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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만 17년 전인 1998년 5월 15일이었다. 그날 한 청년이 서울 명동 소재 천주교 인권위원회를 찾아왔다. "어떻게 왔냐"고 하니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그는 머뭇거리며 "지난 2월 24일 판문점에서 있었던 형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상의하고 싶어 왔다"고 내게 말했다.

 

그래서 듣게 된 사연은 참으로 놀라웠다. 납득하기 어려운 자살 정황이 내내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청년에게 "혹시 부모님이 오셔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냐?"고 다시 물었다. 그리고 3일이 지난 어느 날, 우리 사무실을 찾아온 이가 바로 김훈 중위 아버지이자 '쓰리 스타' 출신의 육군 예비역 중장, 김척 전 장군이었다.

 

처음 만난 아버지는 군인 같지 않았다. 흔히 '장군'하면 떠올리는 두터운 손이나 우렁찬 목소리, 또는 약간 허세 든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학자에 가까운 풍모였다. 조용하면서 논리적이었다.

 

이러한 이미지와 달리 김척 장군은 야전 사령관 출신이었다. 1997년 11월 전역하기 직전까지 김척 장군은 북과 가장 밀접한 전선을 담당하는 1군 군단장을 지냈다. 또한 1970년대 초임 장교 시절에는 무려 3년이나 월남에 파병돼 참전한 군인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무관'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36년간 입었던 푸른 군복을 벗고 전역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아들을 잃었다. 그것도 아버지처럼 군인의 길을 가겠다며 스스로 육군사관학교를 선택한 장남의 의문사였다. 상상으로도 떠올려 본 적 없던 비극이 닥쳐왔을 때, 아버지는 처음으로 자신이 36년간 걸어온 군인의 삶이 부끄러웠다고 고백했다.

 

'36년 군인' 인생을 부끄러워 한 김척 예비역 장군

 

크게 두 가지 이유였다고 한다. 하나는 자신이 청춘을 바쳐 충성한 국가와 군이 이 정도 수준인 줄 몰랐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군인으로 살아온 인생이 자랑스러웠다고 한다. 조국을 위해 충성했고 이를 통해 이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데 한 역할을 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아들을 의문 속에 잃고 그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확인한 이 나라 민주주의 수준과 군의 거짓말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고 고백했다. 명백한 거짓말로 있는 사실조차 부인하는 것을 보며 군인으로 살아온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 "차라리 죽고 싶었다"고 아버지는 고백했다.

 

그래서 두 번째 부끄러움은, 그동안 자신이 경험한 어떤 사건들에 대한 기억이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군 지휘관으로 있는 동안 발생했던 부대 내 사고에 대해 과연 자신이 올바르게 응했는지 두려웠다고 한다. 일선 부대에서 올라온 사고 보고를 접한 후 "유족 편에서 최대한 편의와 위로를 하여 원만하게 처리될 수 있도록 하라"는 지휘 서신을 내렸는데 과연 그것이 전부 사실이었을까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 그 미안함을 갚을 수 있는 자신의 역할이 무엇일까 고민해 보니 나온 답은 하나였다고 한다. 바로 아들,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에 대해 국방부와 타협 없이 싸워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육군 중장 출신인 나조차도 이럴진대, 하물며 일반 국민의 부모가 당할 고통과 상처는 어떻겠는가."

 

실제로 지난 17년간 국방부와 육군 본부는 김훈 중위 부모에게 여러 경로를 통해 다양한 제안을 거듭해 왔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난 2013년 당시 언론에 보도된 '김훈 중위 순직 처리' 오보였다. "김훈 중위를 순직 처리하기로 했다"는 국방부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해 당시 언론은 대대적인 보도를 했다. 이로 인해 상당수 국민들은 김훈 중위가 지금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김훈 중위는 지금 현재 국군벽제병원 영현실 창고에 방치되어 있다. 오늘로서 정확히 만 17년째다. 김훈 중위가 사망한 1998년에 태어난 아이가 올해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그는 여전히 이 세상을 떠나지 못했다. 왜 그럴까.

 

아버지가 원했다면 김훈 중위 사건은 이미 해결될 수도 있었다. 진실 규명 대신, 국방부와 정치적 타협을 선택했다면 김훈 중위는 순직 처리 후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도 있었다. 즉, 김훈 중위가 자살했음을 부모가 인정하면 국방부가 그 자살 원인을 '공무상 연계성'이 있다고 판단해 주겠다는 은밀한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호하게 내쳤다.

