감자 중에서 찾는 게 좋을 것이다. 강력범일수록 '능력자'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하지만 진정으로 유능한 사람은 비겁한 술수를 쓰지 않는다. 무능하기에, 제 능력으로 할 수 없기에 편법과 '꼼수'를 동원하는 것이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제 이익을 챙겨온 사람을 뽑아 놓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 이익을 챙길 뿐이다.

'부도덕해도 유능하다'는 왜곡된 언어로 지도자에 오른 대표적인 사람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었다. 집권 후 그는 대통령의 자격에 대한 기준을 한없이 낮추어 놓았다. '누구나 대통령을 꿈꿀 수 있는 사회'를 만든 셈이지만, 그가 남긴 물리적 유산은 끔찍하며, 보이지 않는 유산은 더욱 끔찍한 형태로 남아 한국사회를 오랫동안 괴롭힐 것이다. 그를 이어 대통령이 된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의 자격만이 아니라, 대통령이 꼭 있어야 하는 자리인지를 회의하게 만들었다.

대통령의 명예를 더럽힌다고 할지 모르나, 명예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고, 지도자의 명예는 책임을 지는 데 있다. 시간을 끈다고, 기억에서 지워진다고 책임이 완수되지는 않는다. 국민의 목숨은 지도자의 알량한 '명예'보다 훨씬 소중하며, 세월호는 잊을 수 있는 사고도 아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박근혜 대통령이 '7시간' 의혹에 답해야 하는 이유다.


태그:#세월호, #공약, #말, #복지, #증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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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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