 

"지난 17년간 내가 진상규명을 외친 이유는 단지 국립묘지에 아들을 안장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미 죽은 훈이가 국립묘지에 있든, 저 벽제병원 창고에 방치되어 있든 그것은 사실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제가 정말 원하는 것은 진실입니다. 훈이가 왜 죽었는지,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그 진실을 밝히고 싶습니다. 그래서 훈이처럼 죽어간 모든 이 나라 군인들의 사인이 밝혀진 후 함께 국립묘지에 전부 안장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내가 싸워온 이유입니다."

 

김훈 중위, 사인 진실 밝힐 열쇠는 정말 없나?

 

그렇다면 김훈 중위의 자·타살 논쟁을 끝장낼 열쇠는 정말 없을까. 아니다. 있다. 오히려 그 열쇠는 너무 간단하다. 타살 여부를 놓고 17년간 공방을 벌이고 있지만 이 사건 핵심을 한가지로 압축한다면 '화약흔' 하나이기 때문이다.

 

1998년 2월 24일 낮 12시 20분경, 군 수사당국은 김훈 중위가 자신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지급된 권총을 '밀착'시킨 후 스스로 오른손 검지를 이용해 격발했다고 밝혔다. 복무 부적응으로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군 수사당국의 발표는 틀린 것이었다. 김훈 중위는 관자놀이에 권총을 밀착시킨 후 자살한 것이 아니라 총구가 관자놀이에서 약 1cm에서 3cm 정도 떨어진 '근접' 상태에서 권총을 발사해 숨졌다. 이 사실을 밝힌 사람은 유족 측이 선임한 재미 법의학자 노여수 박사였다. 군 수사당국은 처음에는 '근접사'를 부정하다가 결국 인정하게 된다.   

 

군은 왜 근접사를 부정하고 싶었을까? 이유가 있었다. 사망 시 권총을 관자놀이에 밀착하는 것은 '전형적인 자살자 증후'였다. 하지만 관자놀이에서 권총이 떨어진 근접 상태에서 격발했다면 이는 통상 '타살'의 정황으로 해석된다. 자살을 결행하는 이가 실수 없이 딱 한 발로 끝내고 싶은 심리가 '밀접사'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훈은 '근접사'였던 것이다. 즉, 타살 정황이었다.

 

이보다 더 분명한 증거도 있다. 바로 화약흔이다. 화약흔이 자살과 타살을 판가름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2012년 12월 7일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날 32살의 데이비드는 학교 운동장에서 어린 아들 두 명을 차로 픽업하여 귀가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집을 약 50m 앞두고 차가 고장 났고, 이에 데이비드는 두 명의 아들에게 차를 밀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참혹한 불행이 덮쳤다. 아버지의 차를 밀던 어린 두 아들을 승용차가 달려와 그대로 받아버리고 만 것이다. 가해 운전자는 만취 상태의 20살 백인 청년. 어처구니없는 사고에 아버지 데이비드는 경악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체포한 이는 피해자 아버지 데이비드였다.

 

어찌된 일일까.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가해자를 체포하기 위해 사고 차량에 다가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해자는 이미 머리에 권총을 맞고 숨져 있었다. 그러자 경찰은 음주 운전으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 데이비드가 가해자를 권총으로 쏴 현장에서 사살했다고 판단, 그를 살인죄로 체포한 것이었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사고 직후 가해 차량에 가보니 이미 누군가의 총을 맞아 가해자가 숨져 있었을 뿐 자신은 결코 권총을 쏜 적이 없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이후 살인죄로 기소된 데이비드는 갈수록 불리해졌다. 청년을 쏜 총알을 분석한 결과, 데이비드 소유의 권총 모델과 같은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문제의 데이비드 권총이 이 사건 직후 사라졌다는 점도 수사 검사에 의해 밝혀졌다.

 

더 결정적인 증거도 나타났다. 데이비드가 권총을 가지고 사망한 음주 운전자의 차량 앞에서 총격을 가하는 장면을 봤다는 목격자가 나타난 것이다. 목격자는 법정에서 이러한 사실을 증언하기도 했다. 누가 봐도 데이비드가 범인임을 부정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다가온 2014년 8월 27일. 사건이 발생하고 무려 18개월이 지난 그때, 법원이 데이비드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과연 결론은 어찌 되었을까. 놀랍게도 미국 법원은 데이비드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론이었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놀라운 반전, 데이비드의 '무죄' 이유는?

 

모든 증거가 데이비드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하던 그때, 데이비드의 변호인은 아주 기초적이며 단순한 진실 하나를 떠 올렸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증인은 이 사건에 처음부터 관여해온 법의학자였다. 그리고 증언대에 선 법의학자에게 변호인은 물었다.

 

"피고인 데이비드의 옷과 손에서 화약흔이 검출된 사실이 있습니까?"

 

그러자 법의학자는 답했다.

 

"아니요. 화약흔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었다. 살인죄로 기소된 데이비드에게 판사가 무죄를 선고한 이유였다. 왜 그랬을까. 권총을 발사하면 발사자의 손에서는 반드시 '화약흔'이 검출되어야 한다. 특히 큰 권총을 격발할 경우 총알이 앞으로 발사되면서 뒤로 뿜어져 나오는 안티몬과 바륨 등 화약 물질은 상당하다.

 

그렇기에 권총 사망사고가 많은 미국에서는 두 사람이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사망자의 양 손을 깨끗한 거즈로 닦는 일이다. 그래서 분석 결과, 사망한 두 사람 중 누군가의 손에서 화약흔이 검출되면 그를 이 사건의 범인으로 결론 내리는 것이 정석이다.

 

그런데 데이비드의 손과 옷에서는 이러한 화약흔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고 법의학자는 증언했다. 그러자 판사는 "권총 발사 시 검출되는 화약흔이 데이비드의 옷과 손에서 검출되지 않았다"며 "이는 데이비드기 권총을 발사하지 않았다는 과학적 증거"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김훈 중위 사건의 진실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군 당국은 17년 전, 김훈 중위가 자신에게 지급된 권총을 오른손으로 격발해 자살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렇다면 김훈 중위의 오른손에서는 화약흔이 검출되어야 했다. 더구나 김훈 중위가 자살하는 데 사용한 권총은 세계에서 가장 사이즈가 크다는 '베레타-9'이었다. 뿜어져 나오는 화약흔 역시 대단하다. 화약흔이 검출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다.

 

하지만 김훈 중위 오른손에서는 화약흔이 일절 검출되지 않았다. '완벽하게 깨끗한 손', 이것이 김훈 중위의 오른손이었다. 이는 김훈 중위 사건을 조사한 미 범죄수사연구소의 '증거 추적 감정보고서'(1998년 3월 25일)에서도 확인된다.

 

연구소는 "오른 손잡이인 (김훈 중위)의 왼손바닥에서만 뇌관 화약 잔재물이 나왔으니 스스로 쏘았다고(자살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됨"이라는 특별한 주의 문구를 보고서에 남겼다. 즉, '김훈 중위의 오른손에서 화약흔이 검출되지 않았음으로 자살로 단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국방부는 이를 무시했다. 이것이 지난 17년째 김훈 중위가 자살했는지 여부를 두고 논쟁하게 된 진짜 이유이다.

 

아버지의 전쟁, 대체 언제 끝날까

 

참으로 길고 긴 17년이었다. 지체된 17년 동안 아버지와 나는 정말 많은 전쟁을 치러왔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나는 또 나대로 인권운동가로서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어느 때는 항의하다가 군인에게 개처럼 끌려 나가기도 했고, 온갖 핍박과 무시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다 합친다 해도 김훈 중위 부모가 겪어야 했던, 크고 깊은 절망과 고통에 비하면 별 거 아니었다. 군인으로서, 또 인간으로서 아버지가 바친 36년간의 명예는 철저히 파멸됐다. 선·후배 전우들로부터 "아들을 잃더니 김척이 정신병자가 되어 군을 능멸한다"는 말을 면전에서 들어야 했던 심정을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울역 광장에서, 국방부 철문 앞에서, 그리고 사람이 있는 거리 곳곳에서 울고 또 울며 호소했다. 다행히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김훈 중위 의문사를 밝힌 '국방부 특별합동 조사단'이 1998년 12월 만들어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진실을 밝힐 것처럼 큰소리치던 양인목 당시 특조단장의 태도는 점점 바뀌었다.

 

"훈이는 내 조카같은 아이"라며 "헌병대 놈들이 애초 수사를 엉터리로 해서 이 지경"이라며 내 앞에서 침을 튀기던 특조단장은, 채 1달이 지나가기도 전에 입장을 바꿨다. 심지어 유족측이 선임한 노여수 재미 법의학자가 '김훈 중위 타살론'을 굽히지 않자 "국익을 생각해서 신중하게 말하라"며 압박했다. 이러한 압력을 받은 노여수 박사는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치욕'이라며 그 전모를 폭로했다.

 

그러던 1999년 1월 14일. 이날은 김훈 중위 사건에서 대단히 중요한 날이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국내외 법의학자들이 모여 어떤 의문사 사건에 대해 토론회를 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족의 간절한 기대와 달리 이날의 토론회는 전혀 공정하지도, 과학적이지도 않았다. 공정함은 고사하고 이미 내린 '자살' 결론을 사수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방불케 했다.

 

이는 특조단이 일방적으로 구성한 토론자 비율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이미 '김훈 중위 자살' 입장을 밝힌 토론자는 8명이었다. 반면 '타살론'을 주장하는 이는 노여수 박사가 유일했다.

 

이렇게 시작된 기상천외한 토론회는 이후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놀라운 방식으로 결론을 내리게 된다. 자·타살 여부에 대해 토론자가 각각 의견을 내는 방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당연히 자살 8명, 타살 1명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김훈 중위 자살'이었다. 이후 특조단은 1999년 4월 14일 이 결과를 토대로 '김훈 중위는 자살했다'고 국회 국방위원회에 보고했다.

 

그 날이었다. 김훈 중위 어머니는 그 불공정한 토론회장에서 특조단에 항의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내 달려든 젊은 군인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나왔다. 그러자 어머니는 용산 전쟁기념관 복도에서 울부짖으며 외쳤다.

 

"여기가 대한민국 맞습니까? 저는 이 나라 국민입니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억울한 죽음을 만듭니까?"

 

그러더니 어머니는 자신의 머리를 앞으로 내밀며 다시 외쳤다.

 

"저를 실험 도구로 써주십시오. 제 머리에 총을 쏴주십시오. 그래서 김훈 중위가 죽은 것이 자살인지, 아니면 타살인지 제발 실험을 해주십시오. 저는 죽어도 좋습니다. 부디 제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국방부는 왜 김훈 중위의 타살론을 외면할까?

 

그랬다. 1998년 2월 24일 이후 지난 17년, 유족의 노력 끝에 김훈 중위 사건은 모두 5번에 걸쳐 조사가 이뤄졌다. 그중 3번은 군 수사기관의 조사였는데 결론은 모두 '자살'이었다. 하지만 군이 아닌 다른 국가기관에서 이뤄진 조사에서는 그 결과가 달랐다.

 

예를 들어 1999년 국회 국방위원회와 유족 측이 제기한 민사소송 대법원 판결, 그리고 2009년 대통령소속 군 의문사위원회 및 2012년 국민 권익위원회 등 4개 국가기관의 조사 결과는 국방부 자살 결론과 달랐다. '자살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이었다. 즉, 국방부와 육군본부만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고 판단할 뿐 어느 누구도 자살로 보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국방부만 이처럼 김훈 중위 사망 원인을 자살로 우기는 것일까? 많은 이들이 나에게 이유를 묻는다. 그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김훈 중위 하나만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김훈 중위 사인을 자살에서 타살로 바꾸는 순간 몰려올 후폭풍이 두렵기 때문이다. 

 

지난 66년간 이 나라 군대에서는 약 3만9000여 명의 군인이 자살 또는 변사로 처리됐다. 이렇게 '처리된' 군인들은 국가로부터 아무런 예우를 받지 못한다. 국립묘지 안장도 안 되고 유족 보상도 전혀 없었다. 김훈 중위 사인을 자살이 아닌 타살로 바꾸는 순간 국방부는 그 3만9000명의 유족이 전부 다 달려올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이는 국방부 조사본부로부터 받아낸 공식 답변만 봐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1983년 1월 1일부터 만 30년간(2013년 12월까지) 군 헌병대가 자살로 처리한 사건 중 피해 유족이 이의를 제기하여 그 결과가 타살 등으로 변경된 사실이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 "단 한건도 없다"는 답변을 보며 나는 전율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과연 김훈 중위 사건에 대한 희망은 있을까.

 

김훈 중위 어머니 "고상만씨 사기꾼이야"

 

'희망'을 이야기하면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바로 김훈 중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었다. 17년 전인 그때, 처음 내가 만난 김훈 중위의 어머니는 당시 막 50대를 넘긴 아주머니였다. 하지만 그 후 17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그때의 50대 아주머니는 지금, 칠순의 할머니가 되었다. 세월이, 지난 17년간의 분노와 한이 그 어머니를 더욱 쇠잔한 할머니로 만들었다.

 

그런 어머니가 몇 달에 한 번씩 나에게 전화를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말할 수 있는 모든 희망을 들려주고 싶었다. 지금은 어렵지만 그래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희망을 나는 지난 17년 내내 말해 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불쌍한 어머니가 느낄 절망이 너무도 잔인할 것 같았다.

 

그래서 사건 직후인 1998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진실을 밝혀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자 이번엔 틀림없다고 나는 또 어머니에게 말했다. 특히 노 대통령의 장남과 김훈 중위가 같은 고등학교 동기 동창이니 더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소리까지 해 가며 나는 어머니에게 희망을 전했다.

 

다행히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건군 50년 사상 최초로 "군 의문사를 규명하라"는 특별지시를 국방부장관에게 내려 '특별합동 조사단'을 구성으로 했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 역시 사상 최초로 '대통령 소속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군 의문사를 밝히는 노력을 전개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들 기구를 주도한 국방부의 방해로 인해, 늘 진실에 다다를 문턱을 넘지 못하고 좌절됐다는 사실이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또 나를 찾았다. 그리고 "이제 또 어떻게 하냐"고 묻고는 했다. 그때마다 내 답은 늘 똑같았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다시 또 "잘 될 것"이라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크게 낙담한 어머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할 때 역시 그랬다. 내가 지지한 적 없는 권력이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이명박 정부가 출범해서 김훈 중위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는 그동안 김훈 중위 사건 전개 과정에서 관여한 바가 없으니 조금만 노력하면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그나마 유지되어온 '대통령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를 예산 낭비라며 과거사 기구 일괄 정리 때 같이 없애 버렸다. 비참했다. 지금의 박근혜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고백하자면 김훈 중위 사건의 종착점은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나는 또 말했다. 지금은 생각나지 않지만 박근혜 정부가 출범할 때인 2013년 어느 날, 김훈 중위의 어머니가 또 전화를 해 앞으로 어찌 될 것 같은지 물었다. 나는 또 다시 그 어머니에게 희망을 말하고 싶었다. 그래도 뭔가 또 희망을 찾고자 나에게 전화를 한 그 어머니에게 나는 다 잘될 거라고, 그러니 건강하셔서 이 끝을 보면 되니 건강하시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때였다. 그동안 늘 내 말만 가만히 듣던 그 어머니의 입에서 참으로 충격적인 단어가 흘러나와 내 귀에 전해 왔다.

 

"고상만씨. 당신, 사기꾼이야."

 

순간 나는 멍했다. '사기꾼'. 어떻게 이런 말을 나에게 할 수 있지? 그런데 그 다음에 들려오는 어머니의 음성은 떨렸다. 눈물이 가득 배인 음성이었다.

 

"그런데 그 사기꾼 덕분에 내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니 고상만씨는 나에게 참 고마운 사기꾼이에요. 그동안 내가 정말 죽고 싶도록 괴로울 때도 늘 잘 될 거라고, 다음에는 틀림없다고 하면서 늘 희망을 준 사람이 고상만씨인데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죽었을 거예요. 그래서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날 어머니도 울었고 끝내, 나도 울었다. 어머니의 눈물이, 그 말들이 내 가슴에도 깊이 파묻혀 눈물로 흘렀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이젠 정말 이 사기꾼 노릇을 그만 두고 싶다고. 그만 김훈 중위 사건을 끝내고 싶다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사건의 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국방부에 묻고 싶다. 도대체 언제까지 김훈 중위는 저 국군 벽제병원 영현실 창고에 방치할 것인지. 17년의 시간이 여전히 부족한 것인지 정말 절절하게 묻고 싶다.

 

예능 프로 <진짜 사나이>에서 말하는 그 전우애를 '억울하게 죽어간' 고 김훈 중위에게도 보여 달라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국방부에 외친다.

 

2015년 2월 24일, '영원히 젊은 청년 장교' 고 김훈 중위의 17주기 명복을 빈다.


태그:#김훈 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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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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